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SBS 에 출연하던 당시 한정수의 휴대폰 바탕화면에는 ‘정의, 용기, 열정, 지혜, 신념’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정의롭게, 비겁하지 않게 살고 싶다.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진지하게 말하던, 21세기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타입의 이 ‘남자’는 올해 KBS 와 SBS 에서 가장 자신다운 캐릭터를 연기했다. 그 사이 그의 휴대폰은 아이폰으로, 바탕화면은 그가 좋아하는 만화 의 캐릭터들로 바뀌었지만 “감독과 배우에게는 연기 뿐 아니라 서로 어떤 의식세계를 가졌느냐도 상당히 중요한 것 같다”고 여기는 것만은 변하지 않은 배우 한정수를 만났다.

지난 주 (이하 )가 종영했다. 어떻게 지냈나.
한정수 : 목요일 마지막 방송을 다 같이 보고 금요일에는 저녁에 제부도로 MT를 다녀왔다. (김)소연이나 다른 배우들, 스태프들 모두 매일 밤새고 힘들어서 살이 5kg씩 빠졌는데 현장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진혁 감독님은 물론 촬영 감독, 조명 감독님 등 스태프들이 너무 좋은 분들이라 아무리 힘들어도 큰 소리 나는 일이 없었다.

“저게 무슨 윤검사야? 최장군이지, 라는 말을 들을까봐 걱정했다”
한정수 “2010년, 태어나서 가장 운이 좋았던 해”
한정수 “2010년, 태어나서 가장 운이 좋았던 해”
KBS 에도 출연했지만 현대극에서 비중이 큰 역은 가 처음인 셈이다. KBS 을 비롯해 사극에 주로 출연한 데다 의 최장군이 지워지기도 전에 상투를 틀지 않은 모습을 보게 되어 어떨까 궁금했다.
한정수 : 솔직히 나도 반신반의했다. 이상하지 않을까, 어색하지 않을까.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데다 후반과 초반 촬영이 겹쳐 윤세준 역할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얼마나 힘들고 부담이 컸냐 하면 원형 탈모가 올 정도였다. 미용실 갔더니 “형, 여기 구멍이…” 하면서 사진 찍어 보여주는데 타원형으로 땜빵이 생겼더라. (웃음) 굉장히 긴장했는데 5회 정도를 지나면서 조금 편해졌다.

사극과 현대극은 기본적으로 대사 처리 스타일이 다른데 두 작품을 번갈아 찍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한정수 : 그게 제일 어려웠다. 그래서 초반 보면 윤검사인지 최장군인지. (웃음) 에서는 목소리를 한껏 누른 최장군이 되었다가 다음 날 아침에는 갑자기 풀어서 윤검사로 바뀐다는 게 아직까지 내 능력으로는 안 되는 것 같다. 욕도 좀 먹었고 내가 봤을 때도 별로였는데 10회를 지나면서 캐릭터가 조금씩 변하고 연기도 좀 풀어진 것 같다. 그런데 드라마가 참 아쉬운 게, ‘이제 좀 익숙한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볼까?’ 하고 있으면 끝나 버린다. (웃음) 최장군 때도 그랬고 윤검 때도, 좀 편하게 하려니까 마지막이라고.

‘그레고리 펙이라는 별명을 지닌 훈남 검사’라는 설정이 부담스럽지는 않았나. (웃음)
한정수 : 그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어차피 외모는 변할 수 없는 거니까. (웃음) 그런데 최장군과 윤검사가 아주 다른 색깔의 인물은 아니다 보니 연기적인 변화에 대한 부담이 컸다. 모든 배우들이 영원히 짊어지고 갈 숙제겠지만 “저게 무슨 윤검사야? 최장군이지”라는 말을 들을까봐 걱정했다. 내가 존경하는 배우인 알 파치노가 예전에 어느 신인 배우에게 “네가 하고 싶은 연기를 하지 말고 네가 잘 하는 연기를 해라”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그게 정답일 수도 있고, 늘 변화를 추구하는 배우가 멋질 수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좀 다양한 모습을 연기하고 싶다. 아주 코믹한 역할도, 정통 느와르도.

그런데 을 비롯해 , , 등 대부분의 출연작에서 신의가 있거나 심지가 굳은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점은 일관된 편이다.
한정수 : 믿음이 가는 이미지를 얻은 건 좋다. 감사한 일이다. 사람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이미지라는 건 쉽게 생길 수 있는 게 아니고 조만간 지방 선거에서도 모든 정치인들이 갖고 싶어하지만 갖기 어려운 걸 텐데. 그런 점에선 행운이다. 그걸 계속 가지고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결국 여러 역할을 하다 보면 깨질 수도 있는 일이고.

윤세준 검사의 독특한 점은 아주 고지식해 보이지만 사고가 유연하다는 거다. 조직 위계질서에 반발하는 마혜리(김소연)에 대해 남들이 모두 욕할 때도 최대한 이해하려고 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한정수 : 딱딱해 보이지만 열린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마검에 대해서도 ‘그럴 수도 있지. 걔가 생각하는 게 정말 틀린 걸까?’라는 말을 하는 것 같다. 그런 면이 좋았고 나와 좀 비슷하기도 하다. 나는 살아오면서 별다른 장점이 없는 사람이다. 특별히 잘 하는 것도 없고 공부나 운동에 뛰어난 것도 아니지만 장점이 있다면 딱 하나, 남의 말을 많이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는 거다.

