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늙음이 맨 마지막에 온다는 것은 얼마나 저주인가. 신은 실수를 했다. 기어 다니는 벌레였다가 스스로 자기를 가두어두는 번데기였다가 드디어 천상으로 날아오르는 나비처럼 인간의 절정도 생의 맨 마지막에 와야 한다고. 인간은 푸르른 청춘을 너무 일찍 겪어버린다고.’

소설집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에서 소설가 공지영은 위와 같이 말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늙음이 마지막에 오는 것은 비극일지 모른다. 그래서 ‘추억’이란 말의 진짜 의미는 ‘미련’일지도.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애도’ 일지도. 여기에는 성별에서 오는 차이도 존재한다. 시간 앞에서 여자는 남자보다 불리한 면이 있다. 중년남성들은 쌓아온 업적을 바탕으로 ‘여유와 멋을 아는 미중년’으로 종종 불리지만, 중년여성들은 성정체성을 잃어버린 제3의 성인 ‘아줌마’로 묶이기 일쑤다. 아줌마를 향한 사회의 평균적인 시각은 여전히 희화화됐거나 폭력적이 아니면, 측은지심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영화 ‘관능의 법칙’에는 생물학적 전성기를 지난 세 명의 여자가 나온다. 해영(조민수), 신혜(엄정화), 미연(문소리). 직업도 사는 방식도 다르지만 ‘40대 여자’라는 그 미묘한 타이틀이 그녀들을 단단하게 묶는다. 영화는 그녀들에게 사랑과 정열을, 무엇보다 잊고 지낸 ‘관능’을 찾아주려 한다. 40대 여성의 성에 정면 돌파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기획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제목과 달리 ‘관능의 법칙’은 사실 좀 밋밋하다. 비아그라에, 원나잇 스탠드에, 섹스! 섹스! 섹스! 말초신경을 노리는 장면들이 적지 않게 등장하지만 자꾸 맥이 빠진다.


해영은 다 큰 딸과 사는 싱글맘이다. ‘싱글즈’ 동미(엄정화)의 15-20년 후 모습이 딱 이렇지 않을까 싶은 그녀는 그러나 동미와 달리 결혼과 남자의 사랑에 집착한다. 케이블 TV PD인 신혜는 ‘칙릿’ 영화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커리어우먼이다. 당당한 언니, 섹시한 언니, 쿨 한(척 하는) 언니! 하지만 이런 캐릭터는 사실, 그동안 너무나 많이 봐 온 탓에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시대의 아이콘 엄정화가 이 캐릭터를 맡은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엄정화이기에 상징적이지만 그녀이기에 오히려 식상해 보이는 면도 있다. 고개 숙인 남편을 위해 질 성형도 불사하는 미연은 가정주부다. 남편이 왕비마마처럼 받들고 유학 간 자식은 별다른 속을 썩이지 않는 눈치이니, 이만하면 남부럽지 않은 인생 같디. 하지만 남편의 바람과 함께 미연은 졸지에 아침드라마에서 무수히 봐 온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다. 이렇듯 관성적인 묘사가 아쉬운 영화는 상업영화라는 테두리 안에서 대중과 타협한 흔적을 여럿 보인다. ‘관능의 법칙이 도대체 뭐야?’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관능의 법칙’은 묘하게 사람의 잠자고 있던 감성을 툭 건드리는 면이 있다. 순간적으로 울컥하게 되는 먹먹한 감정은 내가 언제가 당도할 시간에 대한(혹은 누군가 통과했을 시간에 대한) 현실감에서 나오는 듯하다. 싱글맘이거나, 싱글이거나, 주부이거나. ‘관능의 법칙’에는 여자들이 걸어 들어 갈 다양한 인생의 선택지들이 들어있다.

영화를 보며 나는 연하남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신혜가 뼛속까지 외로워보였다. 사랑의 속성과 생계가 치명적인 걸 이미 아는 여자에게 사랑의 순수를 들먹이는 어린 남자가 다소 불편해 보인 게 사실이다. 바람난 남편으로 인해 자존감을 위협받는 미연을 보면서는 안타까웠다. 아직 가보지 않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 가장 마음을 잡아끄는 것은 해영의 에피소드. “오르가슴보다 암이 더 어울리는 나이” 임을 자기 자신이 증명해 보이는 그녀는, 결국 사랑마저 제 손으로 끊어내려 한다. 스스로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노화에 대한 공포와 돌이킬 수 없는 삶의 회한이 짠하면서도 가슴 아팠다. 그러니까 이것은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를 노래한 김광석을 멋쩍게 할 이야기인 것이다. 많은 이들이 겪게 될, 그런.

10년 전 ‘싱글즈’에서 서른을 앞둔 나난(장진영)은 “마흔 살쯤엔 뭔가 이뤄지겠지!”라며 파이팅을 외쳤다. 하지만 진짜 파이팅이 필요한 시기는 ‘뭔가가 완성돼 있으리라 믿었던 40대임’을, ‘관능의 법칙’은 얘기한다. 그리고 조금 더 뜨거워도 괜찮다고 다독인다. 위로를 건네며.

다만,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영화도 조금 더 뜨거워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 정도?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년)가 당도한 지도 벌써 15년이 훌쩍 넘었다. 이젠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발칙함을 뛰어 넘는 영화가 나올 때도 되지 않았나.

글.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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