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일은 오리무중이다. 절절한 순애보로 마음을 녹이다가(‘국화꽃 향기’), 한량처럼 찌질대다가(‘괴물’ ‘고령화 가족’), 음탕하게 칭얼대다가(‘연애의 목적’), 용맹스럽게 달리다가(‘최종병기 활’), 언제 그랬냐는 듯 욕망에 휩싸인 노시인(‘은교’)로 분해 상대를 깜짝 놀래 킨다. 그러니, 10여 년 전 ‘살인의 추억’의 형사 두만(송강호)이 맑고 순수한 피해자의 얼굴을 한 현규(박해일)의 눈을 보고 좌절했던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런 박해일을 두고 혹자는 ‘이 세상에는 없는 사람같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배우’라고 말한다. 매 작품에서 달라지는 것이 배우라지만, 박해일처럼 양극단의 캐릭터를 종횡무진 오가는 연기자는 드물다. 그런 박해일이 새로 들고 나온 영화는 ‘제보자’다. 진실을 추적하는 PD 윤민철로 분한 박해일을 보면 묻고 싶어진다. “어떤 모습이, 진짜 박해일인가요?”

Q. 당신을 처음 본 게, 대학로 연극 ‘청춘예찬’ 때였다. 그래서인지, 박해일은 ‘영원한 청춘’이라는 느낌이 내게 있다.
박해일:
아! 1999~2000년도에? 아하하하.Q. 박해일의 ‘청춘예찬’을 기억하는 팬들이 지금도 많은 걸로 안다.
박해일:
연극할 때 만난 팬 분들이 지금까지도 블로그를 유지하고 계신다. 많은 분들은 아니지만 시사회 때나 무대 인사 때 한 번씩 뵙곤 한다.

Q. 그런 팬들에게도 ‘제보자’는 의미가 남다른 작품일거다. 당신이 ‘청춘예찬’을 떠나 스크린에 처음 데뷔한 작품이 임순례 감독님의 ‘와이키키 브라더스’였다. ‘제보자’는 임순례 감독과 14년 만에 재회한 작품이고.
박해일:
내게도 임순례 감독님과의 재회는 남다르다. 어떤 말로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임순례 감독님은 단순히 ‘스크린 데뷔작’을 연출해 준 분이 아니다. 영화의 개념도 모를 때 감독님을 만났다. 선배들로부터 “영화는 연극과 다르다. 연기 톤을 달리 생각해야 한다”는 얘기를 종종 듣기는 했지만, 정확하게 어떤 부분이 다른지 모른 채 영화로 넘어갔다. 그때 만난 임 감독님은 넓은 울타리를 만들어서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연기하게 해주는 스타일이셨다. 영화라는 매체를 흡수하는데 있어서 임 감독님을 처음으로 만난 것이 ‘참 행운이었구나’라는 걸,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그런 분을 다시 만나니, 설레기도 하고 두근거리기도 했다. 내게 굉장히 중요한 분이다.


Q. 많은 인터뷰에서 “감독의 기운을 많이 타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임순례 감독님에겐 어떤 기운을 받나.
박해일:
14년 전, 감독님에게 가장 강하게 받았던 기운은 푸근함이다. 다시 만난 감독님은 변함없으셨다. 다만 이전보다 더 단단해지고, 동시에 더 부드러워진 듯했다.Q. 감독의 기운을 받는다는 게, 단순히 연출스타일은 아닌 것 같고. 에너지인가?
박해일:
에너지이자, 촬영을 하게 하는 동력이자, 응원 같은 거다. 내가 어떤 상황을 연기해 나감에 있어, 준비한 것 이상을 꺼내 보이고 싶게 만드는 시선이랄까.

Q. 감독님들의 기운이 당신의 기운과 부딪힐 때도 있을 텐데.
박해일:
부딪히기도 한다. 감독님들마다 스타일들이 있으니까. 영화적 성격에 따라 변수가 생기기도 하고. 그런데 오랜 경험을 통해 부딪히는 것이 꼭 부정적인 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생각이나 기운이 다르더라도, 그것이 생산적인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지면 오히려 더 큰 시너지를 발생시킨다.

