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노규민 기자]
영화 ‘우상’에서 목숨 같이 소중한 아들이 죽은 후 진실을 쫓는 아버지 유중식을 연기한 배우 설경구./ 사진제공=딜라이트
영화 ‘우상’에서 목숨 같이 소중한 아들이 죽은 후 진실을 쫓는 아버지 유중식을 연기한 배우 설경구./ 사진제공=딜라이트
영화 ‘불한당'(2017년) 이후 ‘지천명(知天命) 아이돌’이라는 별명을 얻은 배우 설경구가 노랑 머리로 변신했다. 행색도 지저분하고 행동도 어리숙하다. 아이돌급 팬덤을 자랑하는데도 이미지 따윈 생각하지 않았다.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해 온몸으로 절절한 부성애를 그려냈다. 아들의 뺑소니 사고로 정치 인생 최악의 위기를 맞게 된 남자와 목숨 같은 아들이 죽은 후 진실을 쫓는 아버지, 그리고 사건 당일의 비밀을 간직한 채 사라진 여자까지, 그들이 맹목적으로 지키고 싶어 했던 참혹한 진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 ‘우상’에서다. 한석규, 천우희 등 연기파 배우들과 폭발적인 시너지를 발휘한 설경구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10. 출연을 결정한 이유는?
설경구: 이 감독의 전작 ‘한공주’를 인상 깊게 봤다. 또 한석규 선배가 이미 캐스팅돼 있었다. 한석규 선배와 연기 해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왔다. 안 할 이유가 없었다.

10. 맨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
설경구: 집요함이 느껴졌다. 촘촘하면서도 강렬했다. 모든 캐릭터가 다 좋았는데 특히 련화(천우희)는 괴물 같았다. 시나리오를 다 읽고 나서 멍하게 앉아 있었다.

10. 이 감독 작품은 처음인데 직접 출연해보니 어땠나?
설경구: 이 감독은 근래에 보기 드문 집요함을 가지고 있다. 요즘에는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돼 있어서 쉽지 않았을 텐데도 집요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감독을 들이받으려고 한 적도 있다. 촬영을 끝낸 뒤 술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들이받을 뻔했는데, 한석규 선배가 ‘경구야, 하지 마라’고 말렸다. 첫 촬영 날 정신없이 차를 몰고 병원으로 가는 뒷모습을 롱테이크로 찍었다. 새벽부터 찍었는데 그 장면만 스무 번 넘게 찍은 것 같다. 그때 ‘아, 이런 감독이구나’ 싶었다. (웃음) 물론 이수진 감독과 또 작업하고 싶다. 좀 더 합리적인 방법으로 서로의 리듬으로 호흡을 맞추면서 다시 한번 작업하고 싶다.

10. 개봉을 앞두고 있다. 관객들 반응은 어떨 것 같나?
설경구: 베를린영화제에서 완성판을 처음 봤는데 영화를 보고 난 뒤 호불호가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끼리 ‘모든 관객이 다 좋아할 영화는 아닌 것 같다’는 말을 했다.

10. 영화가 어렵다는 평가가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설경구: 처음에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느낌만 볼 겸 가볍게 읽으려고 했다. 그런데 ‘우상’은 그렇게 읽어서는 모르겠더라. 시나리오를 독파하고 촬영까지 마친 나는 어렵지 않다. 언론 시사회를 마치고 관객들에게 반응을 물어봤더니 예상대로 어렵다고 했다. 사실 쉽게 접근하면 쉽다. 사건을 쫓아가지 말고 인물을 따라가면 좋겠다. 세 명의 인물이 각각 각자의 길을 가기 때문에 셋 중 하나를 선택해서 따라가면 좋을 것 같다. 일단 세 번을 보고, 전체적으로 한 번 더 보면 어떨까? (웃음)

영화 ‘우상’의 설경구는 “한석규 선배와 연기 해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왔다. 안 할 이유가 없었다”고 밝혔다./ 사진=딜라이트
영화 ‘우상’의 설경구는 “한석규 선배와 연기 해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왔다. 안 할 이유가 없었다”고 밝혔다./ 사진=딜라이트
10. 자신이 연기한 유중식은 어떤 캐릭터인가?
설경구: 대사가 별로 없다. (웃음) 액션보다 리액션이 많은 역할이다. 아들이 죽은 후에 처음 등장하는데, 감정이 절정인 상태로 연기를 시작해야 했다. 대부분 장면이 그랬다. 서서히 올리는 게 아니라 헐떡거리면서 시작했다. 워밍업 자체가 없는 캐릭터다.

10. 연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했나?
설경구: 계산을 하지 않았다. 일단 ‘해볼게요’ 하고 연기했다. 수위는 감독님께 맡겼다. ‘좀 더 갑시다’ 하면 했고, 내가 무턱대고 막 하지는 않았다. 과하다 싶으면 감독님이 알아서 걸러냈다.