는 현대극 도전인 동시에 첫 로맨스 연기 도전이었다.
한정수 : 그러게. 에서는 로맨스라기보단 거의 베드신에 가까웠고 에서도 초반에 로맨스가 잠깐 있을 뻔 하다가 나중에는 주모들과 만나지도 못했다. (웃음) 그래서 남녀의 감정이 오가는 연기는 처음이었는데 하면서 많이 배웠다. 멜로는 감정의 선이 굉장히 섬세해서 고민도 많이 했지만 재미있었다.

하지만 ‘이건 연기니까 하지 실제로는 못 하겠다’ 싶기도 했을 것 같다.
한정수 : 아우, 못한다. 손발이 오그라들어서…(웃음) 사실 윤검도 그렇게 로맨틱한 사람이 아니고 애정표현이 약한 사람인데 후반부에 진검(최송현)에게 많이 다가갔다. “왜 몰랐지? 귀여운 걸?” 이런 대사도 하던데 나라면 못한다. 끝까지 묵직하게 갈 줄 알았는데 윤검한테 깜짝 놀랐다. 프로포즈까지 하고.

혹시 촬영하면서 기억에 남는 신이 있나.
한정수 : 차를 타고 가면서 마혜리에게 죽은 부인에 대한 추억을 얘기하는 신이 있었다. 감정신이라 약간 울먹이면서 최소 3, 4분 정도 계속 얘기를 해야 하는데 도로에 뽈록이(과속방지턱)가 너무 많은 거다. 말 좀 할 만 하면 꿀렁~하고 할 만 하면 꿀렁~해서 계속 NG가 났다. 심지어 신호에도 자꾸 걸리고. (웃음) 결국 장소 옮겨서 다시 찍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마음에 들었다.

“감독과 배우는 서로 어떤 의식세계를 가졌느냐도 중요하다”
한정수 “2010년, 태어나서 가장 운이 좋았던 해”
한정수 “2010년, 태어나서 가장 운이 좋았던 해”
한정수 “2010년, 태어나서 가장 운이 좋았던 해”
한정수 “2010년, 태어나서 가장 운이 좋았던 해”
의 곽정환 감독과는 인연이 꽤 길다고 들었다. 어떻게 만났나.
한정수 : 하기 한 2년 전에 KBS 4부작 드라마를 준비하면서 만났다. 남자 형사와 싸이코메트리를 하는 여자 공무원이 함께 사건을 수사하는 이야기였는데 작품이 엎어졌다. 그래서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전화가 와서 같이 하자고 하시는데, 나야 놀고 있었으니까 굳이 거부할 이유도 없었고. 그런데 사실 에서도 난 일찍 죽었다. 8부작의 4부쯤에. (웃음) 그리고 또 2년 정도 있다가 전화를 하셔서 라는 걸 하는데 같이 하겠냐고, 또 좋다고 했는데 나중에 시놉시스와 캐릭터를 받아보니 최장군이 너무 멋있었다.

곽정환 감독과 처음 만나 체 게바라 이야기를 하다 친해졌다는 게 재미있었다.
한정수 : “당신은 왜 연기를 하냐”고 곽 감독이 물어서 21세기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문화의 시대인 것 같다는 얘기를 하면서 체 게바라에 대해 말한 것 같다. 감독과 배우는 연기 뿐 아니라 서로 어떤 의식세계를 가졌느냐도 상당히 중요한 것 같다. 같은 작품을 해 가면서 생각이 맞아야 하니까. 이나 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세상을 좋은 쪽으로 바꿔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고 의식이니까, 그런 부분이 잘 맞아야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것 같다.

여자들보다도 남자 세계 안에서 ‘멋진 남자’로 인정받을 만한 캐릭터를 자주 연기해 왔다.
한정수 : 그러게. 여자들이 좋아하면 좋겠는데 여자들은 서변(박시후)처럼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뭐, 괜찮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배우도…(웃음)

에서도 복근이 화제였고 예전에는 이종격투기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을 만큼 운동을 즐기는 것으로 안다. 몸을 단련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나.
한정수 : 혼자 하는 운동을 좋아해서 헬스를 제일 꾸준히 하는 편인데, 남자는 육체적으로 어느 정도 힘이 생기면 정신적으로도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연기하는 후배들에게도 “맨날 술만 먹지 말고 운동 좀 해라. 건강에도 좋고 정신적으로도 좋다”고 말한다. 사실 내가 보기와 달리 술을 못 하기 때문에 운동이 아니면 스트레스를 풀 데가 없다. 운동이 아니면 잠 뿐이다. (웃음)

보통 사람에게도 그렇지만 배우에게는 특히 자신감이 중요한 것 같다. 스스로 매력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어야 감독이나 제작진, 시청자들도 그렇게 믿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한정수 : 그렇다. 배우들 간에도 그렇고 감독을 만나도 알게 모르게 기 싸움이 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싸움이라기보단 서로 상대의 내공을 읽고 무의식중에 그 사람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는 건데, 그래서 상당히 중요한 것 같다. 그런데 자신감은 그냥 앉아서 ‘난 멋있어. 난 운동도 잘 하고 잘 생겼어’ 하고 아무리 생각한다고 생겨나는 건 아닌 것 같다. 충분히 자신을 단련하고 그것에 익숙해져야만 생기는 거다.