Q.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면, 박해일의 기운은 차가운 쪽에 가깝나 따뜻한 쪽에 가깝나.
박해일:
분류하기 어려운데….(웃음) 아직은 내 브랜드를 찾아가는 과정인 것 같다.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가고 싶을 때도 있는데, 굳이 결정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이미지가 규정돼서 틀에 갇히는 걸 지양하는 편이다. 아직은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크다.Q. ‘제보자’ 윤민철 캐릭터를 받고 가장 먼저 어떤 걸 준비했나.
박해일:
생명공학은 이번 작품을 하며 처음 접했다. 최소한의 이해를 위해서라도 공부를 해야 했다. 그래서 생명공학 전문가 분을 모셔 배우와 스태프들이 강의를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임순례 감독님이 사건을 사실적으로 풀어가려고 하셨기 때문에 취재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사프로그램 방송국 견학도 갔고, 조감독으로 나오는 송하윤 씨와 새벽에 실제 취재 차량을 타고 나가 언론인들을 관찰하기도 했다. 당시 현장에서 얻은 기분과 공기가 촬영할 때 큰 도움이 됐다.


Q. 언론인으로서의 신념과 동물적인 감각으로 사건의 진실을 물고 늘어지는 윤민철을 보면서, 형사로서의 정의감과 역시 동물적인 감으로 진실을 찾는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송강호)을 생각했다. 그 사이에 박해일이 있으니까. (박해일은 ‘살인의 추억’에서 살인용의자 박현규 역을 맡아 호평 받았다.)
박해일:
두 작품을 비교한다면 ‘살인의 추억’ 때의 누군가의 시점을 받는 연기를 했고, 이번에는 시점을 추적하는 연기를 했다. 전자가 진실을 추궁 받는 입장이라면, 이번은 진실을 추궁하는 쪽이고. 그리고 ‘살인의 추억’은 형사들의 시점으로 흐르는 영화였다. 나는 그들의 의구심을 증폭시키는, 진범인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배반적인 느낌의 살인용의자 역할이어서 그 부분에 몰입했다. 반면 ‘제보자’는 주연으로서 많은 것들을 생각해야 했다. 포지션과 분량은 다르지만, 두 입장을 모두 연기한 건 좋은 경험이라 생각한다.

Q. ‘제보자’의 PD 윤민철이 ‘살인의 추억’의 용의자 박현규를 추적한다면 어떨 것 같나.
박해일:
하하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질문이다. 음… 일단 단시간에 끝날 드라마는 아닐 같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게다. 그런데, 방송국PD가 살인 용의자를 만날 계기가 있을까?(웃음)Q. 영화적으로는 가능하다.(웃음) 쫓는 쪽과 쫓기는 쪽, 배우로서 어느 쪽이 더 흥미롭나.
박해일:
아유, 둘 다 힘들다.(웃음) 그런데 박현규는 그때 그 나이에 했기에 그런 분위기의 캐릭터로 나올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왜, 사람이 그 나이 때에 지니고 있는 감성이라는 게 있지 않나. 아무리 연기라고 하지만, 사람이 물리적으로 지니고 있는 감성이라는 게 있고, 카메라는 그런 분위기들을 웬만하면 다 짚어낸다. 지금 가지고 있는 감성으로 박현규를 연기한다면, 뭔가 불균질할 것 같다. 아마도 완전히 다른 톤의 박현규가 나올 거다.

Q. 20대의 감성과 지금의 감성이 많이 변했다고 느끼나.
박해일:
물리적으로 변하는 게 분명 있다. 변하고 싶은데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을 테고.

