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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의 기다림. 어느 영화의 예고편에나 나올법한 이 문구의 주인공은 의외로 우리의 가까이에 있었다. 배우이자 방송인, 그리고 사업가로 성공적인 행보를 걷고 있는 홍석천의 모습은 상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를 잘 몰랐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한 마디, 한 마디 솔직하게 뱉어내는 단어의 이면에는 삶에 대한 열정과 진중함이 묻어났고, 그 바탕에는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국내 방송인 최초로 커밍아웃을 하고 몇 년간 대중이 등을 돌렸음에도 그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다.

시대가 변했고 그보다 한 발짝 늦기는 했지만, 성과 성적 소수자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고 있다. 일찍이 자신을 동성애자로 포지셔닝한 것은 혜안이었을까. 19금 개그코드와 섹드립의 물결이 방송가를 휩쓰는 사이, 홍석천은 자연스레 방송계 블루칩으로 급부상했다. 13년의 기다림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케이블채널 tvN ‘SNL 코리아’, ‘코미디 빅리그’를 통해 성에 대한 담론을 수면 위로 올려놓은 홍석천은 최근 종합편성채널 JTBC ‘마녀사냥’에 출연하며 자신만의 입지를 탄탄히 다져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마저도 성에 차지 않는 듯 올 하반기에는 뮤지컬 극작가이자 연출자로 새로운 변신도 꾀하고 있다.

“홍석천만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고민해왔다.” 대중과의 소통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아직도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남았다는 그를 만나봤다.

Q. ‘마녀사냥’에서의 모습을 보니 ‘썰전’에 출연할 때보다 더 신이 나 보인다.
홍석천: ‘썰전’은 아무래도 지인들을 놓고 조금 센 평을 해야 하기에 부담도 있었다. 반면에 ‘마녀사냥’은 일반인들의 케이스를 놓고 이야기를 하기에 마음이 한결 가볍다.

Q. ‘마녀사냥’에는 연애상담소와 같은 느낌도 있는데, 그런 프로그램의 콘셉트가 당신과 굉장히 잘 맞는 것 같다.
홍석천: 대한민국 연예인 중에 나처럼 이런 상담에 적합한 인물은 또 없을 거다(웃음). 보통의 남자보다는 여성에 대한 이해도가 높기 때문이다. 상담이라는 포맷의 장점은 프로그램의 시청자들이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도 있고, 대리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거다. 평소에도 상담을 많이 해주는 편이라 나에게 잘 맞는 것도 있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기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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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당신만의 상담 노하우가 있다면.
홍석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그들의 처지를 대변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잘 들어주는 거다. 어떤 답을 주지 않아도, 잘 들어주면 알아서 답을 찾아간다. 상담을 원해서 오는 사람들은 그런 게 필요해서 오는 거지, 딴 게 아니다.

Q. 방송을 보다 보면 정말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큰 것 같다.
홍석천: 물론이다. 남자와 여자는 생물학적으로도 차이가 있지만, 사고, 행동 등 모든 게 다르다. 특히 성은 그 차이가 더 크다. 남자와 여자의 오르가슴이 다르지 않나. 요즘 젊은 세대가 성에 대한 기초지식조차 없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정식으로 그런 지식을 가르쳐주는 채널이 없어서 남자들이 야한 동영상 같은 음성적인 채널을 통해서 잘못된 정보를 얻는 거다. 획일화된 남성들만의 문화를 깨는 것을 시발점은 다름에 대한 이해다. 여자는 각 개체가 모두 다른 존재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

Q. ‘마녀사냥’에서는 당신은 상당히 독특한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 ‘세이프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계도적인 느낌까지 묻어난다(웃음).
홍석천: 지금도 접점을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다. ‘세이프 섹스(Safe sex)’와 ‘새드 섹스(Sad sex)’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는 편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모종의 사명감도 느끼고 있다(웃음). 사랑, 연애, 섹스 등 모든 것이 인간이 발전해 나가고 성숙해지는 과정이다.

Q. 성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던지는 스타일이다 보니, 당신이 출연하면 자연스레 프로그램의 수위가 올라간다.
홍석천: 부정할 수 없다(웃음). ‘마냥사냥’에서 유독 더 편하게 말을 하는 편이다. 게다가 신동엽과 함께 하지 않나. tvN ‘SNL 코리아’에 함께 출연할 때부터 둘의 시너지 효과는 증명됐다. 아마 ‘SNL 코리아’은 우리에게 고마워해야할 걸?(웃음) 확실히 나와 동엽이가 출연한 후부터 프로그램의 수위가 높아지고 다룰 수 있는 소재의 범위도 넓어졌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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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데뷔 첫 방송 MBC ‘남자 셋 여자 셋’으로 만난 신동엽과의 인연이 깊다. 특히 ‘마녀사냥’도 그렇고 ‘SNL 코리아’와 같은 프로그램에서 합이 잘 맞는 거 같다.
홍석천: 동엽이가 없었다면 내가 이렇게 마음 편하게 방송을 할 수 없었을 거다. 신동엽의 진행자 재능 중 가장 뛰어난 부분이 상대방에 대한 이해다. 거기서 신동엽의 힘이 나온다. 무심히 툭툭 던지는 농담에서도 나의 아픔까지 이해하고 있는 친구라는 느낌을 받는다. 동시대에 살며 같은 프로그램을 할 수 있다는 게 무척 기쁘다.

