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제국’을 보고 나서 고수가 장태주 캐릭터를 쉽게 벗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아니, 그게 가능해? 이토록 강렬한 캐릭터를 떨쳐내는 건 불가능해!’ 그런데 불과 3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고수는 3개월 만에 그 예감이 틀렸다는 걸, ‘집으로 가는 길’을 통해 보기 좋게 증명해 보인다. 2004년 있었던 주부 장미정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집으로 가는 길’은 분명 전도연의 영화다. 하지만 전도연이 더 도드라지게 보일 수 있었던 건 파트너인 고수의 생활 연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아직 연기가 어려워서 미치겠다는 고수에게서 뜻밖의 고수(高段數)를 봤다.

Q. 떨고 있네요. 추우세요?
고수:
네. 이상하게 춥네요. 왜 그러지?

Q. 겨울 촬영할 때에 비하면 이 정도 추위는 약과 아닌가요?(웃음)
고수:
그러니까요. 마음이 추워서 그런가?

Q. 마음이 왜 추울까.
고수:
(‘집으로 가는 길’) 종배를 다시 끄집어내서 생각하다보니까 추운 것 같아요.

Q. ‘고지전’때 추위 때문에 굉장히 고생한 걸로 알아요.
고수:
어우. ‘고지전’ 촬영 때는 진짜 고생했어요. 체감온도가 영하 20도였거든요. 옷을 겹겹이 껴입어도 소름이 돋았죠. 산속에서 비 맞는 장면을 찍을 때는 빗방울이 손바닥에 내려앉자마자 알알이 다 어는 거예요. 배 신 찍을 때도 비 쫄딱 맞으면서 바닷바람과 싸우고. 와, 정말로 추웠어요.

Q. 그런 상황에서 촬영하면 무슨 생각이 들어요?
고수: 멍~해져요.(웃음) 제3자의 입장에서 내 몸을 바라보게 되죠.

Q. ‘황금의 제국’을 보고 나서 고수가 장태주 캐릭터를 쉽게 벗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집으로 가는 길’ 김종배를 보고 괜한 걱정이었다는 걸 알았죠.
고수:
촬영순서는 ‘황금의 제국’보다 ‘집으로 가는 길’이 먼저였어요. 요즘 느끼는 건데 종배를 연기해서 태주라는 캐릭터가 들어왔던 것 같아요. 종배는 자력으로 뭔가를 하는 친구가 아니잖아요. 항상 현실의 벽에 억눌려서 힘들어하죠.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며 답답했었는지, 끝나고 나서 욕망에 불타오르는 태주라는 캐릭터가 더 들어왔어요.

Q. 말씀대로 장태주와 김종배는 정반대에 있는 캐릭터예요. 한쪽은 너무 출세지향적이고, 다른 한쪽은 사람이 너무 좋아서 사기까지 당하죠. 극단적으로 나눌 수는 없겠지만 고수는 어느 쪽에 조금 더 가까운 것 같나요.
고수:
저요? 평소에는 그냥 ‘(손으로 수평선을 그으며)이거’예요. 평온하려고 노력해요.


Q. 고수는 착하고 조용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답변이 짧아서 인터뷰하기 힘든 배우라는 얘기도 있더군요.(웃음)
고수:
하하. 잘못된 고정관념이에요. 알고 보면 속은 불타고 있는데.

Q. 좋은 사람이라는 얘기를 계속 들으면 ‘착한남자 콤플렉스’ 같은 게 생기진 않나요? ‘난 착해야만 해’ 이런 거요.
고수:
그런 생각은 안 해요.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죠. 화날 때 화내고, 욕할 때 욕하고, 불평불만도 하고. 배우는 감정노동자잖아요. 감정기복이 심한 캐릭터들을 자주 만나다보니, 평소에는 잔잔하게 있으려고 노력하는 거죠. 그리고 제 입으로 “나는 착한사람”이라고 얘기한 적은 없어요. 그건 어떻게 보면 미디어에서 만들어낸 캐릭터나 성격이죠.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나는 나쁜 놈이야!” 몸부림치는 것도 웃긴 것 같고. 내가 그걸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 혹은 수긍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Q. 어때요? 인정하나요?
고수:
지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처음에는 했어요. 옛날에는 고민을 정말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잖아요. 말했듯이 일부러 못되게 굴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요. 제가 남들에게 피해주는 걸 싫어하는 스타일인데, 그런 면에서 그렇게 보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요.

