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1 ‘정도전’ 포스터
하수상한 시절에 걸맞은 참으로 범상치 않은 작품이었다. 지난 1월 4일 첫 전파를 탄 KBS1 ‘정도전’(극본 정현민, 연출 강병택, 이재훈) 매회 자체 최고시청률을 경신하며 KBS 사극의 역사를 새로 썼다.시청률도 시청률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시청자들의 체감 반응이다. 이미 기정사실화 된 역사적 사실을 다룬다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중·장년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사극은 ‘정도전’의 인기와 함께 입지를 새로이 다졌다.지난 29일 종방한 ‘정도전’의 6개월은 사극의 진화 과정과 다르지 않다. 그간 여타 사극에서 기능적인 인물에 그쳤던 정도전이 극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사극의 진화’와 거리가 멀지 않다.
‘정도전’, 미니시리즈와 사극의 접점을 찾다
정통 사극을 표방한 ‘정도전’이 역설적이게도 가장 현대적이었던 사극이었다. 일단 방송 분량부터가 달랐다. 일반적으로 100회 이상을 기본으로 기획되는 여타 사극과 달리 ‘정도전’은 그와 비교해 절반 수준의 방송분량으로 시청자를 만났다.물론 기존의 사극이 장기간 방송됐던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상대적으로 긴 시간의 흐름을 담는 것이 사극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따른 부작용도 분명히 존재한다. 별다른 변곡점 없이 분량만 늘어날 경우 사건 전개는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또 제작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제작진, 출연진의 정신적·물질적 부담도 적지 않다.
KBS1 ‘정도전’ 방송 화면 캡처
반면 ‘정도전’은 50회 분량의 짧은 방송분을 밀도 있게 채우는 쪽을 택했다. 이는 흡사 미니시리즈를 떠올리게 하는 빠른 전개로 이어졌다. 긴박감 넘치는 전개는 되레 극의 흡입력을 크게 높였다. ‘정도전’이 중·장년층 시청자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에게도 크게 어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역사적 얼개를 바탕으로 인물 간의 갈등이 극의 중심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사극은 역사적 사실을 다루기에 자연스레 많은 인물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정도전’은 이를 두 인물의 갈등 구조를 반복하는 형식으로 치환해 극에 대한 몰입도를 높였다. 이는 이인임(박영규), 정몽주(이인임) 등 매력적인 인물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정도전’은 마치 단계별 미션을 수행하듯 다양한 인물을 순차적으로 배치함에 따라 각 인물을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벌었다.해석의 여지 많은 텍스트에 젊은 세대 열광
‘정도전’의 또 다른 성공 요인 중 하나는 바로 해석의 여지가 많은 텍스트이다.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라는 말은 있으나, 사실 사극에서는 그것처럼 와 닿지 않는 말도 없다. 역사에 대한 ‘재해석’ 없이 ‘재연’에 그친 텍스트만큼 지루한 작품은 없기 때문이다.‘정도전’ 이런 기존 사극의 문제점을 극복한 방법은 바로 적절한 시대상의 반영과 곳곳에 숨겨놓은 극적 장치의 사용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정도전’이 방송 전부터 관심을 끌었듯, 10여 년간 국회 보좌관으로 활동했던 정현민 작가의 독특한 이력이 작용했다. 실제 정치 세계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정 작가는 극 중 인물들의 날 선 대사로 이를 녹여냈다. 이인임, 정도전, 이성계, 하륜 등 인물의 대사가 큰 사랑을 받았던 이유도 바로 현실과의 접점 덕분이다.
KBS1 ‘정도전’ 방송 화면 캡처
또 익숙한 역사적 사건을 ‘정도전’만의 방식으로 풀어낸 것도 주목할 만하다. 앞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하여가’, ‘단심가’ 서찰 신이나 정몽주의 선지교 최후신 등은 드라마라서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여기에 중반부부터 형상화된 이성계-정몽주-정도전의 ‘남남 케미’는 ‘정도전’에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부여하며 시청자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현대적인 요소들이 극의 흐름에서 튀지 않게 적절히 녹아있었다는 것은 ‘정도전’의 최대 장점 중 하나였다.이처럼 다양한 방법을 활용한 ‘정도전’은 기존의 사극과는 다른 질감의 작품을 만들어내며 시청자를 매혹했다. ‘정도전’이 불씨를 지핀 ‘사극 열풍’은 어디까지 뻗어 나갈 수 있을지. 어쩌면 우리는 ‘정도전’을 통해 변화의 기로에 선 사극의 진화를 향한 첫걸음을 목도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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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제공.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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