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식 평론가가 추천하는 이 작품]
수많은 관객에게 사랑 받는 대작부터 소수의 관객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 숨은 명작까지 영화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텐아시아가 '영화탐구'를 통해 영화평론가의 날카롭고 깊이 있는 시선으로 우리 삶을 관통하는 다채로운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박태식 평론가가 이번에 소개할 영화는 '맹크'입니다.
'맹크' 는 냉소적이고 신랄한 사회 비평가이자 알코올 중독자인 시나리오 작가 허먼 J. 맹키위츠가 훗날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 '시민 케인'의 시나리오를 집필하는 과정을 통해 1930년대의 할리우드를 재조명하는 이야기로, 흑백영화로 제작됐습니다.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아이러니하게도 그 속에 피어난 할리우드 황금기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영화 '맹크' 포스터 / 사진제공=넷플릭스
영화 '맹크' 포스터 / 사진제공=넷플릭스
영화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한번쯤 들어보았을 법한 작품이 있다. 미국 영화계에서 전설로 통하는 배우이자 감독이며 제작자인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1941)이다. 미국에선 요즘도 할리우드 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종종 거론되곤 한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점은 당대 최고 부자로 영화계와 언론계와 정치계를 좌지우지했던 신문왕 W.R. 허스트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그는 캘리포니아 해변 언덕에 유럽의 고성을 통째로 옮겨다 놓은 대단한 배포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맹크'(Mank, 감독 데이빗 핀처)는 '시민 케인'의 시나리오 작가 맹키위츠의 인물 됨됨이를 그린 영화로 그가 어떻게 허스트를 풍자했는지 잘 드러난다.

허먼 J. 맹키위츠, 일명 맹크(게리 올드만)는 뉴욕 극장가의 저명한 비평가이며 시나리오 작가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 날카로운 입담으로 상대를 난처하게 만들고 하루 중 대부분을 술에 취해 산다. 실제로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은 전력까지 있다. 맹크의 탁월한 재능을 인정한 오손 웰즈(톰 버크)는 그에게 시나리오를 써달라는 부탁을 했고, 더불어 시나리오 작가명단에서 자기이름을 빼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후에 맹크는 약속을 어겨 자기이름을 영화 엔딩에 올려 1942년 아카데미 각본상은 맹케위츠와 오손 웰즈가 공동수상했다.) 이어서 관객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영화 '맹크' 스틸 / 사진제공=넷플릭스
영화 '맹크' 스틸 / 사진제공=넷플릭스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돌아가던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을 우선 알아야 한다. 대공황 여파에 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경기가 극도로 나빠졌고 그에 따라 정치판도 어지러워졌다. 영화계에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 출현했으며 곳곳에서 노조가 결성됐다. 그 모든 과정에 할리우드가 어떻게 개입되어 있었는지, MGM 영화사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던 메이어(알리스 하워드)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허스트의 나이 어린 애인이었던 배우 메리언(아만다 사이프리드)이 어떤 인물인지 등등 점검해야할 사항이 많이 있다. 다시 말해 영화를 보기 전에 허먼 J. 맹키위츠라는 인물과 시대배경에 대해 알지 못하면 상영 내내 하품이 나올 것이다. 홍보문구에서 "명작 '시민 케인'의 시나리오를 집필하는 과정을 통해 1930년대의 할리우드를 재조명하는 영화"라 했는데, 이 문구만 읽어도 하품이 나올 지경이다.

이런 저런 정황을 고려할 때 '맹크'는 미국에서도 아마 과거를 그리워하는 기성세대나 좋아할 법한 영화겠다. 그럼에도 영화를 소개하는 이유는 맹크의 신랄하고 통쾌한 비판정신이 맘에 들어서다. 한마디로 그는 거칠게 없는 사람이다. 기인으로 손꼽혔던 오손 웰즈마저 한달음에 시나리오 집필 장소로 출동했을 정도다.

영화에서 가장 멋있는 대목은 허스트(찰스 댄스)와 메이어가 주빈으로 자리한 큰 식사테이블에서 맹크가 난동(?)을 부리는 장면이었다. 속이 다 시원할 정도였다. 미국 대통령 T. 제퍼슨이 남긴 말처럼 "이성이 자유로운 상태라면 진실은 오류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다.
영화 '맹크' 스틸 / 사진제공=넷플릭스
영화 '맹크' 스틸 / 사진제공=넷플릭스
'맹크'는 독특한 영화다. 1930~1940년대를 현대로 가져온 듯 전체를 흑백으로 찍었고 인물들 사이의 갈등 묘사가 섬세하고도 집요하게 이어졌다. 플래시백을 사용해 과거와 현재를 부지런히 오가는 모습도 그렇고 말이다. 마치 '시민 케인'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또한 실존 인물들이 등장할 때는 나의 영화지식과 맞춰보는 재미도 넘쳐났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제작자 데이빗 O. 셀즈닉을 비롯해 존 베리모어와 인기 최고의 아역배우였던 셜리 템플까지 잠시 등장한다. 그리고 '작가협회'의 탄생과 각본을 짜기 위해 여러 작가들이 협업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오늘날 영화 산업이 어떻게 이리 번성할 수 있었는지 그 시작 지점을 방문한 느낌이었다.

맹크는 독설가에 술주정뱅이지만 대단한 천재다. 그리고 겉모습과 다르게 세상과 인간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다. 오갈 데 없는 노숙자 신세로 전락한 단역배우에게 돈을 건네는 모습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처음부터 맹크를 속물 취급하며 업신여겼던 타이피스트 리타(릴리 콜린스)가 그의 진실한 모습을 발견할 때까지 어떤 혼란을 겪는지도 흥미롭게 관찰할 대목이다. 후반으로 나아가면서 그녀는 맹크라는 인물을 이해하고 그의 인간됨에 점점 빠져드는 경험을 한다.
영화 '맹크' 스틸 / 사진제공=넷플릭스
영화 '맹크' 스틸 / 사진제공=넷플릭스
어느 일간지에 실린 '맹크'의 평을 읽어보았다. 그랬더니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 '시민 케인'이 탄생하던 시절로 돌아가 영화산업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나름 받아들일만한 해석이었다. 하지만 내 입장과는 많이 다르다. 허먼 J. 맹키위츠라는 독특한 인물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그를 보면서 할리우드가 오늘날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가 '맹크'의 목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영화와 TV 드라마를 오가며 걸작을 만들어낸 데이빗 핀처 감독이 썩 괜찮은 인물영화 한편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기는 평자가 다르니 평도 달라지는 게 당연한 이치일터다. 아니면 혹 내가 영화를 오해한 것일까?

인간은 욕망에 굴복하기 쉽고 한 번 굴복하면 자신이 저지르는 악덕도 쉽게 합리화하기 마련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모든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지만 고귀한 일에서 오는 쾌락과 추악한 일에서 생기는 쾌락은 종류가 엄연히 다른 법이다. 그렇다면 평생 추악한 일에 손을 담갔던 사람이라도 죽을 때가 다가오면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할까? 마치 시민 케인이 숨을 거두기 직전 썰매를 떠올린 것처럼 말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박태식(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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