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민을 보고 있으면 숨이 차다. 마치 4년에 한 번 열리는 올림픽의 출전선수처럼 작품을 위해 자신의 육체를 한계점까지 몰고 가는 그의 행보는 걱정스러울 정도다. 연기라는 십자가를 짊어진 구도자처럼 그는 매 작품 이순신, 장준혁, 강마에의 면류관을 썼다. “전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연기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이에요. 아무나 할 수 없는 그런 역할에 매력을 느끼고 동기부여가 돼요.”

그 결과 거의 무명이었던 김명민은 KBS <불멸의 이순신>의 캐스팅 논란을 드라마가 끝날 때쯤엔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주워 담았다. 이순신을 청년기부터, 거북선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살아낸 김명민은 “마지막 임종에선 너무 울어서 촬영 진행이 안 될 정도로” 이순신에게 빙의되었다. 자신을 철저히 지우고, 캐릭터가 되는 그의 지독함은 MBC <하얀거탑>에서 폭발했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서슴지 않는 장준혁은 분명 좋은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외과과장이라는 자리를 위해 가련할 정도로 모든 것을 희생하는 이 남자의 피로함은 김명민의 작은 손짓, 동작 하나로 그대로 전해졌다. 무뎌진 감각 탓에 신문을 헛짚던 손은 그 누구도 아닌 장준혁의 것이었다. “사실 그 장면은 저 자신도 그렇게 한 줄 몰랐어요. 그 상황에서 전 김명민이 아니라 장준혁이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나왔나 봐요.” 그렇게 철저히 자신을 빼내고 다른 자아를 주입하는 그의 연기관은 일관되게 이어져 강마에를 ‘만들어냈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억양과 비웃음, 냉소주의의 갑옷을 둘러친 마에스트로는 많은 이들을 <베토벤 바이러스>에 감염시켰다.

그렇게 말랑한 감정은 한 뼘도 허용되지 않을 것 같은 이 완벽주의자도 영화를 보며 누군가의 연기에 감탄을 하는 순간이 있다. 크리스천 베일의 연기를 보고, 일본 드라마에 나온 노부인의 치매 연기를 보고 “와 이건 진짜다”라고 반해버린 김명민이 말하는 영화들. 늘 이순신으로, 장준혁에서 강마에로, 그리고 루게릭병에 걸린 백종우로 우리의 기대치를 높이는 ‘명민좌’의 마음을 움직인 진짜 연기가 살아있는 영화들이다.




김명민│진짜 연기가 살아있는 영화들
1. <더 팬>(The Fan)의 로버트 드니로
1996년 │ 토니 스콧

“로버트 드니로를 너무 좋아해요. 한 영화 안에서 소시민적인 샐러리맨부터 광기 어린 살인마까지 모두 다 할 수 있는 배우죠. 드니로는 다양한 모습 안에서 배우의 역량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복합 다중적인 역할을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는 드니로 말고는 없는 것 같아요. 저도 그런 강렬한 연기를 하고 싶기 때문에 절 더 혹독하게 몰고 가는 거구요. 사실 <더 팬>의 길 리나드를 그 말고 다른 사람이 연기하는 건 상상이 안 가요. 심지어 알 파치노가 한다고 해도 그만큼 해내진 못할 거예요.”

사랑하는 스타를 멀리서 바라보고 응원할 수밖에 없는 팬은 약자이고, 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스타는 강자로 보인다. 그러나 팬이라는 존재가 광기라는 무기를 얻게 되면 그들은 더 이상 약자가 아니다. 덜 사랑하는 쪽이 강해지는 관계의 법칙을 거스르는 길 리나드의 집착은 동경하는 야구선수 바비를 위해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렇게 사랑과 한 끗 차이인 리나드의 집착은 바비에게 벌어질 비극들에 일등 연비를 자랑하는 연료가 된다.



김명민│진짜 연기가 살아있는 영화들
2.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의 리암 니슨
1993년 │ 스티븐 스필버그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거장이 메가폰을 잡은 것도 의미 있지만 제겐 리암 니슨의 연기로 기억되는 작품이에요. 특히 마지막 장면 기억나세요? 그렇게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으면서도 쉰들러가 반지랑 목걸이를 빼면서 ‘이거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라며 자책하는데 보면서 참 많이 울었어요.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고 하지만 <쉰들러 리스트>처럼 한 명의 배우가 눈에 도드라지면서, 배우의 영화가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유대자본의 할리우드 유입으로 홀로코스트 영화가 끊임없이 제작되고 있다고 치부하기에는 여전히 홀로코스트의 상흔은 깊고 쓰리다. 탐욕스럽던 쉰들러가 자기 안의 인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눈을 떠가는 과정을 리암 니슨이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섬세하게 그려냈다. 홀로코스트는 우리 안의 인간성에 대해 회의하게 하지만 변해가는 쉰들러의 모습은 또다시 인간이라는 존재를 긍정하게 만든다.



김명민│진짜 연기가 살아있는 영화들
3. <데드 맨 워킹>(Dead Man Walking)의 숀 펜
1995년 │ 팀 로빈스

“수녀와 사형수 이야기죠. 영화를 처음 봤던 당시에는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은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숀 펜이 돋보입니다. 미국에서도 메소드 연기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숀 펜과 다니엘 데이 루이스, 크리스찬 베일까지 대단한 배우들이 모두 나오죠. 영화적인 장치나 할리우드에서 자랑하는 거대한 자본을 투자한 영화가 아님에도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으로 엄청난 효과를 거두고 있어요. 특히 숀 펜은 <아이 엠 샘>부터 최근 영화 <밀크>까지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연기의 끝을 보여주죠.”

