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등에 업고 다니는 소녀(‘다세포 소녀’), 밤거리를 맨발로 질주하는 여인(‘박쥐’), 살인병기로 자라난 북한군 저격수(‘고지전’), 핑크색 머리를 하고 시체를 찾아다니는 여자(‘시체가 돌아왔다’), 그리고 미래로 가는 타임머신을 탄 물리학자(‘열한시’) 등 작품 안에서 김옥빈은 늘 새롭고, 도전적이었으며, 예측불허였다. 아직 서른도 안 된 여배우가 이토록 다양한 필모그래피를 지닐 수 있었던 이유?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왔기 때문이다. 결코 재거나 따지거나 상처받을까 두려워 돌아서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후회가 없는지도 모른다. 순간에 솔직했으므로.

Q. 눈이 오네요. 올해 첫눈 오는 날, 뭐 했어요?
김옥빈:
그냥 집에 있었어요. ‘눈이 오네?’ 하고는, 끝!

Q. 감흥이 없었네요. 첫 눈에 의미를 둘 나이는 지난 건가요?
김옥빈:
그런 건 아닌데, 첫 눈에 얽힌 추억이 없어요. 첫 눈이 내리면 첫사랑이 떠오른다거나, 남산 타워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다거나… 하하. 그런 영화 같은 추억이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없네요.

Q. 이런 눈 오는 날, 하루 종일 인터뷰 하고 있으려니 좀이 쑤시죠?
김옥빈:
말하면 입 아프죠. 놀러 가고 싶어요.

Q. 어디로요?
김옥빈:
맛 집도 가고 싶고, 기차여행도 하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Q. 한국에서는 마음 편히 돌아다니기 쉽지 않죠?
김옥빈:
아니요. 저는 잘 돌아다녀요. 겨울에는 특히 더요. 마스크 하나 쓰면 아무도 몰라보거든요. 물론 회사에서는 걱정을 하지만요. 그런데 우리 영화 ‘열한시’는 어떻게 봤어요?

Q. 음…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운 면이 있었어요. 본격 SF 영화이길 바랬는데, 스릴러물에 더 가깝더라고요. 마지막은 멜로물 같기도 하고. 물론 여러 장르가 섞여 있어서 더 좋아할 분들도 많을 테지만요.
김옥빈: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죠. 그런데 저는 100% 만족해요. ‘마지막까지 스릴러적으로 꽉 조여주고 끝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말도 있는데, 저는 마지막을 밝게 풀어줘서 더 좋았어요. 달달한 디저트를 먹은 느낌이었어요.

Q. SF는 한국에서 그리 친숙한 장르는 아니잖아요? 그동안 출연해 온 작품들을 보면 독특한 것들에 많이 끌려했던 것 같아요. 범죄코미디였던 전작 ‘시체가 돌아왔다’도 그렇고요.
김옥빈:
‘병맛’ 코미디요? 하하하. 그런가 봐요. 의도한 건 아니에요. 모아놓고 보니 그렇게 된 거죠. 내 필모에 채워진 작품들을 보면 제가 강렬한 것들에 끌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Q. 그런 것들이 모여서 김옥빈이라는 배우의 이미지를 만들었을 테고요.
김옥빈:
아무래도 그렇겠죠?

Q. 예전 인터뷰에서 “배우로서 나는 감독님한테 가서 감정적으로 자꾸 요구를 하는 사람”이라고 했더군요. ‘열한시’에서는 어떤 걸 요구했나요? 기자회견 때 감독님이 너무 설렁설렁하게 하는 것 같아서 걱정했다고 하던데.
김옥빈:
오케이 사인을 너무 쉽게 내리시는 거예요. “감독님 잠깐만요, 잠깐만요! 이게 아니잖아요. 정말 괜찮아서 오케이 하신 거예요?” 물어보면 감독님이 “네, 옥빈 씨 저는 너무 좋아요.” 그러시고. 저는 장면 하나를 찍더라도 대화를 많이 하고, 캐릭터에 대해서 정보를 계속 받기를 원해요. 그런데 김현석 감독님은 너무 ‘쿨’하시고, 장난도 잘 치시니까 불안해 지더라고요. 저녁에는 ‘오케이’ 사인이 더 빨라지고요.(웃음)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감독님이 현장에 관심이 없나?’ 하는 오해도 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감독님 스타일이더라고요. 배우를 많이 믿고 가시는 스타일이셨어요.

Q. 당신이 지금껏 작업해 온 감독님들과 스타일과 많이 달라서 더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어요.
김옥빈:
맞아요. 이전 스타일에 적응이 돼 있었나 봐요.

Q. 대화를 하면서 바꿔나가는 게 재미있어요?
김옥빈:
뭔가를 바꾸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내 것에 대한 느낌을 확실하게 다져가고 싶어서 대화를 많이 하려는 편이에요. 그런데 사실 ‘열한시’의 영은은 내면적으로 표출할 게 별로 없는 인물이긴 했어요.

