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에 열렸던 주요 영화제에서 건축과 관련된 작품을 볼 기회가 많았다. 그 중에서 유독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톰 앤더슨의 에세이 영화였다. 바로 ‘로스앤젤레스 자화상’(2003)과 ‘리컨버전’(2012)이었다. 전자는 할리우드가 LA를 어떻게 묘사(LA의 건축물과 영화 속 이미지)하는지 보여준다. 후자는 포르투갈 건축가 에두아르도 소투 드 모라의 17개의 건축물과 프로젝트를 차례로 훑으면서, 시간의 흐름까지 계산한 폐허의 미학을 소개한다. 이 영화들을 보고 있으려니 ‘말하는 건축가’(2011)에 등장했던 건축가 정기용이 문득 떠올랐다. ‘나의 집은 백만 평’이라는 글(‘건축가는 어떤 집에서 살까’)에서 그는 “내가 산책하는 곳, 내가 집에 들어올 때 걸어가는 골목, 이 모든 것이 나의 집이다. 집을 이렇게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누구나 ‘자유로운 마음의 집’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영화 ‘어버나이즈드’ 스틸
혹시라도 톰 앤더슨의 영화를 놓쳤다고 아쉬울 필요는 없다. 여전히 건축에 관한 영화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10월의 마지막 날, 제5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SIAFF)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개막을 알린다. 개막작은 게리 허스트윗의 ‘어버나이즈드’다. ‘디자인 다큐멘터리’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으로, 도시화와 도시 디자인에 대해 다룬다. 새로운 도전에 나선 세계 곳곳의 혁신 도시들을 방문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건축가, 도시 설계자, 철학자, 사상가의 목소리를 담았다.영화 ‘노먼 포스터-건축의 무게’(왼쪽), ‘임스: 아키텍트 & 페인터’ 스틸
6일간 21편의 영화가 상영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영화를 2편만 콕 찍어드리자면 ‘노먼 포스터-건축의 무게’와 ‘임스: 아키텍트 & 페인터’다. 전자는 1960년대 초 리처드 로저스와 Team4를 결성한 후, 하이테크 건축으로 건축계의 지형도를 바꾸어 놓은 노먼 포스터의 세계를 담았다.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베이징 공항, 독일 연방의회 의사당, 뉴욕의 허스트 타워,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미요 대교 같은 프로젝트를 돌아보며, 그의 독창성과 건축의 비전을 조명한다. 후자는 미국을 대표는 건축자이자 디자이너인 찰스 임스와 레이 임스 부부의 이야기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찰스가 사망한 1987년까지의 ‘임스 시대’를 정리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들의 실제 모습까지 담았다. 그 외에도 르 코르뷔지에, 알바 알토, 안도 타다오 같은 대가들도 만날 수 있으니, 영화제 홈페이지를 꼭 체크하자.‘작은 집을 권하다’(왼쪽), ‘나만의 독립국가 만들기’ 표지
올해 건축영화제가 ‘집’을 주제로 하고 있으니, 이번엔 집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책을 추천한다. 큰 집을 욕망하는 건 소유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고 역설하는 책들이다. 다카무라 토모야의 ‘작은 집을 권하다’와 사카구치 교헤의 ‘나만의 독립국가 만들기’이다. 책의 저자들은 자신만의 집(세계)을 가진 사람들이다. 하지만 토모야가 말하는 작은 집은 땅콩집보다 훨씬 작은 사이즈다. 놀랍게도 그의 집은 2.0m x 4.6m 정도의 공간만 차지한다. 즉 세 평이 안 되는 집으로, 그저 주차 공간 정도의 크기다. 이런 곳에서 산다는 것이 처음엔 놀랍지만, 스몰하우스의 지혜를 엿보고 나면 의외의 해방감이 밀려온다. 내 집 마련을 위해 빚을 지는 시대를 끝내자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인생을 통째로 다이어트한다’는 계획을 갖고 스몰하우스로 이주한 제이 셰퍼의 사례도 보여준다. 와세다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한 사카구치 교헤는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은 하지 않고, 서로의 재능을 교역하며 살아가는 0엔 특구를 구상 중인 인물이다. 재활용과 주변 시설물을 이용해 살아가는 한 노숙자를 만난 후,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집 ’0엔 하우스’를 통해 본격적 활동을 시작했다. ‘나만의 독립국가 만들기’에는 움직이는 집에 대한 철학과 신정부 선언이 담겨 있다. 이번 건축영화제에는 쿄헤가 노숙자와 함께 모바일 하우스를 만드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모바일 하우스 제작기’가 상영된다.연극 ‘퍼즐’
스몰하우스처럼 새로운 삶의 형태를 추구하진 않지만, 두뇌 게임을 자극하는 연극이 있다. 관객의 영혼을 혼란에 빠트리는 연극 ‘퍼즐’이다. 영화 ‘아이덴티티’, ‘쉘터’의 작가 마이클 쿠니의 작품으로, ‘퍼즐’의 원제는 ‘포인트 오브 데스’이다. 라이언 필립 주연의 영화 ‘아이 인사이드’(2003)로 제작되기도 했다. 이야기는 주인공 사이먼이 기억을 잃은 채, 2002년 세인트 쥬드 병원에서 눈을 뜨는 것으로 시작된다. 2000년의 교통사고만 기억하는 사이먼에게 미지의 아내 안나와 형의 여자였던 클레어가 등장해 더욱 혼란을 가중시킨다. 심지어 형은 2년 전에 죽었고, 그것도 자신과 연관돼 있다는 말을 듣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고 일어나면,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2000년과 2002년 사이를 오가는 신세가 된다. 영화가 아니라 연극으로 처음 접하는 관객은 엔딩의 반전을 봐도 이야기의 퍼즐을 완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혼재된 기억의 조각을 맞춰가는 과정은 섬세하고 치밀하다.영화 ‘아이 인사이드’
만약 이야기의 구조를 정확하게 알고 싶다면 영화 ‘아이 인사이드’를 보는 것이 좋다. 복잡하고 난해한 플롯이 명쾌하게 정리된다. 이 연극의 원제가 사실상 유일하고 완벽한 힌트다. 의사가 사이먼에게 던진 첫 대사에 답이 있다. 영화 속의 사이먼이 ‘나비효과’처럼 죄의식에 시달리는 것과 달리, 연극 속의 사이먼은 흉폭한 실체를 지니고 있다. 대학로 해피씨어터에서 11월 17일까지 퍼즐 맞추기는 계속 된다.글. 전종혁 대중문화 평론가 hubul2@naver.com
편집. 이은아 domino@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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