수녀 헬렌에게 날아온 한 통의 편지는 그녀를 사형수의 마지막을 함께 하도록 이끈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매튜 폰슬렛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도, 그렇다고 증오할 수도 없는 막다른 심정으로 함께 한 그녀의 6일은 법이라는 제도에 기대 한 인간의 생을 중단시키는 것이 옳은지를 묻고 있다. 그 자신이 뛰어난 배우이기도 한 팀 로빈슨은 두 번째 연출작으로 재능 있는 배우들을 잘 조합해냈고, 숀 펜은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잔 서랜든은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김명민│진짜 연기가 살아있는 영화들
4. <레스큐 돈>(Rescue Dawn)의 크리스천 베일
2006년 │ 베르너 헤어조크

“크리스천 베일이 가장 돋보였던 영화 같아요. 물론 <머시니스트>에서도 뛰어났지만 저는 여기서의 그의 모습이 더 인상 깊었어요. 이번에 <내 사랑 내 곁에>를 작업하면서 체중 감량 때문에 <머시니스트>의 베일과 비교하는 기사가 많이 나왔는데, 사실 저랑 비교하는 거 자체가 민망하죠. (웃음) <레스큐 돈>은 잘 알려지지 않은 전쟁영화인데, 군인으로 나오는 베일은 그만의 방식의 연기를 보여줍니다. 진짜 벌레를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너무 리얼해요. 배우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어 뭐야 진짜 벌레 먹는 거야? 으악!’ 이렇게 되는 거죠. (웃음)”

극중 디에터 뎅글러는 실제 독일 출신의 미군 파일럿이다. 그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베트콩의 포로가 되었고, 생과 사를 넘나들며 마침내 탈출해 미국으로 돌아왔다. 감독은 다큐멘터리 <디에터는 날아야 한다>에 이어 영화로 그를 다시 소환했다. 그러나 스펙터클한 전투 신이나 화력이 동원된 파상공격보다 오로지 살기 위해 벌레와 뱀을 잡아먹고, 25kg의 체중을 감량하면서까지 전쟁 포로가 된 크리스천 베일의 엄청난 집념이 디에터를 되살려냈다.



김명민│진짜 연기가 살아있는 영화들
5. <나의 왼발>(My Left Foot: The Story Of Christy Brown)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
1989년 │ 짐 쉐리단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말이 필요 없는 배우죠. 최근작인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도 좋았고, 다소 상업적인 영화였던 <라스트 모히칸>에서도 좋았아요. 그래도 최고는 <나의 왼발>에서였던 거 같아요. <라스트 모히칸>이 흥행 면에서는 성공했지만, 같은 배우로서 그 영화에선 그가 아쉬움이 많이 남았을 거란 느낌이 들어요. 사실 배우는 흥행보다는 내가 작품에서 무엇을 보여줬냐가 더 중요하거든요. <라스트 모히칸>에선 호크아이를 다른 배우가 연기를 한다 해도 상상이 가는데, <나의 왼발>에선 그렇게 안 되거든요.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크리스티 브라운을 연기하는 건 상상할 수 없죠.”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필모그래피는 무엇 하나 허투루 지나칠 수 없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갱스 오브 뉴욕>으로 각각 그 해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나의 왼발>,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오스카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뇌성마비라는 짐을 평생 안고 살았던 크리스티 브라운은 화가이자 작가이자 생의 화신이었다. 뒤틀린 몸, 찡그린 얼굴로 누구보다 당당한 삶을 살고, 아름다운 것들을 남겼던 아티스트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로 인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실존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과 사랑에 빠지는 정신병을 앓는다”



김명민│진짜 연기가 살아있는 영화들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에서 김명민은 루게릭병에 걸린 백종우가 되기 위해 25kg을 감량했다. “사실 제가 이 영화를 하게 될 거라고 생각 못했어요.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매일 죽는 악몽을 꿀 정도로 도망 다녔죠. 주인공이 죽는 순서대로 똑같이 배우도 죽어 가는데, 그걸 누가 하겠어요?” 그러나 이 완벽주의자의 승부욕은 발휘되었고, 곧 백종우와 지독한 사랑에 빠졌다. “작품 하는 동안, 전 정신병을 앓아요. 실존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과 사랑에 빠지니까요. 그 인물을 사랑하지 않으면 제가 표현을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작품을 끝내고 역할에서 빠져나오는데 남들보다 세 배는 더 힘들어요.”

영화 속 백종우와 이별하는 순간에 “내 살이 찢어지는” 괴로움을 느꼈던 김명민은 아직 몸도, 마음도 백종우에게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이기적이게도 이번에는 다시 김명민을 찾고 다른 인물로 넘어가는 시간이 너무 길지 않길 바란다. 그래서 장준혁이 강마에로 변신하는 것을 지켜본 즐거움을 어서 느낄 수 있게 해주길, 그의 푸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그는 김명민이니까. 그저 이 지독한 연기의 구도자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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