Q. 과거 김옥빈이 맡았던 캐릭터들에 비하면 평범한 편이긴 하죠.
김옥빈:
네. 너무 차분하고, 너무 이성적이고. 실제의 저는 그런 성격이 아니거든요. 감정을 표출할 게 많지 않다보니, 연기하는 게 조금 쉬운 것도 있었고 그래서 더 불안하기도 했던 것 같아요.

Q. 미래로 갈 수 있는 타임머신과,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이 있다면 어떤 걸 고를래요?
김옥빈:
미래요! 과거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거잖아요. 미래로 가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고 싶어요.

Q. 과거를 바꾸고 싶어서 과거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은데, 그런 건 없어요?
김옥빈:
바꾸고 싶은 거요? 없어요.

Q. 후회되는 게 별로 없나 봐요.
김옥빈:
후회되는 게 있더라도 바꾸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지금의 내가 좋아요.


Q. ‘박쥐’에서 태주가 그런 대사를 하죠. “저 부끄럼 타는 여자 아니에요.” 김옥빈과 참 어울리는 대사라고 생각했어요.
김옥빈:
그런데 그게 반어잖아요? 그 말을 한 태주의 모습이 저에게도 분명히 있어요. 저도 부끄러움을 많이 타거든요. 그런데 그걸 티내지 않으려고 오히려 외향적으로 행동하는 면이 있어요. 그러니까 쑥스러워서 ‘부끄부끄’ 하는 게 아니라, “와~~~하하하” 하면서 일부러 표현을 더 강하게 하는 거예요. 부끄러움을 타지 않는 사람인 것 마냥! 사실은 부끄러우면서.

Q. ‘대중이 바라보는 나와 실제의 나’ 사이에 차이가 크다고 생각해요?
김옥빈:
글쎄요. 흔히들 김옥빈은 건강해 보이고, 세 보이고, 특이해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차가워 보인다고도 하고. 하하하.

Q. 그런 시선들에 동의해요?
김옥빈:
그런 모습이 제 안에 내재돼 있으니까 그렇게 보시는 거겠죠? 제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그런 모습으로 노출되고 있는 게 사실이니까요. 얼굴 생김새 때문에 받는 오해는 조금 억울하지만요.

Q. 개인적으로 그런 당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어요. 뭐랄까. 자기 주관이 확고해 보인달까?
김옥빈:
고집이 세 보인다는 거죠? 하하하.

Q. 에이, 고집 센 거랑은 다른 의미로 얘기한 거예요.
김옥빈:
이런 건 있어요. 공식석상에서 듣기 좋은 말 해주면 좋잖아요. 예쁜 말 하면 딱 깔끔하게 끝날 일을, 저는 제가 느끼는 대로 다 얘기하다가 상황을 더 불편하게 만드는 게 있어요.

Q. 후회되는 게 없다고 했는데, 그런 것들에 있어서도 후회를 안 해요?
김옥빈:
네. 후회는 안 해요. 고민은 했었죠. ‘여배우처럼 예쁘게 얘기하고 끝내면 될 것을 괜히 더 말했나?’ 하고. 그런데 그게 조절이 안 돼요. 하하하. 어쩌겠어요. 그냥 이렇게 살아야죠.

Q. 편해 보여요.
김옥빈:
지금은 편해요. 데뷔 초에는 많이 힘들었어요. 회사에서 저를 요소숙녀처럼 포장하고 싶어 했거든요. 마음은 연기자로 인정받고 싶은데, 정작 드라마가 끝나면 MC도 하고 쇼프로도 나가야 하고 그랬어요. “쇼프로에 나가서 웃어라”, “애교 좀 떨어라” 등등. 사실 그런 거, 그냥 하면 되잖아요. 어린 여배우가 웃고 애교도 부리면 분위기도 훈훈해지고 좋잖아요. 그런데 저는 성격상 그게 너무 안 맞는 거예요. 안 맞으니까 많이 괴로웠어요. 그래서 중간에 자신감도 많이 잃었던 것 같고요.


Q. MC를 보거나 쇼프로 나가는 것 자체를 즐기는 배우들도 많아요.
김옥빈:
맞아요. 즐기는 분들을 보면 부럽기도 해요. 그런데 저는 성격상 안 맞는 거죠. 아휴, 그런데 이런 얘기하면 욕먹어요. “그럴 거면 연예인 왜 하냐”는 얘기들을 게 분명해요. 그래서 이런 얘기 잘 안 하는데…(웃음)

Q. 자신감은 어떻게 다시 회복했어요?
김옥빈:
‘박쥐’요. 그때 만난 게 박찬욱 감독님의 ‘박쥐’였어요. ‘박쥐’를 하면서 ‘내가 이걸 해내면 앞으로 못할 영화가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박쥐’에는 배우가 표현해 내야 하는 감정들이 다 들어있었거든요.

