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아는 선입견을 가볍게 부숴버리는 아티스트였다. 작곡가인줄 알았더니 보컬리스트였고, 싱어송라이터인 줄 알았더니 프로듀서였다. 콘서트를 보니 심지어 공연 연출, 퍼포먼스도 할 줄 알더라. 팔색조란 말은 선우정아를 위한 말이었다. 다 가지고 있었다. 이런 욕심쟁이 같으니라고.Q. 장기공연 ‘웬즈데이 프로젝트’ 공연을 준비 중이다. 매 공연마다 악기 편성이 바뀌던데 준비는 잘 되가나?
2NE1의 ‘아파’, GD&TOP의 ‘Oh Yeah’를 만든 작곡가임과 동시에 뉴올리언스 재즈 밴드 러쉬 라이프의 보컬을 맡은 극과극의 이력. 뮤지션, 평단의 극찬을 끌어낸 선우정아의 정규 2집 ‘이츠 오케이 디어(It’s Okay, Dear)’는 이런 이력에 대한 선입견도 가볍게 부숴버린다. 이 앨범은 온통 ‘선우정아 투성’이다. 가사를 보면 어린 소녀가 나를 봐 달라고 조르는 듯한데, 그 음악적 완성도는 대단한, 야누스와 같은 앨범이기도 하다. 선우정아에게는 최근 유행어처럼 남용되는 ‘여성 싱어송라이터’라는 표현도 모자라다. ‘종합 뮤지션’이라고 하면 알맞을까?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부터 가수 이선희, 유희열, 김동률 등이 선우정아의 실력을 인정했다. 이처럼 다재다능한 ‘종합 뮤지션’이라고 해도 한국 땅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을 보여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고결한 재능이 순식간에 사라지는가? 또 웃음거리가 되는가? 선우정아는 당차고 명민하다. “난해하다. 자극 없다. 안 섹시하다”고 말하는 대중에게 “억울하다. 편견이다. 이해는 한다”고 대답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좋은 음악을 만들어 그들을 설득할 줄 알기 때문이다. KT&G상상마당이 주최하는 장기공연 ‘웬즈데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12월 4일까지 매주 수요일에 ‘앙상블, 선우정아’를 여는 선우정아를 만났다. 두 대의 베이스와 노래, 아코디언, 오르간과 노래, 색소폰, 트롬본과 노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와 노래 등의 편성으로 공연한다니 그녀답다.
선우정아: ‘멘붕’의 연속이다.(웃음) 공식적인 공연에서 이렇게 실험적인 편성을 작정하고 해보는 것은 처음이다. 일종의 도전과 같은 공연이라 나도 결과를 예상할 수 없는 편성도 있다. 장기 공연인데 다 똑같은 포맷으로 하면 재미없잖아. 임팩트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 공연마다 악기를 바꾸겠다고 했는데, 이게 내 무덤을 파는 일이 될 줄이야.
Q. 화성악기 없이 관악기와 노래를 하면 재밌겠다.
선우정아: 그날 공연이 가장 걱정이다. 완전히 아방가르드의 끝을 달리지 않을까? 그래도 재밌다.
Q. 앨범으로 접하다가 공연을 보고 조금 놀랐다. 거울을 보면서 노래하고, 또 가면을 쓰고 노래하기도 하더라. 원래 그런 연출을 자주 하나?
선우정아: 그런 연출을 즐겨 한다. 퍼포먼스를 통해 어떤 주제를 주입시키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일단 강하고 뚜렷하게 보여주면 나름대로 해석을 할 수 있는 거니까. 관객 각자의 해석이 다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노래마다 퍼포먼스가 있다. 가령 무대에서 노래를 하면서 셀프 동영상을 찍을 때도 있다. 날 모르는 관객을 앞에 두고 첫 곡부터 카메라로 날 찍는 거다. 인사도 안 하고 말이다. 그게 통하면 노래 끝까지 날 찍고, 안 통하면 당황해서 설명을 하게 된다. 그 외에 도끼를 휘두르고 싶은 노래도 있었는데, 도끼를 구할 수 없어서 장난감 총으로 대신한 적도 있다. 그렇게 강렬하게 표현을 하고 보는 이들이 알아서 상상을 펼치게 내버려둔다.
