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노규민 기자]
영화 ‘우상’에서 정치인 구명회 역할을 맡은 배우 한석규./ 사진제공=딜라이트
영화 ‘우상’에서 정치인 구명회 역할을 맡은 배우 한석규./ 사진제공=딜라이트
커피 광고에서처럼 마냥 부드럽고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처럼 따뜻할 것만 같은 배우 한석규가 세상에서 가장 비겁하고 추악한 정치인으로 돌아왔다. 아들의 뺑소니 사고로 정치 인생 최악의 위기를 맞게 된 남자와 목숨 같은 아들이 죽은 후 진실을 쫓는 아버지, 그리고 사건 당일의 비밀을 간직한 채 사라진 여자까지, 그들이 맹목적으로 지키고 싶어 했던 참혹한 진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 ‘우상’(20일 개봉)에서다. 오로지 “비겁한 인물을 연기하고 싶었다”는 한석규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10. ‘우상’에 출연한 이유는?
한석규: 시나리오가 가진 힘에 반응했다.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1997) 이후 최고의 책이라고 생각했다. 은유가 많았기 때문에 내가 느끼기에도 꽤 어려웠다. 반면 워낙 치밀했다. 마치 허상을 좇는 형사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독전’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예전에 출연했던 ‘구타유발자’를 봤을 때의 강렬함도 느껴졌다. 글로 보는데도 강렬했다. 글에 반응했다는 것은 무언가를 공감했다는 뜻일 것이다. 내가 느낀 감정을 배우로서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10. 자신이 연기한 구명회는 어떤 인물인가?
한석규: 도지사 출마를 앞둔 상황에 아들이 일으킨 교통사고로 위기를 맞게 된 도의원이다. 한의사 출신으로 스타 정치인이며 신사적이고 사람 냄새나는 사람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냉철하고 잔인한 본성을 드러낸다. 극 초반 지하실 문을 여는 순간부터 영화의 끝까지 구명회는 건강하지 못한 반응을 보인다. 살아남기 위해 미친 듯이 반응하는데 이건 병자의 반응이다. 이처럼 비겁한 인물을 연기하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는 비겁하고 지질하고 치졸하고 더러운 사람 말이다. 구명회란 인물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10. 이수진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한석규: 나는 신인 감독을 선호한다. 유독 신인 감독들과의 작업이 많다. 나도 그랬지만 신인 때는 치열하게 전부를 다 건다. 그런 것이 신인 감독의 장점이다. 이 감독은 전작 ‘한공주’로 극찬을 받았다. 조금 더 쉽게 갈 수 있었는데도 안주하지 않고 이토록 어려운 이야기에 도전했다. 그게 좋았다. 무엇보다 ‘우상’은 지금 이 사회에서 해야 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새롭지 않지만 새롭게 느껴지는 점에 끌렸다.

10. 이 감독 영화에 또 캐스팅되면 흔쾌히 출연할 건가?
한석규: 지금까지 영화를 하면서 감독에게 ‘나중에 다시 한번 해보자’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감독만큼은 달랐다. 함께 하고 싶다. 그러니 제발 많은 작품을 하길 바란다. ‘한공주’ 이후 ‘우상’을 내놓기까지 5년 걸렸단다. 이런 식이면 앞으로 몇 편이나 찍을 수 있을까? 한편 찍고 오래 쉬는 감독들이 많다. 더 자주 작품을 했으면 좋겠다.

10. 영화가 어렵다는 평이 많다. 자신도 시나리오를 봤을 때 어려웠다고 했다. 연기를 해야 하는데 거부감은 없었나?
한석규: 새로운 한국 영화를 하고 싶었다. 텔레비전 출연도 하고 성우도 잠깐 했지만, 출발은 영화다. 10대 시절 연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연기하면서 가졌던 꿈은 새로움이었다. 영화든 연기든 새로운 것들을 계속 생각했다. 물론 현재까지도 뭐가 새로운지, 어떤 이야기와 연기가 새로울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사실 ‘우상’은 퍼즐처럼 어렵지 않다. 세 인물 중 한 명을 집중적으로 쫓다 보면 영화를 알 수 있다. 한 인물을 따라가면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다.

배우 한석규는 “영화 ‘우상’ 시나리오는 ‘초록물고기’ 이후 최고였다”고 밝혔다./ 사진제공=딜라이트
배우 한석규는 “영화 ‘우상’ 시나리오는 ‘초록물고기’ 이후 최고였다”고 밝혔다./ 사진제공=딜라이트
10. 관객들은 한석규와 설경구의 만남만으로도 기대를 가진다. 함께 연기해보니 어떻던가?
한석규: 설경구는 나이를 떠나서 친구나 다름없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나이가 어려도 자신보다 학문이 월등하면 친구로 지내지 않았나. 설경구도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친구다. 나는 작품에 몰입할 때 발광을 꽤 많이 하는데, 그도 발광을 꽤 하더라. 누가 봐도 꽤 많은 고민을 한 것처럼 보인다.

10. 천우희는 영화에서 파격 자체다. 어려운 연기를 해냈다. 어떤 배우인 것 같나?
한석규: 천우희가 언론시사회 때 이야기한 것처럼 이 감독이 ‘가장 완벽한 연변 사투리 연기’를 원했다. 배우에겐 굉장히 힘든 부탁이다. 조금만 더 가면 중국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그럴 거면 중국인을 캐스팅하지. (웃음) 배우 관점에서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다. 시나리오를 보고 한숨부터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점잖은 표현으로 ‘한계가 느껴졌다’라고 했는데 진솔한 표현이다. 정말 그랬을 것 같다. 극 중 련화는 자칫 잘못하면 배우의 밑천이 다 드러나는 역할이다. 천우희는 그걸 도전했다.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현장에서 봤을 때 배우로서 장점이 아주 많은 아이라고 느꼈다. 100년 후에 보면 나나 설경구, 천우희 모두 2000년대 같이 활동한 동시대 배우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우희는 한국 영화에서 아주 괜찮은 여배우다. 탄생이란 말은 이상하고 완성된 배우다.