Q. ‘박쥐’ 때의 자신감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김옥빈:
누군가 “10년 후에 어떻게 돼 있었으면 좋겠냐”고 물어보길래 “더도 덜도 말고 대표작 두 개만 더 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어요. 그래서 요즘 쉬고 않고 달리는 중이에요. ‘열한시’ 끝나자마자 바로 영화 ‘소수의견’을 찍었어요. 연이어 드라마 ‘칼과 꽃’에 들어갔다가 한 달 쉬고 나와서 지금 ‘열한시’ 홍보중인데, 일하는 게 너무 즐거워요. 드라마 밤샘 촬영도 전혀 힘들지 않고요. 처음 드라마 할 때는 힘들다고 허둥지둥했거든요. 화장실에 혼자 쳐 박혀서 막 울고 그랬어요. 하하하하.

Q. 뭐가 그렇게 서러워서 화장실에서 울었어요?
김옥빈:
일단 잠을 너무 안 재우는 거예요. 너무 춥기도 하고. 한마디로 그때는 프로의식이 없었던 거죠. 철이 없었던 거고요.

Q. 배우에게 대표작이 갖는 의미는 뭘까요?
김옥빈:
대표작이요? 음… 대표작 하나로 평생을 가는 사람도 있고, 아예 없이 가는 사람도 있네요. 그러고 보니 대표작 두 개를 더 가지고 싶다는 건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네요. 이렇게 얘기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에게 대표작이라는 건 자기만족인 동시에 내 일에 대한 성취감이 아닐까 싶어요.

Q. 지금까지의 대표작은 ‘박쥐’겠죠?
김옥빈:
네. 정신적으로 힘들 때 만난 작품이니까. 내 모든 걸 쏟았고요. 그런 작품을 또 할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어요.

Q. ‘박주’ 전후에 가장 달라진 게 뭐라고 생각해요?
김옥빈:
일단 어른스러워졌어요. 연기에 대한 자신감도 많이 찾았고요. 무엇보다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많이 정리가 됐죠. 차분하게. 타협점을 찾는 법도 그때 이후 알게 된 것 같아요. 어차피 배우를 할 거라면, 그래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부딪히는 게 맞다는 생각을 한 거죠. 그런데 아직도 영화제나 시상식에는 잘 안 가게 되는 것 같아요. 데뷔 초에는 뭣 모르고 갔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안 가게 돼요.

Q. 특별히 꺼리는 이유가 있어요?
김옥빈: 드레스 입는 게 너무 귀찮아요~(웃음)


Q. 드레스 입고 예뻐 보이고 싶어 하는 건 많은 여배우들의 욕망인 걸로 아는데요.
김옥빈:
그런데 제 눈에는 그게 예뻐 보이지가 않아요.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모습이 좋지, 한껏 꾸민 모습은 안 예뻐 보여요. 그리고 몇 번 해보니까 이건 지옥인 거예요. 아침 일찍 일어나야지, 화장하고 머리하는데 반나절 투자해야지, 드레스 신경 써야지, 줄 서서 입장 대기 해야지… 몇 번 하고나니까 물린 것 같아요. 그때 이후로는 안 가게 되더라고요.

Q. 후보에 노미네이트된다면요? 그래도 가기 싫어요?
김옥빈:
노미네이트되면 가겠죠. 무조건 참석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에요. 제가 타협점을 찾는 법을 배웠다고 했잖아요? 영화홍보 때문에 와 달라고 하면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촬영현장이 가장 좋기는 하지만 그 외에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참석할 생각이에요.

Q. 음악하면서 무대에 서는 건 어때요? 요즘에는 뜸하던데, 음악도 좋아서 하는 거잖아요?
김옥빈:
그건 재미있어 보여서. 하하하. 그때는 또 (음악 하는)남자친구가 있었잖아요. 헤어지고 나니까 흥미가 뚝 떨어졌어요. 괜히 무대를 보면 생각나니까, 일부러 더 안 보게 되는 것도 있고요. 헤어지긴 했지만 2년 반의 세월이 그냥 간 건 아니잖아요. 좋은 추억들이 많았기에 무대를 보면 떠오를 것 같아요. 그래서 요샌 다른 것들에 관심을 돌려야지, 그래요. 그리고 이젠 취향이 바뀌어서 시끄러운 건 별로 듣고 싶지 않아요. 요즘엔 조수미 데뷔 초 가곡집들을 자주 들어요. “새야, 새야~” 이런 거.(웃음)

Q. 누군가를 마음에 품으면, 그와 관련된 모든 걸 좋아하게 되는 스타일 같아요.
김옥빈:
아~ 맞아요. 저는 그렇게 돼요.

Q. 열정적이네요!(웃음)
김옥빈:
저는 이상형을 정해놓고 만나지는 않아요. 이 사람이 좋다고 느껴지잖아요? 그럼 그 사람이 어느 순간 이상형이 돼 있죠. 그래서 이상형에 통일성은 없지만요. 하하하.

Q. 사랑에서도 인생에서도 후회를 별로 안 하는 것 같네요.
김옥빈:
네. 흐지부지한 건 별로예요. 그러면 더 미련이 남는 것 같아요. 뭐든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도요.

글,편집.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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