20대에는 방황을 길게 한 편이다. 대학 전공도 바꿨고 음악을 하다가 연기로 옮겼는데 그것도 초반부터 잘 풀리지는 않았다. 배우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든 뒤에 주목받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한정수 : 쉽지 않다. 그런데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면도 있다. 만약 내가 어릴 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화려한 자리에 있다가 꺾였으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데 지금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하다 보니 그런 일을 당하더라도 충분히 대처할 힘이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요즘 나이 어린 아이돌을 보면 사람들은 열광하고 좋아하지만 나는 안쓰러운 마음도 든다. 어려서부터 연기를 한 친구들도 그렇고, 그 나이 때 충분히 겪고 배워야 할 것들을 건너뛰며 살아가는 게 옆에서 보면 안타깝다. 그러니까 스무 살 이후, 성인이 되어서 시작하고 삼십대 초반 즈음 잘 되는 게 좋은 것 같다. 그때쯤 되면 세상도 조금 알고, 견딜 힘도 좀 생기고 할 테니까. 나 같은 경우는 너무 늦은 거지만. (웃음)

“로또가 되면 전망 좋고 조그만 사무실을 하나 갖고 싶다”
한정수 “2010년, 태어나서 가장 운이 좋았던 해”
한정수 “2010년, 태어나서 가장 운이 좋았던 해”
아이폰을 산 모양이다.
한정수 : 사실 이걸로 그닥 하는 건 없고 트위터만 조금 한다.

DC 인사이드 갤러리에 글을 남기거나 트위터를 하는 걸 보면 사람들과의 소통을 좋아하는 것 같다.
한정수 : 전에는 안 그랬는데 나이를 한 살씩 먹으면서 그러려고 노력한다. 어릴 때는, 나는 배우고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과 대화하고 남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고 느낀다. 결국 연기도 그런 삶 속에서 나오는 거기 때문에, 그래서 더 많이 어울리려고 한다.

예능 프로그램이나 토크쇼에 거의 출연하지 않았는데 최근 SBS 녹화를 했다고 들었다. 어떤 얘기를 했나?
한정수 : 말을 잘 하진 못하는데 웃긴 얘기 하는 걸 좋아한다. 남들 웃기는 것도 좋아하고. 사실 회사에서는 토크쇼 못 나가게 한다. 사고 칠까봐. (웃음) 은 6월에 방송될 월드컵 특집이어서 돌아가신 아버님이 국가대표 축구선수이셨던 얘기를 했다.

에 이어 까지, 2010년 시작이 좋았다.
한정수 : 태어나서 가장 운이 좋았던 해다. 그래서 로또를 열심히 산다. (웃음) 아직까지는 안 됐지만 금년 정도 운이면 될 것 같기도 하다.

로또에 당첨되면 뭘 하고 싶은가.
한정수 : 영화사를 하나 차리고 싶은데 그보다 작고 구체적인 꿈은, 전망 좋고 조그만 사무실을 하나 갖고 싶다는 거다. 시나리오도 보고 영화도 볼 수 있는.

영화사를 차리고 싶다는 건 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뜻 같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한정수 : 하고 싶은 얘기도 물론 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한다고 사람들이 보는 건 아니다. 나만 하고 싶은 얘기를 독백하는 거지. 중요한 건 얼마나 재미있는 얘기를 하느냐, 그리고 그 안에 어떻게 하고 싶은 얘기를 끼워 넣느냐다. 처럼. 일단 내가 20대 때 밴드를 하면서도 그랬고 살면서 여러 가지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많이 해서 재밌는 에피소드를 많이 가진 편인데 그런 걸 잘 모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음 작품으로 연극을 선택할까 한다던데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는 점이 다소 의외다.
한정수 : 아직 확실히 결정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대본을 보고 있다. 배우 겸 작가인 샘 셰퍼드의 < Fool for Love > 라는 작품인데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고 나서 알고 보니 이복남매였다는,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드라마 같지만 (웃음) 두 사람 사이의 애정과 갈등을 깊이 있게 그리는 작품이다. 연극은 학교 다닐 때 이후로 못 해봤는데 정말 재미있는 작업이다. 싸우기도 많이 싸우는데 공연이 끝나고 나면 아무리 치고받고 싸웠던 사이라도 얼싸안고 울 정도로 좋아지는 게 무대의 매력이다.

예전에는 하늘을 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지금도 그런가.
한정수 : 음…‘무릎 팍 도사’에 김건모 씨가 나오셔서 똑같은 말씀을 하셔서 깜짝 놀랐는데, 아직도 꿈이다. 언젠가는 경비행기 운전을 배우고 싶다.

글. 최지은 five@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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