10. 이순신 장군 동상의 목이 잘리는 장면이 충격적이다. 논란이 되진 않을까?
한석규: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장면이지만 당연히 후손들에게 허락을 받았다. 이수진 감독이 왜 하필 이순신 동상을 선택했을까? 옆에 세종대왕도 계시고 다른 곳에도 동상이 많다. 이순신 장군을 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장면의 의미를 관객들이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10. 강렬한 엔딩도 인상적이다. 어떻게 연기했나?
한석규: 준비된 대사가 아니었다. 모두 애드리브였다. 예전에 히틀러가 연설하는 모습이 담긴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아주 강렬했다. 조심스럽지만, 히틀러를 생각하며 연기했다. 후시녹음 때 이 감독이 개 짖는 소리를 주문하기도 했다. 구명회가 내는 개소리를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웃음)

10. 어떤 것에 반응해 배우가 됐나?
한석규: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께서 날 극장에 데리고 다녔다. 여섯 살 때부터였던 것 같다. ‘별들의 고향’ ‘혹성탈출’ 등도 어머니와 함께 극장에서 봤다.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열여섯살 때 윤복희 선생님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공연을 보고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인생은 이렇게 반응의 연속인 것 같다.

열여섯살 때 윤복희의 공연을 보고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한석규./ 사진제공=딜라이트
열여섯살 때 윤복희의 공연을 보고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한석규./ 사진제공=딜라이트
10. 1990년부터 29년째 연기를 하고 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나?
한석규: 과거에는 액션(연기하는 것)이 중요한 줄 알았는데 요즘에는 리액션(반응)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인생도 리액션을 하며 산다는 걸 알게 됐다. 최근 내 연기를 보면 웃는 모습이 많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도 아들이 죽었을 때 웃음으로 세종의 슬픔을 표현했다. 괜히 웃은 게 아니었다. 웃음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질 않나? 슬픔, 기쁨 등 다양한 감정이 섞여 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어르신들도 많이 웃더라. 나도 죽을 때까지 많이 웃을 것 같다.

10. 하반기에 개봉하는 영화 ‘천문’에서 최민식과 호흡을 맞췄다. 드라마 ‘서울의 달’, 영화 ‘넘버3’ ‘쉬리’ 등 1990년대에 찰떡같은 호흡을 자랑했다. 오랜만에 만나니 어땠나?
한석규: 1998년에 개봉한 ‘쉬리’ 이후 굉장히 오랜만에 한 작품에서 만났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었겠나. 하지만 둘이 만나면 별 얘기는 없다. 그저 웃고 떠든다. 보는 사람들이 재미있었을 것이다. 하하. 민식이 형이랑 오랜만에 영화를 했다. 너무 좋았다. 나랑 인연이 오래된 사람이다. 35년이나 됐다. 이제는 존중을 넘어 서로 존경한다. 어떤 마음으로 연기를 하는지 알고, 같은 직업인으로서 존경하는 동료 겸 연기자 겸 선배다.

10. 두 사람은 스타일이 극과 극인 것처럼 보이는데, 현실에서는 잘 맞나보다.
한석규: 대학 시절 연극 스태프로 참여할 때부터 드라마, 영화까지 네다섯 작품을 함께 했다. 나도 느꼈지만 나와 민식이 형은 성향이 완전히 다르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더 알겠더라. 같은 액션이 들어와도 완전히 반응이 틀리다. 그런 두 사람이 함께 연기하니 오히려 더 재미있고 좋았다. (웃음) 깍듯하게 대하고 싶은 사람이다. 나한테 많은 영향을 줬다.

10. 관객은 ‘한석규’라는 이름 자체만으로 기대한다. 그래서 다음 작품에 관심이 많다.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뭔가? 혹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나?
한석규: 주제가 별로면 끌리지 않는다. 캐릭터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늘 그렇다. 한 작품 안에서 변신? 그런 것이 그렇게 큰 매력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앞으로도 오래 연기할 텐데 한 작품 안에서 변신을 해봐야 얼마나 하겠나. 하하. 지금까지 영화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렇게 자연스레 여러 인물을 연기했다. 착한 사람, 나쁜 사람 다했다. 할 때마다 캐릭터의 변화보다 진폭이 넓으면 좋다고 생각했다. 구명회는 그런 인물이라 좋았다.

10. 데뷔한 지 30년이 다 돼 간다.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건 뭔가?
한석규: 때론 지치고 의미를 잃어버릴 때가 있다. 그때마다 반성하고 좌절하면서 다시 의미를 되찾으려 했다. 상대 배우들과 함께하며 얻는 반응, 새로운 현장에서 얻는 반응들. 이 무수히 많은 반응이 나를 살아 움직이게 했다. 반응 작용만큼이나 중요한 건 초심이다. 연륜이 있고 경력이 생긴다 해서 완성도가 좋아지는 게 아니다. 불교에서는 ‘초발심이 깨달음’이란 말이 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숱한 고행을 하지만, 이미 처음부터 깨달음을 얻었단 뜻이다. 그만큼 초심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 또한 연기하기 위한 본능이 있고, 좋은 재료들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퇴화하지 않게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노규민 기자 pressgm@ten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