Q. 그게 뭔가. 변하고 싶은데, 변하지 않은 것들.
박해일: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쉽게 바뀌지 않는 그 사람만의 본성이 있지 않나. 내가 나 자신을 얼마나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나 싶기는 한데, 성격적인 면에서 변하지 않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Q. 외모는 거의 변하지 않은 것 같다.(웃음)
박해일:
하하하. 속을 보면, 많이 늙었다.

Q. 외모만 보면, 박해일이 ‘청춘예찬’의 아버지 역할을 하는 날이 올까 싶기도 하다.
박해일:
여담인데, ‘제보자’에 극단 선배가 나오셨다. PD 일원 역을 연기하셨는데, 조만간 대구 ‘청춘예찬’에 선생님 역할을 하러 간다고 하시더라. ‘청춘예찬’이 참 오랫동안 사랑받는 레퍼토리라는 생각을 새삼 했다. 그래서 내겐 더 의미가 깊은 작품이다. 그리고 또 모르지. 언젠가 내가 선생님을 연기 할 수도 있고, 나이가 더 들어서 정말 아버지 역을 해볼 수도 있고. 연극 무대는 열어두고 있다.

Q ‘제보자’를 보면서 다시금 느꼈지만, 사람들은 진짜 진실보다 믿고 싶은 것을 진실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진실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나, 강하게 한다고 생각하나?
박해일: 진실에 가까이 가기까지 힘든 과정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오래 걸리든 혹은 험난하든 진실이 명확해 진다면 결과적으로 사회가 더 건강해 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Q. ‘김용민의 조간 브리핑’을 종종 듣는다고 들었다. 그 방송을 듣다보면, 대한민국의 진실이 더 오리무중으로 여겨질 것 같은데, 시사에 관심이 많은 편인가.
박해일:
남들이 관심 갖는 정도다. 촬영 때문에 TV 뉴스를 제 시간에 챙기기 힘들다. 인터넷이나 라디오를 틀어 놓는 편이다. ‘김용민의 조간 브리핑’의 경우 결국 이야기하는 방식의 차이인데, 얘기를 재미있게 하는 것 같다. 내겐 그냥 시사 정보를 습득하는 수단 중 하나다.

Q. ‘제보자’는 소재의 특성상 관객의 집중도를 요하는 영화라 생각한다. 그런데 기대 이상으로 흡입력이 좋더라.
박해일:
시나리오를 처음 읽을 때도 몰입도가 좋다고 느꼈다. 사실, 시나리오만으로는 드라마가 흘러가는 속도를 정확하게 읽을 수 없다. 임순례 감독님의 영화 스타일이 빠른 편이 아니기도 하고. 그런데 현장에서 감독님이 기존의 필모보다는 조금 더 박진감 있게 촬영 템포를 가져가시더라. 나도 그렇고 스태프들도 그렇고 그 템포에 발맞춰 나가다보니, 추운 겨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추운 줄 모르고 쭉쭉 달렸다.


Q. 다행이다. 오래 전에, 싫어하는 7가지 중 하나로 추위를 꼽았던데.
박해일:
내 필모를 보면, 유달리 덥고 추운 날 많이 찍었다. 그래서 그런 고민을 자주 한다. 겨울이 지난 따듯한 봄과, 뜨거운 여름을 지난 가을. 그 좋은 두 군데를 쉴 것인가 촬영할 것인가! 항상 고민이다.(웃음)

Q. 고민의 결론은?
박해일:
내가 별수 있나. 작품이 크랭크인하는 스케줄에 따라가야지. 하하하.

Q 현장에서 스태프로 일하는 혹자는 ‘연애의 목적’의 의뭉스러운 유림이 박해일과 가장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또 ‘제보자’에 출연한 김강현 씨는 “박해일의 진지함을 닮고 싶다”고 한다. 궁금하다. 어떤 모습이 진짜 박해일인지.
박해일:
글쎄. 사람이 한 가지 면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니까. 진지할거라고 생각했는데 만나보니 의외로 재미있다고 하는 분도 있고, 예상대로 진지하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다.