10. 유중식은 일반 어른들보다 뭔가 어리숙한 면도 있다. 설정한 건가?
설경구: 그렇다. 감정적인 면에서 계산된 연기는 하지 않았지만, 캐릭터는 설정했다. 아들은 어른이 됐지만 네다섯 살 지능에 멈춰 있다. 늘 함께하고 끔찍이 아낀 만큼 중식 안에 아들의 모습이 있을 거라고 설정했다. 소리를 지른다고 지르지만 아들 목소리처럼 나온다. 또 여러 행동에서 아들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극 초반 아들 시신을 확인하고 부정하며 소리치는 장면에서도, 보통의 어른과 달리 무서워서 뒷걸음치는 아이처럼 표현했다. 아들과 함께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젖어 든 습관들이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10. 언론시사회 이후 기자간담회에서 ‘부족함을 느꼈다’라고 했다. 어떤 면에서 그렇게 느꼈나?
설경구: 작품마다 계산도 필요하고, 수위 조절도 해야겠다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있는 그대로 접근해 연기했는데 뭔가 극대화시킬 방법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작품에서도 계산된 연기를 하지 않았는데 분명 다른 방향도 있겠다는 걸 알았다. 우러나오는 대로 하는 게 있고, 만드는 게 있는데 보는 입장에서 다를 수 있겠다 싶었다. 사실 ‘불한당’을 마치면서 들었던 생각인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10. 대사가 잘 안 들린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설경구: 구시렁구시렁 목소리 전달이 안 되는 부분이 있긴 하다. 중식과 련화 대사가 그런 거 같다. 한석규 선배 발음이 워낙 좋아서 천우희와 내가 손해 보는 것 같다. (웃음)

10. 한석규와 처음으로 호흡을 맞췄다. 어땠나?
설경구: 영화 촬영 현장은 예민하다. 늘 유(柔)하지만은 않다. 그럴 때마다 한석규 선배가 현장을 편안하게 만들어 줬다. ‘한석규’는 전체를 보는 배우다. 모든 면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선배였다. 안정감을 위해 달리는 사람이다. 작품의 특성상 극 중에서 석규 선배와 많이 부딪히지 않는다. 그런 면에선 아쉽다.

10. 천우희와는 어땠나?
설경구: 천우희는 힘든 캐릭터를 맡았다. 그런데도 늘 히죽히죽 잘 웃었다. 왜 웃느냐고 했더니 ‘웃지 뭐해요? 화내요?’라고 하더라. 난 그렇게 못한다. 그런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영화 ‘우상’의 설경구는 “작품마다 계산도 필요하고, 수위조절도 해야겠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사진제공=딜라이트
영화 ‘우상’의 설경구는 “작품마다 계산도 필요하고, 수위조절도 해야겠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사진제공=딜라이트
10. ‘노랑머리’가 화제가 됐다. 감독이 제안했을 때 흔쾌히 하겠다고 했나?
설경구: 난 새로워서 좋았다. 유중식을 표현하기 위해 아들 유부남과 같은 탈색 머리를 해야 했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땐 기쁜 마음으로 했다. 하지만 6개월 동안 탈색을 지속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검은 머리가 보이면 다 다시 해야 했다. 2주마다 한 번씩 한 것 같다. 나중엔 머리카락이 다 부서질 정도였다.

10. 영화 ‘불한당’ 이후 ‘지천명 아이돌’이라는 수식어를 얻는 등 많은 열성 팬을 보유하고 있다. 팬들이 노랑머리에 실망할까 봐 우려하진 않았나?
설경구: 나는 아이돌이 아니다. 하하. 나를 좋아해 주는 팬들은 그저 좋은 친구들과 같다. 다시 말해 나를 언제나 응원해주는 ‘같은 편 친구들’이다. 어쨌든 ‘불한당’에서 이미지를 겨우 펴놨는데 다시 구겨진 것 같아 죄송하다. (웃음) 예쁘게 봐 주실 거라고 믿는다.

10. 관객들에게 ‘연기 잘하는 배우’로 통한다. 25년 넘게 연기를 하는 시점에서 자신을 평가한다면?
설경구: 아직 멀었다. 작품마다 다르긴 하지만 완성된 모습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연기는 예술이 아니다. 그래서 100% 완성된 캐릭터를 보여 줄 수 없다. 간극을 조금씩 좁혀가는 게 배우라고 생각한다. 정답이 없다. 한 캐릭터를 여러 배우가 하면 다 다르다.

10. 지금까지 함께했던 배우 중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춰보고 싶은 사람은?
설경구: 갑자기 왜 문소리가 떠오르지? 하하. 문소리는 너무 많이 했다. ‘감시자들’을 함께했던 정우성, 한효주? 정우성과도 많이 부딪히지 않았다. 아쉬움이 남아있다.

10. 1968년생(만 51세)이다. 동안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다면?
설경구: 내가 동안은 아니다. ‘박하사탕’ 때 30대 초반이었는데 사람들은 40대로 봤다. 그때 노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다시 보면 굉장히 젊은데. (웃음) 줄넘기를 꾸준히 하고 있다. 촬영 전에 숙소에서 늘 하고 나간다.

10. 50대가 되면서 달라진 생각이 있나?
설경구: 지금 연기를 하는 게 ‘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복이 많다. 쉬운 일이 아니다. 계속 기회를 주신다면 더 겸손하고 당당하게 하고 싶다.

10. 자신에게 우상은 무엇인가?
설경구: ‘우상’이라는 단어에는 숭배라는 느낌이 있어서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극 중 유중식만큼 살면서 집착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다만 연기에는 집착했다. 배우는 작품에서 잘 표현되고 싶어 하고 작품을 잘 만들고 싶어 하지 않나? 그 정도는 집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노규민 기자 pressgm@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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