(part4에서 계속) 2007년에 태동한 밴드 써드스톤은 결성 초기에 갈팡질팡했다. 라인업도 흔들렸지만 음악적으로도 혼란스러웠다. “1집은 쓰레기입니다. 제작비가 없어 홈레코딩, 믹싱, 마스터링, 재킷 디자인까지 제가 직접 다 했기에 완성도가 형편없어요. 홍보도 전혀 되지 않아 발매한지 3달이 지났을 때까지 단 17장이 팔렸습니다.”(박상도)

록밴드 써드스톤 1집의 수록곡들은 밴드 슬리핑 잼 시절에 박상도가 즐겨 불렀던 포크 록과 블루스, 하드록, 평크, 싸이키델릭까지 장르가 혼재되어 있다. 당시 박상도의 정서는 과거의 아날로그적 감성이 지배를 했다. 음악적 완성도를 떠나 그가 1집의 첫 트랙 ‘오래된 것이 좋아’를 좋아하는 이유다. 써드스톤은 앨범 발표 후 공연을 열심히 했지만 곧 해체됐다. 블루스 록으로 음악 방향을 잡아가면서 베이스 안성진과 박상도가 음악적 견해차이가 생겨났기 때문. 군 입대 문제가 있던 드럼 안성용도 형을 따라 밴드를 그만두었다.

써드스톤 1기 바다비공연 2008년

밴드 해체 후, 박상도는 대학에 복학했다. 당시 그는 뮤지컬 배우를 꿈꾸며 연기학원을 3달 정도 다녔다. 자신을 모델로 직접 쓴 대본과 노래로 구성된 창작뮤지컬 ‘지금 이 순간’을 연출해 동아리 친구들과 음대 강당에서 공연도 했다. 이후 ‘내 마음의 풍금’등 5군데 정도 뮤지컬 주인공이 되고자 오디션을 보러 다녔지만 죄다 떨어지며 미련을 접었다. 2008년 인천 록 캠프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한두수와 5인조 라인업을 꾸며 2기 써드스톤을 결성해 라이브클럽 바다비에서 공연을 했다. “잠깐이었죠. 두수의 화성학적으로 잘 정리된 미끈한 사운드와 제 원초적인 질감이 충돌해 공연 한 번 하고 해체했습니다.”(박상도)

이후 ‘뮬’ 사이트에 멤버 구인공고를 올려 베이스 허문녕, 드럼 김치성과 2008년 10월 3인조 라인업을 결성해 블루스 록을 지향한 2집‘아임 낫 어 블루스맨(I’m Not a Blues Man)’을 냈다. 상상마당에서 집계한 ‘홍대에서 가장 공연 많이 한 밴드 설문조사’에서 1위를 했을 정도로 무수하게 공연을 했다. 다음과 네이버의 이주의 앨범에 후보에 이어 2010년 3월 상상마당 밴드 인큐베이팅 3기에 선정되면서 상금 300만원을 받았다. 이후 기타 실력을 인정받은 박상도는 요조의 라이브 음반에 세션으로 참여했다. 영화 ‘조금만 더 가까이’에서는 기타리스트로 출연을 하고 요조와 OST 2곡을 공동 작업했다.

박상도 써드스톤 2기 영등포 엠펍 공연 2009년

또한 조덕환밴드에서 세션으로 참여하면서 한두수와 다시 만났다. 당시 인천 부평에서 입시생과 취미생을 대상으로 개인 음악레슨까지 했던 박상도는 생애 가장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모든 일의 중심에 써드스톤은 없었다. 100만원을 들여 자체 제작한 2집은 석 달 동안 257장이 팔렸을 뿐이다. 단독공연을 해도 관객이 오지 않아 초라한 마음이 들었던 그는 2011년 4월 상상마당 인큐베이팅 지원공연 무대에서 고별공연을 선언하며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분의 사운드를 토해냈다. 2집은 1집에 비해 선명한 음악적 방향을 잡긴 했지만 자신들만의 독창적 사운드를 제시하지는 못했었다.

모든 걸 다 접고 5월에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어학원 학생비자를 받아 무작정 떠났다. 히스패닉과 한인, 흑인들이 몰려 사는 웨스턴 지역에서 하숙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길거리공연이 유명한 산타모니카 해변 월셔 3번가에서 음악적 전기를 마련하는 경험을 했다.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곡을 현지 길거리공연에서 다 불렀지만 반응은 썰렁했습니다. 그때 한 흑인 기타리스트가 자기만의 스타일로 연주하는 걸 우연하게 봤는데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만의 음악스타일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박상도) 그는 LA 플러톤에 한인사장이 운영하는 라이브 클럽에서 월급 2,000달러를 받고 반주에 맞춰 기타치고 노래하는 일자리를 잡았다. “팁으로 한 달에 2,000달러를 받기도 했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작곡가 겸 기타리스트 샘 드러커맨에게 월 400달러를 주고 레슨을 받았습니다. 배운다기보다는 음악동료를 많이 만들려는 마음으로 함께 공연을 했습니다.



관객은 다 외국인이고 모든 게 미국식인지라 미국인이 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 받았죠. 사실 미국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한국 사람을 피하고 먹는 것도 미국스타일로 먹었습니다. 그런데 4일 정도 먹으니까 몸살이 나더군요.(웃음)”(박상도) 갑자기 한국이 그리웠다. 또 회의감이 밀려들었다. 미국말로 기타치고 노래를 하지만 미국 뮤지션들에 비해 필이나 실력이 부족해 한계를 절감했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한국적인 것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2011년 12월에 결국 돌아왔다.

페이스북을 통해 연락을 취해 놓은 한두수가 국악팀 악스에 오디션을 주선했지만 포지션이 애매해 떨어졌다. 미국에서처럼 박상도는 2012년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부터 홍대와 인사동 등지에서 홀로 길거리 공연을 시작했다. 소문이 나면서 MBC 휴먼 라디오에서 ‘길거리를 사랑한 박상도’란 타이틀로 방송출연도 했다. 상상마당 음악감독인 유병렬과 인연이 되어 새롭게 결성한 밴드 바스켓 노트에 리드보컬로 들어갔다. “데모 녹음까지 했지만 다른 사람의 노래를 부르기가 힘들어 가창력 부족으로 짤렸습니다.(웃음)”(박상도) 2012년이 저물어가던 12월 어느날. 흑석동 박상도의 집 옥탑방에 박상도와 한두수 그리고 군제대 후 길거리 공연에 찾아왔던 안성용이 모여 삼겹살 구워먹으면서 써드스톤을 재결성해 새로운 음악을 해보기로 의기투합했다. 합주를 하면서 이질적인 박상도의 싸이키델릭과 한두수의 포스트패닉이 합쳐지면서 묘한 사운드가 빚어지기 시작했다.(part5로 계속)



글, 사진.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사진제공. 박상도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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