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민│사람과 사랑이 있는 영화
한지민│사람과 사랑이 있는 영화
한지민은 착한 사람이다. MBC 의 송연이 그랬고, SBS 의 오영지가 그랬다. 그는 틈나는 대로 봉사활동에 헌신했고, 필리핀 오지 마을 아이들과의 경험을 담은 책을 출간해 인세 전액을 제3세계 교육 지원을 위한 기금으로 기부했다. 하지만 착하고 순수하다는 문장으로 요약 가능한 인생은 아름다울지언정 흥미롭진 않다. 예쁘고 착하고 모범적인 아가씨. 모두 한지민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할 때쯤, 그의 행보는 에서 흥미로운 커브를 그린다.

에서 한지민은 좀처럼 속내를 드러낼 줄 모르는 상단의 행수 한객주를 연기한다. 익숙했던 그의 이미지는 목소리 톤을 반 옥타브쯤 올리고 어조에서 상냥함을 지워내는 것만으로도 아득하게 멀어진다. “제가 안 해본 역할이잖아요. 아름다움으로 남자를 홀리고, 신비하고 묘한 느낌. 카리스마에 끌려서 선택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는 섹시함이나 카리스마에 방점을 찍는 대신, 끊임없이 탐정을 헷갈리게 만드는 미지의 존재로 한객주를 해석했다. “얼핏 악역 같기도 하고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도 있지만, 한객주의 내면이 더 중요한 부분이었어요. 김명민 씨가 연기하는 탐정이 계속 궁금해 할 만한 인물로 객주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오히려 재미있었지요. 내가 어떤 톤으로 이야기하면 상대가 더 궁금해 하고 수상하게 여길까를 고민했어요.” 자칫 뻔한 팜므파탈로 그칠 수 있었던 한객주가 흥미로운 인물로 그려진 것은 각본의 덕도 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추측을 망설이게 만드는 한지민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흥미롭진 않았을 것이다.

이후 다소 길었던 휴식기, 가장 흥미로운 방식으로 돌아온 그는 작품을 선택하게 된 계기를 묻는 질문에 ‘인연’을 말한다. “다른 작품을 준비 안 한 건 아니에요.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다시 쉬게 되고, 그런 작품들이 있었어요. 마냥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죠. 하지만 그렇게 작품들이 틀어진 덕분에 이 역할을 맡을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사람끼리도 인연이 있지만 작품도 인연이 있는 거 같아요. 아, 이러려고 그런 시간들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작품마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일할 때도 사람 간의 정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는 한지민은 자신이 고른 다섯 편의 영화를 “사람과 사랑이 있는 영화”라고 매 음절 힘주어 꾹꾹 발음했다. 착하고 뻔하지만, 거부할 수 없을 만큼 흥미로운 영화들. 마치 한지민처럼 말이다.
한지민│사람과 사랑이 있는 영화
한지민│사람과 사랑이 있는 영화
1. (Love Affair)
1994년 | 글렌 고든 카론
“엄마랑 봤던 작품인데,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도 너무 좋고 영상도 예뻐서 자꾸 봐도 좋아하는 영화에요. 극 중에서 두 사람 다 서로 약혼자가 있는 상태에서 사랑을 하는 거잖아요. “영화의 주인공이 워렌 비티하고 아네트 베닝이니까 저 사랑도 되게 예뻐 보이는구나” 싶기도 하고. (웃음) 내가 저런 상황에 놓이면 사랑을 어떻게 선택하게 될까 하는 것, 사랑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 둘이 실제로도 결혼했지요.”

플레이보이 마이크 갬브릴(워렌 비티)과 미모의 테리 맥케이(아네트 베닝)는 비행기 비상착륙으로 사랑을 시작한다. 장난처럼 시작한 끌림은 러시안 여객선을 타고 타히티로 향하는 동안 운명적인 사랑으로 발전한다. 3개월 후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 전망대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는 두 남녀의 약속은 상투적이지만, 쉽지 않은 선택을 앞두고 3개월 후를 약속하는 연인들의 간절함까지 외면하긴 쉽지 않다. 실제 할리우드 바람둥이었던 워렌 비티와 아네트 베닝을 결혼에 골인시켜 준 영화다.
한지민│사람과 사랑이 있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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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e Blind Side)
2009년 | 존 리 행콕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잖아요. 제가 복지 쪽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대학도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했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이 감동을 받았어요. 산드라 블록이 연기한 그 엄마가 정말 대단해 보였어요. 저는 아기한테 관심도 많고 입양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는데, 과연 내가 저렇게 사랑으로 키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랑으로 성공시킨 케이스잖아요.”