Q. 거울을 보고 노래하면 기분이 어떤가?
선우정아: 음악에 집중하니 별 생각 없다. 거울을 보게 된 계기가 ‘아임 낫 소 쿨(I’m Not So Cool)’이란 노래를 만들면서다. 마음에 드는 멜로디가 나왔는데 2절 가사가 안 써지는 거다. 그때 거울을 보면서 가사를 읊어봤다. 순간 거울의 나와 현실의 내가 분리되는 느낌이 들면서 가사가 써지더라. 그래서 공연 때도 거울을 본다.
Q. 첫 무대가 기억이 나나?
선우정아: 10대 때부터 록밴드를 했다. 고등학교 축제 때 공연을 하기도 했다. 원래 고등학교 댄스부에서 춤을 췄다. 음악에 대한 생각이 확실해지면서 맞을 각오를 하고 댄스부를 탈퇴 한 후 밴드부를 직접 만들었다. 여학교였는데 친구들을 꼬셔서 직접 악기를 가르쳐서 용케 밴드를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뭘 안다고 친구들에게 악기를 가르쳤는지 모르겠다.(웃음) 그때 컴퓨터 미디로 만든 곡을 밴드로 해보려 했었다.
Q. 아니, 고등학교 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곡을 만들다니?
선우정아: 중3 때부터 미디를 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케이크워크(컴퓨터 음악 프로그램)를 사다주셨다. 음악을 잘 모르시는 분이었는데 “요새는 컴퓨터로 음악을 만든다며?”라시며 케이크워크를 건네시더라.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는데 딸이 음악에 재능을 보이니까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으셨나보다. 주위에 물어볼 때가 없어서 PC통신으로 배우면서 곡을 찍었는데 완전히 신기했다.
Q. 당시 미디로 어떤 스타일의 음악을 만들었나?
선우정아: 그때는 자우림과 H.O.T.를 함께 좋아했다. H.O.T. 노래와 같이 여러 장르가 섞인 음악을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편곡을 하려니 음표 하나 제대로 얹을 수 없더라. 그때는 주로 모던록을 만들었다.
Q. 재즈 보컬도 하고, 아이돌그룹 노래도 만들었다. 음악적인 오지랖이 매우 넓은 것 같다.
선우정아: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트렌디한 음악부터 전위적인 음악까지 다 좋아했다. 그 두 가지를 다 잘 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는데 막상 본격적으로 음악을 해보니, 하나만 잘 하기도 너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웃음) 다만 확실했던 것은 어떤 스타일을 하더라도 좋은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는 것이다. ‘시장바닥에서 노래를 해도 난 뮤지컬을 만들 수 있어야해’ 라는 식으로 생각했다. 열정적으로 부딪히다보니 다양한 이력을 갖게 된 것 같다.
Q. 재즈 밴드 ‘러쉬 라이프’는 어떻게 하게 됐나?
선우정아: 대학교를 다닐 때 재즈가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말로 선생님께 찾아갔다. 노래를 처음 사사한 것이다. 그 전까지는 록 보컬 스타일로 노래했는데 목이 쉬곤 했다. 그게 장애로 느껴져 너무 싫었다. 그런데 재즈를 배워보니 스윙 리듬을 타는 창법이 내 성대와 맞더라. 결과적으로 전보다 더 편하게 노래할 수 있게 됐다. 선배들 따라서 우연히 재즈클럽 블루문에 서게 됐다. 처음에는 스캣을 하려니 어색하고 두렵기도 했는데 의외로 좋아해 주시더라. 러쉬 라이프를 3년 정도 하면서 정말 많이 배웠다. 재즈 보컬 뿐 아니라 악기 간의 사운드 밸런스에 대해서 잘 알게 된 기회였다. 재즈클럽이 내겐 음악 대학원 같은 곳이었다.