Q. MC들이나 패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방청객이나 일반인 출연자들도 솔직하게 자신의 연애, 성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더라. ‘마녀사냥’을 보면서 새삼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홍석천: 그런 이야기를 공론화시킬 수 있는 환경이 됐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젊은이들이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 아쉬운 점이 많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사랑도, 만남도, 헤어지는 것도 너무 급하다. 이성을 만날 수 있는 채널이 다양해 지다 보니 가볍게 만나는데 익숙해진 거다.

Q. 얼마 전 김조광수 감독 결혼식이 있었다. 성과 다양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도 급물살을 타고 있는 듯하다.
홍석천: 김조광수 감독의 결혼은 십 년 뒤에 평가한다면 지금과는 달리 평가될 거다. 13년 전에 내가 커밍아웃을 하며 총대를 멨던 것과 마찬가지인 거다. 어떤 인식이 변화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자리를 잡으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외국은 몇십 년 전부터 이러한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투쟁해왔기에 지금처럼 다양한 개체를 인정해주는 사회로 변한 거다. 우리나라는 90년대부터 시작됐다. 70~80년대만 해도 모든 행동에 제약이 컸다. 이성애자들의 시각에서는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자연스레 이뤄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양성을 인정받으려는 성 소수자들의 노력은 계속돼 왔다. 이제야 그 노력의 일부가 성과로 나타나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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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어느덧 마흔을 훌쩍 넘겼다. 결혼 생각은 없는가.
홍석천: 나이를 먹어가며 결혼 생각도 하고 있다. 젊음이 영원하지는 않더라(웃음). 육체적인 사랑보다는 정신적인 사랑이 필요한 나이가 됐다는 게 피부에 와 닿는다. 정말 좋은 친구가 생긴다면 인생 함께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Q. 이러한 인식의 변화에도 아직 방송가의 반응은 보수적이다. 얼마 전 tvN ‘코미디 빅 리그’의 ‘레드 버터’ 코너에 출연해서도 역풍을 맞지 않았나.
홍석천: ‘레드버터’의 아이디어를 놓고 가장 고민했던 게 ‘이게 방송을 통해 나갈 수 있는 코드냐’ 하는 것이었다. 방송에 나간 내용은 수위조절에 대한 이야기를 수없이 나눈 끝에 얻은 결과물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가 갑자기 어디서 툭 튀어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예전부터 존재해왔고, 누구나 하고 싶었던 이야기 중 하나다.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방송을 보며 채널을 돌리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어라! 이런 소재도 이제 이야기할 수가 있네?’ 하는 사람도 있었을 거다. 같이 코너를 했던 리마리오를 비롯한 개그맨 후배들이 ‘형이 코미디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며 고맙다고 하더라. 방송에서 새로운 소재와 이야기를 다룬 기간이 얼마되지 않았기에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본다.

Q. 시청자층이 세분된 만큼 방송환경에도 변화가 뒤따를 것 같다.
홍석천: 가장 단적인 사례가 스마트폰이 낳은 변화다. 요즘 누가 금요일, 토요일에 집에서 TV를 보나. 스마트폰과 같은 기기들 덕분에 방송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 본방송을 안 봐도 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구미에 맞는 프로그램만 찾아볼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런 변화가 계속되면 기존에 특수한 소재를 다룬다고 했던 프로그램들도 결국 문화의 일부분으로 편입될 거다. 내가 할 일이 점점 많아질 것 같다는 생각에 차근차근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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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구체적으로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홍석천: 크게 보면 나와 대중 사이에 있는 벽을 허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작은 모임이라도 강의할 기회가 있다면 전국 어디라도 찾아갔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20대 친구들이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다음에 이런 이슈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지 않겠나. 그런 변화들이 사람들을 통해 퍼져 나가면서 이질적인 것에 마음을 열게 된다. 이런 작업의 일부로 ‘홍석천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 연기자로서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뮤지컬 대본도 쓰고 있다. 덤으로 정말 센 프로그램에 출연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다. 몇 번 돈 내고 보는 케이블채널에서 연락이 왔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생각에 고사했다. 벗는 데도 철학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야하지만, 야한 걸로 끝나지 않는 프로그램이라면 언제든지 출연할 의향이 있다.

Q. 뮤지컬 대본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앞으로 색다른 모습을 기대해 봐도 될까.
홍석천: 지금 쓰고 있는 대본으로 하반기에 소규모 극장에서 뮤지컬 공연과 영화 작업을 하려고 준비 중이다. 내년에는 극작가이자 연출가, 그리고 연기자의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거다. 모든 게 때가 있다. 나는 지금까지 13년을 기다려왔고, 적당한 시기에 준비했던 것을 하나씩 꺼내 놓으려 한다. 대중과 소통하며 내가 꿈꿔왔던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 중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과 준비는 앞으로도 계속될 거다.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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