Q. 영화 얘기를 해 볼까요? 전도연 씨와 즉석에서 붙는 씬보다, 전화나 편지로 감정을 나누는 씬이 더 많아요. 그 말은 각자 따로 촬영한 후 편집 때 이어 붙였다는 건데, 그런 점에서 배우들에게도 완성본을 보는 재미가 남다른 작품 같아요.
고수: 기술시사회 때 영화를 처음 봤어요. 처음이다 보니 객관적으로 보기가 힘들었어요. 어떤 장면이 빠지고, 어떻게 편집이 됐는지 하는 것들이 더 눈에 들어왔죠. 언론시사회 때 제대로 봤는데, 그때는 많이 먹먹했어요. 대본에서 느꼈던 안타까움이 다시 떠올랐죠. 정연(전도연)이 너무나 불쌍하고, 종배의 무능함이 안타깝고, 딸 혜린(강지우)은 너무나 가엾고. 이 가족이 어떻게 될까 궁금해 하면서 시나리오를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Q. 전도연이라는 배우에 대해 느끼는 게 있었을 텐데, 직접 만나보니 어떻던가요.
고수:
정연이라는 인물은 감정을 끊임없이 쏟아야 하는 캐릭터이기에 연기하는 게 쉽지 않아요. 그런데 집중력과 끈기가 대단하더라고요. 계속 붙잡고 있다 보면 지칠 법도 한데 끈질기게 연기하는 모습에 ‘대단하구나’ 생각했어요.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붙는 씬이 더 많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 부분이 아쉬워요.

Q. ‘황금의 제국’에서는 손현주. ‘집으로 가는 길’에서는 전도연. 대한민국에서 연기 잘하기로 소문난 배우들과 연이어 호흡을 맞췄네요. 그런 배우들과 만나면 연기하는 게 더 신나지 않을까 싶어요.
고수: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건 어떤 배우를 만나든 마찬가지에요. 사람마다 각자의 작은 세계가 있잖아요?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나와 다른 세계를 지닌 사람들을 만난다는 건 항상 설레고 기쁜 일이죠.


Q. 고수라는 작은 세계도 있을텐데, 고수의 세계를 타인에게 많이 보여주는 편인가요?
고수:
그건 보려는 사람에게는 보이고,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안 보이겠죠. 일부러 보여주려고 노력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배우들은 워낙 각자만의 세계가 강하잖아요. 그 세계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Q. 그건 반대로 내 세계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의미겠네요.
고수:
그렇죠.

Q. ‘집으로 가는 길’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요. 실존인물이 있다는 것이, 연기하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어요.
고수:
아마 많은 분들이 실존인물에 대해 생각하실 거예요. 그런데 저는 영화로만 접근했기 때문에 캐릭터 적으로는 별개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종배를 조금 더 무능한 인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영화적으로 극화해서 못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우리네 아버지, 귀가 얇아서 여기에 혹하고 저기에 혹하는 그런 아버지를요. 그런 면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이 시대의 가장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고요. 사건의 중심에 정연이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족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아파하는 가장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Q. 고수는 어때요? 고수도 귀가 얇아요?(웃음)
고수
: 저는… 중간? 하하.

Q. 작품을 선택할 때도?
고수:
작품을 할 때는 귀를 열어두려고 하는 스타일이에요. 외골수는 아니에요. 예전에는 외골수였던 것 같아요. 남의 말을 잘 안 듣고, 제 주장도 강했죠. 그런데 점점 바뀌어 가고 있어요. 요즘엔 그런 책도 많이 나오잖아요. 잘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책들이요.

Q. 데뷔 초 인터뷰들에서 ‘현실과 캐릭터 사이에서 혼란을 심하게 겪는 스타일’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어느 시점을 넘어서부터는 ‘현실과 캐릭터는 완벽하게 분리해둔다’고 했더라고요. 경험에서 얻은 노하우인가요?
고수: 옛날에는 몰랐어요. 촬영장으로 출퇴근하고, 맡은 캐릭터 입장에서 계속 생각하다보니 현실과 영화를 혼동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경험이 쌓이고 나이도 들면서 자연스럽게 분리하는 방법을 터득했고요. 일상생활에 영향을 줘서 실수하면 안 되니까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한 거죠.

Q. 작품에 너무 깊게 몰입하면, 일상에서 실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군요.
고수:
그럼요. 그건 어쩔 수 없어요. 배우도 사람인데, 그때그때 완벽하게 딱딱 변신할 수는 없다고 봐요. 잔여감정이라는 것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분리해 두려고 노력하는 거고요.


Q. 요새 고수를 가장 뜨겁게 하는 건 뭔가요?
고수:
다음 작품?(웃음)

Q. 너무 안전한 대답 같은데요.(웃음) 차기작 윤곽은 나왔나요?
고수:
아직 확정은 안 됐는데, 보고 있는 시나리오가 있기는 해요.(인터뷰 며칠 후, 고수가 강제규 감독의 단편영화 ‘민우씨 오는 날’에 캐스팅 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Q. 음악도 좋아하고, 책도 즐겨 읽는 걸로 알아요. 이전 텐아시아 ‘테마영화추천’ 코너에 소개한 영화들을 보니 감성적인 영화(‘러브레터’ ‘냉정과 열정사이’ ‘샤인’ 등)들이 많더군요. ‘고수의 취향’ 인가요?
고수:
취향이라. 음… 저는 뭔가에 대해 ‘이것은 이거다!’ 라고 얘기하길 두려워하는 게 있어요. 모든 건 다 움직이고 변하니까요.