Q. 재즈 밴드와의 작업과 YG엔터테인먼트 작업은 상당히 다를 텐데?
선우정아: YG와의 작업도 생각보다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다. YG 소속 아티스트들이 순발력들이 좋아서 지나가는 음악들을 본능적으로 캐치한다. 양 사장님 자체가 즉흥적이시다. 날 섭외한 것도 이것저것 계산하고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손담비 언니의 ‘토요일 밤에’를 재즈로 편곡해서 노래하는 것을 보고 결정했다고 한다. 쿠시 오빠를 통해 처음에 부름을 받았을 때는 당황했다. 내가 전혀 생각했던 곳이 아니니까. 투애니원의 ‘아이 돈 캐어’를 레게로 편곡했는데, 그 트랙을 정말 쓴다고 해서 또 당황했다. YG 소속 뮤지션, 작곡가들과 함께 의견을 주고받은 일은 밴드 작업과 비슷했다. 지드래곤 같은 경우는 아이디어도 기발하고 음악적인 지식도 풍부하다. 음악적인 주문을 하면 매우 빠른 속도로 정리가 돼 나와서 놀랐다.
Q. 본인의 앨범 ‘이츠 오케이 디어’의 제목은 뭘 의미하나?
선우정아: 앨범재킷 안에 보면 내 세미누드가 있는데 바로 그거다.
Q. ‘그거’라니?
선우정아: 기쁨도, 찌질함도, 치부도 전부 까발릴 수 있다는 뜻이다. 괜찮아! 다 보여줄 수 있어.
Q. 당신의 말처럼 노래 가사들이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모놀로그를 보는 것 같다.
선우정아: 내가 나 자신을 참 사랑한다. 열등감과 자기애는 같은 것이라고들 하던데 난 둘 다 강하다. 주변에 온통 나 투성이다. ‘선우정아 X 선우정아’라는 제목으로 공연도 했다. 나와 내가 콜라보레이션을 한다는 뜻의 제목이다. 큰 거울을 내 양쪽에 매달아놓고 노래했는데 무대 위에 온통 선우정아 뿐인 거야. 미치겠더라. 거울에 비친 선우정아들한테 ‘제발 그만해!’라고 외쳤다. 내가 어지간히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러기 힘들겠다는 생각도 들더라.
Q. 최근 여성 싱어송라이터란 단어가 유행어처럼 쓰이는데, 선우정아는 프로듀싱까지 전부 소화한다. 앨범 만들 때 연주자들에게 구체적인 주문을 했나?
선우정아: 완전 ‘잔소리쟁이’다. 곡의 의도를 설득하려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보니 나를 꽉꽉 우겨넣은 앨범이 됐다. 이번 작업을 하면서 배운 것은 아무리 내 의도가 확실해도 조금은 열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완벽을 기하다보니 노래가 가진 본래의 에너지가 덜 전달된 느낌도 들더라. 공연을 하면 배 위에서 회를 쳐 먹는 느낌이 드는데 앨범은 생선조림 느낌이랄까? 뭘 둘 다 매력이 있긴 한데. 완벽은 있을 수 없는 것인데 뭘 그리 완벽하려 했는지 모르겠다. 영도 쌤(베이시스트 서영도)이 “밑반찬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는 조언을 해주셨다. 너무 작은 것에 매달려서 큰 그림을 못 보는 것이 안타까우셨나 보다. 그래도 거쳐야 할 과정이니까.
Q. 밴드가 아닌 프로듀서나 싱어송라이터 앨범의 경우 유명한 세션 연주자를 쓰면 사운드가 뻔하게 나오는 경우가 있고, ‘로 파이’로 가면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츠 오케이 디어’는 그 두 경우를 절묘하게 피해 간 것 같다.
선우정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일단 내 앨범은 내가 즐겨 들을 수 있어야 하니까.
Q. ‘퍼플 대디(Purple Daddy)’는 아버지에 대한 노래인가?
선우정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관을 덮기 전에 마지막으로 시신을 봤다. 고3때라 철이 들 나이였지만 시신을 보는 게 무서웠다. 아버지의 좋은 모습만 기억하고 싶으니까. 아버지 시신을 봤는데 마치 살아있을 때 모습처럼 깨끗해서 더 충격적이었다. 장례식을 마친 후 한 달 쯤 지나서 꿈을 아버지가 베란다에서 날 바라보고 계셨다. 그 꿈을 떠올리면서 ‘보라색 아빠가 내 앞에 서있네’라는 가사를 썼다. 어쩌면 되게 이기적인 노래다. 살풀이하듯이 시원하게 불러재꼈다.