추수감사절 하루 전날 밤, 리 앤(산드라 블록)은 반팔 셔츠 차림으로 체육관으로 향하던 마이클 오어(퀸튼 아론)를 발견한다. 어릴 적 약물 중독 엄마와 강제로 헤어진 후 여러 집을 전전하며 자란 마이클은 미식축구엔 소질이 있지만 잘 곳은 없는 처지다. 마이클의 순수한 심성에 빠진 리 앤과 가족들은 마이클의 법적 보호자를 자처하며 그의 공부와 미식축구를 지원한다. 괄괄한 성격의 엄마 리 앤 역의 산드라 블록은 로 오스카 여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한지민│사람과 사랑이 있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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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La Vita E Bella)
1997년 | 로베르토 베니니
“고난과 역경 속에서 보여지는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 아내에 대한 사랑이 아름다웠어요. 사실 2주 전에 저에게 조카가 생겼어요. 예전부터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제일 친한 언니가 아기를 낳는 걸 보고, 부모라는 게 얼마나 큰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 건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그러던 차에 영화를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딱 떠오른 게 아버지의 사랑이 그려진 였어요.”

파시즘과 홀로코스트가 판을 치던 시절에도 사랑은 있었다. 순수하고 낙천적인 귀도(로베르토 베니니)는 끝없는 구애로 아내 도라(니콜렛타 브라스키)와 아들을 얻었다. 귀도는 나치의 유태인 말살 정책에 따라 끌려간 와중에도 아들 조슈아에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이 모든 게 사실 하나의 게임이고, 우승하면 진짜 탱크를 가지게 될 것’이라 말한다. 산처럼 쌓인 시체더미 앞을 지나면서도, 아버지이기 때문에 끝까지 웃어야 했던 어느 사랑의 이야기.
한지민│사람과 사랑이 있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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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Love Actually)
2003년 | 리처드 커티스
“는 크게 기대 안 하고 봤는데, 저마다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좋았어요. 전 아이들의 사랑 이야기가 제일 좋았어요. 남자 아이가 공항에서 여자애를 붙잡으려고 뛰어가는 장면에서는 제 가슴이 터질 거 같은 거예요. (웃음) 키이라 나이틀리가 자신에게 고백한 남편 친구에게 입 맞춰 주는 장면도 좋았어요. 저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아무리 상대가 진심이라고 해도 불편했을 텐데, 그렇게 달려가 입 맞춰 줄 수 있는 그 여자도 대단한 거 같아요.”

“사랑은 실제로는 어디에든 있어요. (Love actually is all around)”라는 휴 그랜트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가 연인들의 영화로만 기억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오래 믿었던 남편(앨런 릭맨)의 부정을 보고도 모질게 화낼 수도 없는 캐런(엠마 톰슨)의 마음도, 정신이 맑지 않은 오빠 때문에 모처럼의 데이트도 즐길 수 없는 사라(로라 린니)의 마음에도 사랑은 있다. 그것이 달콤하든 씁쓸하든, 이상형을 향한 것이든 가족을 향한 것이든. 연인이 아니더라도 사랑은 어디에나 있다. 다만 우리가 발견하지 못 할 뿐.
한지민│사람과 사랑이 있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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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Crash)
2004년 | 폴 해기스
“인종 차별을 다룬 작품이에요. 제가 아프리카를 다녀왔거든요. 한국 사람들 중에서도 극단적인 예지만, 그들을 ‘깜둥이’라고 부르거나 그들에게서 안 좋은 냄새가 난다고 말씀하는 분들이 계시잖아요. 아프리카를 다녀오고는 느낀 바가 있어서 많은 생각을 했는데, 결국 저에겐 사랑이 제일 중요한 거 같아요. 일을 할 때에도, 그걸 사랑이라 표현하지 않아도, 사람 사이의 정이 가장 중요한 거 같아요.”

백인 부부는 흑인 청년들에게 차를 강탈당하고 모든 것이 짜증스럽다. 같은 시간, 흑인 부부는 타고 있던 차가 백인 부부의 차와 같은 차종이라는 이유만으로 백인 경찰들에게 검문을 당한다. 백인 경찰관은 병든 아버지를 수발하며 느끼는 고통을 흑인들을 희롱하는 것으로 해결한다. 인생이 병들고 지친 자들은 자신과 다른 피부색의 사람들과 폭력적으로 부딪히고, 다시 상처 입고 오열한다. 행복으로 가는 먼 길의 역경을 그린 는 다민족 사회에서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한지민│사람과 사랑이 있는 영화
한지민│사람과 사랑이 있는 영화
“제가 이제까지 가져왔던 이미지에서 탈피한다거나 하는 걸 의식하진 않았어요. 제가 예전에 맡았던 캐릭터들이 가지고 있는 느낌이 객주에게도 분명히 있어요. 항상 모든 대중을 만족시킬 수는 없는 거 같아요. 하지만 연기자가 그런 걸 두려워해서 캐릭터에 도전하지 않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유 있는 변화라면 그걸 대중들 안으로 스며들 수 있게 열심히 하는 게 저의 몫이죠.” 급격한 이미지 변화에 대중이 낯설어 하진 않을까 두렵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한지민은 얄미우리만치 정석적인 답변을 들려줬다. 하지만 그 뻔하고 모범적인 대답 속에서 한 순간 배우의 오기가 반짝하고 빛났다. 한지민은 여전히 착하고 모범적이다. 그리고 매우 흥미롭다.

글. 이승한 fourteen@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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