Q. 움직이고 변하는 것들이 두려우세요?
고수:
뭔가에 갇히는 게 두려운 거죠. 고정되는 게. 같은 시나리오라도 2년 전에 보면서 느끼는 것과 지금 다시 보면서 느끼는 것은 달라요. 2년 전의 감정을 가지고 연기할 수는 없는 거죠. 결국 변화됐을 때의 내 마음을 얼마나 잘 파악하고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Q. ‘초능력자’에서 초능력이 통하지 않는 단 한 사람, 규남을 연기했어요. 응용해서 질문하자면, 세상 사람들에게는 통하는데 고수에게는 통하지 않는 게 있을까요?
고수:
하하. 내겐 통하지 않는다? 아니에요. 계속 파고파고 물고 늘어지면 통하긴 할 거예요. (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 안 통하는 게 있다면… 대답이 될지 모르겠는데요, 저는 연기자잖아요. 그래서 “연기가 뭐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연기에 있어서는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을 못할 것 같아요. 정말 모르겠거든요.

Q. 언젠가는 정답을 찾지 않을까요?
고수:
아니요. 평생 모를 것 같아요. 별로 찾고 싶지도 않고요.

Q. 아니, 왜요?
고수:
연기도 살아 움직이는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뭔가에 갇히는 걸 두려워하는 것과 일맥상통해요. 저는 연기가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 내가 했던 것들이 연기였는지도 모르겠고요. 연기라는 말 자체도 정확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냥 한다? 그냥 카메라 앞에서 뭔가를 하는 느낌에 더 가깝지 않나 싶어요.

Q. 고수에게 연기는 어려운 영역인가보네요.
고수:
네. 연기는 제게 너무 어려워서 미치겠는 거예요. 그래서 작품 들어가기 전엔 항상 두려워요. 잠도 못 잘 정도로요.

Q. 두렵고 어려운데 계속하는 이유는 뭔가요.
고수:
아마 너무 간절해서가 아닐까요? 간절해서 두려운 것일 테고요.

Q. 그렇다면 2008년에 연극 ‘돌아온 엄사장’에 출연한 건 어떤 의미일까요. 나름의 도전이었을텐데, 그땐 어떤 마음으로 연기에 다가갔던 건가요.
고수:
여러 가지 마음이 있었어요. 군대 다녀와서 처음 선택한 작품이었기에 각별하기도 했고요. 도전? 도전보다는 호기심에 더 가까웠던 것 같아요. 무대라는 장소가 굉장히 궁금했고, 무대 위의 사람들이 궁금했고, 그 안에서 내가 뭘 생각하고 느낄 수 있을지가 궁금했어요. 연기를 한다기보다는 초심자의 마음으로 임했던 것 같아요.

Q. 호기심은 풀렸나요?
고수:
그럼요. ‘이런 공간이 있구나’를 느꼈고, ‘내가 이렇게나 부족한 사람이구나’라는 것도 느꼈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것도 느꼈죠.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Q. 스스로에게 대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고수: 뭔가에 만족하는 성격은 아니에요.

Q. 연기를 하면서 만족하는 날이 올까요?
고수:
뭔가와 타협할 때는 오겠죠.

Q. 타협? 어떤 의미에서의 타협?
고수:
타협…타협… (자세를 고쳐 잡으며) 안주라고 해야 할까? 아이러니 한 얘기인데, 현실에 안주하는 순간, 연기도 대강 만족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안주하거나 타협하는 순간이 안 왔으면 좋겠어요. 오면 안 되는 거고요.

Q. 연기를 산에 오른다는 느낌으로 가고 있나요, 아니면 같이 걷는다는 느낌으로 가고 있나요?
고수:
(다시 자세를 고쳐 잡으며) 제가 이런 이야기를 거의 안 해요. 물어보시는 분도 없고요.

Q. 제가 너무 추상적이고 어려운 질문을 하고 있나요?
고수:
아니요, 아니요. 생각해 볼 기회가 돼서 좋아요. 곱씹으면서 대답하느라 더 신중하게 되고요. 질문이… 아, 산이요! 제게 산은, 오르면 끝나는 대상은 아닌 것 같아요. 산을 넘어가면 더 높은 산이 보이잖아요. 그 산을 넘어가면 또 다른 산이 나오고, 어느 순간엔 바다가 나오고. 그런 면에서 연기라는 것도 오르긴 하되 그게 끝은 아닌 거예요. 정상을 향해 가기는 하는데, 결국엔 같이 가는 거죠. 정복하는 게 아니라요.

Q. 스스로를 과소평가 하는 것 같다는 말, 취소할게요. 알고 보니 진정한 고수시네요!
고수:
제가요? 하하하.

글,편집.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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