Q. 평상시에는 유유자적하게 일상을 즐긴다고 들었다.
박해일:
한편의 영화 시나리오를 받아서 촬영을 마치기까지 최소 6개월에서 1년이 걸린다. 그 시간 동안 지방을 돌아다니고, 100여명이 넘는 스태프들과 부대끼다보면 에너지가 상당히 많이 빠져나간다. 그러다보니 촬영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조용히 지내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든다. 혼자 산책도 하고 싶고, 걸으면서 정리도 하고 싶고. 나는 그런 게, 좋다.

Q. 원래 그런 성향이었나.
박해일:
어릴 때부터 혼자 걷는 걸 좋아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 다녀야 하는 환경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는 하루에 못해도 20-30분은 걸어 다녔던 것 같다.

Q. 걸으면서 생각을 비우는 편인가, 쌓는 스타일인가.
박해일:
쌓기도 하고 비우기도 하는데, 요즘은 덜어내면서 정리를 많이 경우가 많다. 워낙 여러 인물의 삶을 받아들여야 하는 직업이다 보니, 일상에서는 덜어내려고 하는 편이다.


Q. ‘은교’의 이적요(박해일) 시인처럼?(웃음) 혹시 시를 써 본 적, 있나? 시 쓰는 남자의 느낌이 있는데.
박해일:
하하하. 시를 쓴 적은 없다. 일단, 그럴 능력이 안 된다.

Q. 윤민철은 이제껏 당신이 맡은 캐릭터 중, ‘철이 든 인물’ 베스트 5안에 들어갈 거다.
박해일:
하하하.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 내가 그동안 워낙 철없는 캐릭터를 많이 맡았다.(웃음) ‘제보자’를 보신 주변 지인들은 다들 “지금쯤 해 볼만 한 캐릭터 같다”라고 하더라.

Q. ‘지금쯤 해 볼만 한 캐릭터’라는 건 어떤 의미에서일까. 그리고 배우로서 정말 철이 들고 싶은지도 궁금하다.
박해일: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먼저 대답하자면 매순간 철이 들고 싶다. 어떻게 된 게, 우리 아이가 나보다 더 철이 든 것 같기도 하다.(웃음) 영화를 통해 철이 들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다. 실제로 한 작품 한 작품 하면서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나가는 느낌이다. 그리고 첫 번째 질문은, 내가 워낙 찌질한 캐릭터를 많이 연기해 와서 그런 얘기를 한 게 아닌가 싶다. 이제 나이 값도 하고, 철도 들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웃음) 그런데 그건 내가 설명하기보다 영화를 보시는 분들이 느끼는 게 맞는 것 같다.

Q. 정말 다양한 나이의 박해일들이 있다. 정신 연령 열세 살 소년부터, 철들지 않은 청년, 칠십 먹은 노인을 1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모두 소화한 배우가 과연 있을까? ‘소년 천국을 가다’의 네모와 ‘은교’의 이적요, ‘제보자’의 민철을 한 자리에서 만난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대화를 할 것 같나.
박해일:
하하하. 정확한 답은 감독님들에게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어쨌든 세 인물 모두 감독님들이 박해일이라는 사람의 소스를 가지고 반죽을 해놓은 캐릭터라 생각한다. 그랬을 때, 세 인물 모두 뭔가 천진스러운 면이 있지 않나 싶다. 윤민철 캐릭터도 너무 정의롭게 풀었다면 이야기가 협소해 질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임순례 감독님이 캐릭터를 제안하면서 그러셨다. “집요하고 근성 있되 귀여운 구석이 있는 인물이다. 그런 캐릭터를 해일씨가 해 줬으면 좋겠다. 너무 많은 걸 만들어서 가지 말자”라고. 결국은 나를 두고 얘기한 부분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질문에 답을 하자면, 나의 소스가 들어간 인물들이니 무슨 대화든 통하지 않겠나.(웃음)

글. 정시우 siwoorain@tenais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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