Q. ‘알 수 없는 작곡가’에서는 ‘넌 말해 난해하다 자극 없다 안 섹시하다, 난 말해 억울하다 편견이다 이해는 한다’는 가사가 인상적이다. 음악가와 대중의 괴리감을 표현한 것?
선우정아: 너의 취향을 알긴 알지만, 내 음악을 포기는 못 하겠다. 하지만 너를 배척하진 않겠다. 난 이게 좋은데 넌 이해가 안 되는구나. 난 너의 ‘이해 안 됨’을 이해한다. 그런 의미다.
Q. ‘워커홀릭(Workaholic)’은 뮤지컬 풍의 곡이다. 선우정아가 한 다름 작업을 보면 뮤지컬 풍의 악곡을 좋아하는 것 같더라.
선우정아: 한때 뮤지컬 음악에 푹 빠져 살았다. 지금은 예전처럼 좋아하진 않지만, 내가 잘 할 수 있는 음악이긴 하다. 내가 뮤지컬 넘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렸을 때 세종문화회관에서 뮤지컬 ‘피터팬’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서 평생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그 작품이 너무 좋아서 OST를 끼고 살았다. 무대 안에 있는 저들처럼 음악 안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거다. 당시 이선희 선배님이 피터팬 역을 맡았다. 그때부터 나의 피터팬은 이선희 선배님이었다.
Q. 본인이 좋아하는 음반을 뽑는다면?
선우정아: 노라 존스 최근작들. 파이스트 앨범들이 좋더라. 가장 좋아한 뮤지션은 뷰욕(Bjork)이다. 음악도, 행보도 뷰욕만큼 버라이어티할 수 있을까? 음반보다는 뮤지션들의 행보에서 힘을 얻는 편이다.
Q. 처음엔 ‘퍼플 대디’가 끌렸는데 지금은 ‘비 온다’가 제일 좋더라. 여운이 남고 계속 듣게 되는 곡이다.
선우정아: 내 음악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명곡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바라본 세상을 자연스럽게 잘 담아낸 곡이라고 생각한다. 스무 살 때 만든 곡이다. 비 오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어렸을 때 놀이터 흙탕물에서 물장구치고 놀던 기억이 났고 멜로디가 떠올랐다. 비가 오면 ‘비 온다’라고 외치잖아. 거기서 시작한 거다. 그때 8마디 정도를 만들었는데 더 이상 진행이 안 되는 거다. 그렇게 묵혔다가 최근에 완성을 했다. 내가 조금 더 살면서 느낀 것들이 버스(verse)와 마무리를 만들어줬다. 어렸을 때의 순수함, 현재의 불안함이 다 들어가 있는 것 같다.
Q. 유튜브에 공연 영상이 매우 많다. 여성 2인조로 공연하는 것도 봤다.
선우정아: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인 안신애와 함께 한 공연 영상이다. 현재 바버렛츠 리더로 있는 친구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안다. 영향도 많이 주고받았다. 서로를 인정하고 존경한다고 할까?(웃음) 나대는 보컬 둘이 만난 것이다.(웃음) 둘이 노래 스타일도 비슷한데 묘하게 협연이 된다. 서로 치고 빠질 때를 잘 안다. 너무 잘 맞고 편해서 연습을 많이 할 필요도 없고, 그냥 노래를 하면 알아서 연주가 된다. 각자 음악 하다가 같이 하고 싶을 때 자연스레 만나서 공연한다. 언제 한 번 보러 오세요.
Q. 벌써 11월이다. 올해는 선우정아에게 특별한 해가 아니었나? 돌아보면 어떤가?
선우정아: 참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그것들을 곱씹어서 내 것으로 만드는 시간은 부족했던 것 같아 아쉽다. 그런 감흥은 나중에 느낄 수 있겠지. 아직은 계속 달리고 있는 기분이다.
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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