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고은│내가 아직도 은교로 보이세요?
김고은│내가 아직도 은교로 보이세요?
소파 밑으로 숨어버린 퍼즐 조각이라도 찾아낼 듯, 정지우 감독은 눈이 밝다. 그래서 그가 이름을 붙인 낯선 얼굴들은 온전히 극중의 인물로 첫인상을 남기고는 한다. 의 주진모가 그랬고, 의 이태성이 그랬듯이 의 김고은 역시 마찬가지다. 데님 셔츠를 걸치고 운동화를 신은 채 스튜디오로 들어와 꾸벅 인사를 건넬 때, 포즈를 취하다가 발에 큰 하이힐이 비틀거리자 신발을 벗어버리고는 풀썩 맨발을 뻗어 앉아 버릴 때, 망설임 없는 그녀의 행동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것은 거기 은교가 있기 때문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당겨진 입매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리고, 새하얀 팔꿈치에서는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진다. 연필에서 슬픔을 느끼는 노시인이 아니라도 그녀에게서 공감각적인 에너지를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낮잠에 빠진 얼굴, 유리창을 닦는 손길에서 구만리의 청춘을 되짚는 노시인을 조금 이해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까지 한다. 하지만 김고은이 진짜 눈을 휘둥그렇게 만드는 순간은 그녀가 은교의 천진난만한 얼굴 아래에서 배우의 눈빛을 번쩍, 빛낼 때다. “지금 저에게 쏟아지는 관심과 호응은, 이 시기만 지나면 될 것 같아요. 은교가 참 순수하고 이쁘고 맑고 밝고 그렇기 때문에 제가 유지해야 하는 모습이 분명히 있는 걸 알아요. 하지만 다음, 그다음 작품을 이어 갔을 때는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라고 스물둘의 그녀가 말할 때, 투명한 은교의 유리창은 보기 좋게 깨어져 버리는 것이다.
김고은│내가 아직도 은교로 보이세요?
김고은│내가 아직도 은교로 보이세요?
완전한 은교가 아니면서 완벽한 은교를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김고은이 자신의 여고생 시절을 어디론가 흘려보내지 않은 덕분이었다. 연기를 가르치면서도 유난히 교외 활동에 엄격했던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을 거치면서 그녀는 그 시절을 “다행스러운” 제약이라고 추억한다. “고이는 것이 있어야 쏟아낼 것이 있을 것”이라는 그녀의 믿음처럼 오디션을 보고, 회사를 찾느라 다치거나 닳아지지 않은 그녀의 십대가 결국 은교의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보는 법조차 몰랐지만 얼굴이 예쁘게 나오는 각도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감정 하나하나를 이해하려고 몰입한 열정 역시도 오랫동안 고여 있던 만큼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연스럽고 당연한 이유로 김고은은 스타를 꿈꾸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쁘고 인기 많은 여배우가 되면 평소에도 자신을 관리해야 하잖아요. 저는 그렇게 못할 것 같아요. 매 순간 스타로서의 연기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 정작 연기를 할 때 쏟아낼 게 남아있지 않을 것 같거든요.” 진지하게 속마음을 털어놓더니, 찡긋 웃는 얼굴에는 다시 장난스러움이 번진다. 굳은 살 없는 그 마음이 그래서 더 다치고 닳을까 걱정스럽다면, 비극의 시나리오는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제가 눈치는 빠른데, 눈치를 안봐요. 신경 쓰기 시작하면 소심해져 버리니까요”라고 까르르 웃는 이 대책 없는 여배우에게 오랫동안 관객들은 속수무책 의심보다는 지지와 기대를 던지게 될 것 같으니까 말이다.
김고은│내가 아직도 은교로 보이세요?
김고은│내가 아직도 은교로 보이세요?
My name is 김고은. 한글 이름이고, 부모님이 직접 지어 주신 이름이다. 고등학생 때는 나중에 배우가 된다면 예명을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봤는데, 달리 다른 이름이 없더라. 아, 친구들이 장난으로 ‘곤붕’을 이름으로 추천해 준 적은 있다. 장자에 나오는 큰 새 이름이라던데 “안녕하세요, 곤붕이예요!”하고 인사하는 거다. 히히힛.
1991년 7월 2일생. 벌써 스물둘이지만 하이힐은 아직 힘들다. 제작발표회에 참석하면 구두를 신고 무대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 순간이 제일 긴장될 정도다. 그래서 요즘 발이 좀 미워졌다. 발가락에 밴드도 다 붙이고.
오빠가 하나 있는데 정말 사이가 좋다. 친구들과는 좀 다른 스타일로 장난을 치게 되는 것 같다. 좀 색다르게 괴롭힌달까. 그러다가도 싸우면 또 죽일 듯이 싸우는데, 금방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정하게 지낸다. 오빠가 처음에는 를 안보겠다고 했었는데, 며칠 전에는 여자친구랑 같이 보겠다고 하더라. 오빠 여자친구가 나랑도 굉장히 친한데 영화를 찍기 전부터 엄청 걱정을 해 줬거든. 그래서 언니가 아마 보자고 한 것 같다.
엄마, 아빠는 시사회 후에도 를 개인적으로 재관람 하신 걸로 안다. 특히 아빠는 점점 작품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는 얘기를 하시더라. 세 번 정도 보셨는데, 볼 때마다 달라진다고 하셨다.
원래 아빠가 영화를 좋아하셔서 같이 영화를 보고는 했다. 어렸을 때 한동안 중국에서 살았는데, 그때 집 한쪽 벽면에 DVD장이 있을 정도였다. 을 보던 날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중간에 야한 장면이 나오니까 아빠가 내 눈을 가리고 빨리 감기를 하면서 “힘든 사랑을 했어. 이제 됐어. 봐”하고 대강 설명을 해 주셨다. 으하하하하하. 그러다가 내가 조니까 “야. 지금이 중요해! 배가 갈라지잖아. 안 슬프니?” 하면서 막 깨우시고. 워낙 명작이라고 좋아하셔서 나중에 몇 번이나 다시 봤었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광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계원예고에 진학을 했는데, 학교에서 연예 활동을 전면 금지하는 덕분에 교내 활동을 열심히 할 수 있었다. 아이들끼리 연극을 올리고 세트를 만들던 기억은 정말 소중하다. 이후에 한예종에 가면서 또 2년 동안 외부 활동이 금지되었는데, 그래서 에 출연하기 전까지 달리 오디션을 보거나 한 적은 없다.
영화에 캐스팅 되기도 전에 소설 를 재미있게 읽었는데, 은교는 대체 어떤 아이인가 인물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게 되는 작품이었다. 게다가 늙어도 청춘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고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원작의 주제 자체가 나에게는 정말 새로운 이야기라서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몰랐지. 나는 몸도 마음도 다 같이 늙는 건 줄로만 알았으니까.
은교를 연기할 때는 마음을 그렇게 먹어버리니까 실생활에서도 여고생처럼 행동하게 되더라. 친구들을 만나도 “헐, 진짜? 대애애박!” 하고 은교 말투를 쓰게 되어서 애들이 적응을 못했었다. 특히 은교 특유의 애교 때문에 주변에서 많이 힘들어 했다. 원작과 시나리오에 은교가 “앙녕하세요”하고 인사하거나 “할아부지”하고 부르는 부분이 있는데 그런 건 그냥 어린 말투가 아니라 몸에 배어 있는 애교라고 생각했었다.
겉으로는 철없는 소녀이면서도 은교가 이적요를 이해할 수 있는 건 그냥, 그 아이가 받은 상처들 때문에 다른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원치 않는 마음일수도 있지만 상처를 받으면서 마음이 깊어지고 넓어지고 다른 사람의 상처를 듣고 싶어진 거지. 자신도 알지 못한 성숙이 일어난 거다. 그리고 외면과 내면이 똑같은 사람은 없지 않나.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니까.
를 찍으면서 (박)해일 오빠가 늘 “넌 이제 두 작품 쯤 한 것 같을 거야. 웬만한 건 이제 거뜬히? 응?”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솔직히 나는 아직 경험이 없어서 완벽하게 그 뜻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분명히 다른 작품에 대한 두려움은 덜해졌다. 워낙 감정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한계를 계속 경험했거든. 이 나이에 그런 한계와 절망을 겪어볼 일이 없지 않나. 그런데 작품을 하면서는 계속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었고, 책임감이랄지 후회하기 싫은 간절함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이제는 한계를 한계로 직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성숙해 진 것 같다. 더 큰 한계가 올수도 있고, 집중에 따라 한계가 줄어들 수도 있다는 걸 아는 거지. 그래서 나에게 “좀 더 할 수 있어. 아직 아니야”라고 말 할 수 있는 그런 거.
사실 촬영을 하면서 진짜 큰 한계는 추위와 싸우는 거였다. 영화에서는 반팔에 반바지를 입는 여름이지만, 촬영은 겨울 내내 한 거라서 정말 고생했다. 늘 초콜릿을 갖고 다니면서 먹었고, 몸이 막 떨리는 걸 참고 연기해야 했다. 나중에는 슛 들어가기 전에 몸을 일부러 막 떨고 숨을 크게 내쉰 다음에 대사를 하면서 호흡을 지키는 노하우가 생기더라니까. 으히히히힛.

글. 윤희성 nine@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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