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전>은 영화 속 대사처럼 “빨갱이가 아니라 전쟁과 싸우는” 지옥의 풍경을 그린다. 지지부진한 휴전 협정이 계속되는 동안 동부전선 최전방 애록 고지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주인이 바뀌는 의미 없는 전투가 계속된다. 그 시간은 포화 속에서 두려움에 떨던 유약한 대학생 수혁(고수)을 애록을 사수하는 악어중대의 실질적 리더이자, 부하의 허무한 죽음도 전술로 이용하는 냉혈한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고지전>의 수혁을 단순히 잔인하고 악한 인물로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단순히 나쁘거나 냉혹한 인물은 아니죠. 저는 상황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믿는데, 김수혁은 전쟁이 만든 인물이에요. 전우가 죽어나가는 모습을 매일같이 지켜 본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적을 잡는 게 남은 사람들을 살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거죠. 끝까지 부대원들을 살리고 싶은 의무와 책임감에 늘 괴로웠을 거라고 생각해요.” 고수의 말처럼 <고지전>의 김수혁은 착한 사람은 아닐지 모르지만,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것도, 싸우고 싶어서 싸운 것도 아닌 싸우는 이유조차 알 수 없는, 말 그대로 지옥이 따로 없는” 전쟁에서 ‘남은 사람은 살린다’라는 자신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이런 수혁의 논리를 관객에게 설득하는 데 고수만큼 적절한 배우도 없었을 것이다.

정돈된 얼굴과 똑바로 응시하는 곧은 눈빛 때문인지 몰라도 고수는 주로 선의를 가진 정의로운 인물을 연기했다. 그리고 이 곧은 남자가 기구한 운명의 장난 앞에 어찌할 수 없이 무릎 꿇는 순간의 망연자실한 얼굴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곤 했다. 고수라는 배우가 우리에게 각인되었던 10년 전 드라마 <피아노>를 시작으로, 정점에서 무너진 남자의 이야기였던 <그린로즈>,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영화 <백야행>. 그리고 전쟁과 싸우다 무너져 간 <고지전>까지, 우리는 이 잘생긴 배우가 고뇌하는 순간의 찌푸린 미간과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살면서 슬프지 않은 사람이 없고,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잖아요. 그런 매력에 끌려 굴곡 있는 작품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벼랑 끝, 막다른 골목에 몰려 인간의 본성이 나오는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고수가 무너지는 순간이 더욱 가슴 아팠던 건 그의 타고난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하다. 스스로는 “외모가 역할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별로 즐겁지 않겠지만, 그런 고민은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표현을 위한 도구, 일종의 언어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해요”라고 말하는 고수가 추천한 영화들은 어딘가 그의 얼굴과 닮았다. 뚜렷한 선과 크고 맑은 눈으로 강직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클래식한 의미의 미남 배우가 추천하는 ‘클래식한 아름다움이 선명한’ 영화들이 여기 있다.




1. <대부> (Mario Puzo`s The Godfather)
1972년 |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는 우리 모두가 반드시 보아야 하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여러 번 보는 것을 권하고 싶어요. 이 영화는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을 곱씹을수록 다양한 감동과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이 영화에 대해 무어라 더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 시대의 클래식’이라는 수식이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 <대부>는 미국으로 건너 온 이탈리아 시실리아 출신 이민자들의 삶을 마피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 속에서 그려낸 역작이다. 가난한 나폴리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작가 마리오 푸조가 만들어 낸 꼬레오네라는 마피아 가문과 그 속의 남자들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라는 명감독과 말론 브란도, 알 파치노 같은 명배우들을 만나 탁월한 범죄 스릴러이자 인간 군상의 드라마로 완성되었다.



2. <러브레터> (Love Letter)
1995년 | 이와이 ?지

“일본영화가 갖고 있는 특유의 느낌이 있잖아요? 특히 <러브레터>는 이와이 ?지 감독 특유의 몽환적이면서 따뜻한 색감과 잔잔한 느낌을 잘 느낄 수 있어 좋은 영화인 것 같아요. 하얀 설원이 펼쳐지는 가운데 꿈처럼 어딘가를 부유하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애잔함이 남는 영화였어요. 이 영화 역시 O.S.T가 아름다운 영화이기도 하구요.”

이 영화를 본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모두가 아는 그 대사, 그 장면. 하얀 설원 위에서 한 여자가 애타게 외치는 “오겡끼데스까? (잘 지내고 있나요?)” 순수한 첫사랑과 지고지순 한 연정을 이와이 ?지 감독이 특유의 감성과 색감으로 그려 낸 영화 <러브레터>는 1990년대 일본 영화의 대표작이자 동의어였다. 두 여자의 추억 속에 다른 얼굴로 존재하는 남자, 후지이 이츠키가 조난되어 죽어가면서 불렀던 노래, ‘푸른 산호초’의 가사는 이 로맨틱한 영화에 숨은 잔인한 면모를 보여주는 복선이기도 했다.



3. <샤인> (Shine)
1996년 | 스콧 힉스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을 다룬 영화들도 좋아해요. 특히 <샤인>은 영화 속의 피아노 연주곡들이 배우들의 연기를 재창조한 느낌도 들어요. 10년간 거의 감금되다시피 했던 주인공 데이빗 헬프갓이 초라한 행색으로 레스토랑에서 연주했던 음악 ‘왕벌의 비행’이 정말 인상적이에요.”

어느 분야에 놀라운 천재성을 타고 났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불운한 삶을 살았던 아티스트 영화의 전형이라 해도 좋을 <샤인>. 엄하고 독선적인 아버지의 야심은 피아노에 비범한 재능을 가진 아들 데이빗을 옭아매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의 유학을 반대하고, 데이빗은 그런 권위적인 아버지로부터 탈출한다. 하지만 가족과의 단절과 그로 인한 죄책감은 데이빗의 정신을 좀먹었고, 그는 극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10년의 혼돈과 방황 속에서 보낸다. 영화의 O.S.T 중 피아노는 실제 이야기의 주인공인 데이빗 헬프갓이 연주했다.



4. <박하사탕> (Peppermint Candy)
1999년 | 이창동

“결말에서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역행적 구성이 특이해서 <박하사탕>이 오래 기억에 남았어요. 그리고 1980년대의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독특한 애잔함을 주고 볼 때마다 정말 감동이 밀려오는 영화에요. 많이들 얘기하는 설경구 선배님의 연기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삶이란 원래 예측할 수 없어 아름답고,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아 살아가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한 개인의 삶이, 격동의 시대에 휩쓸려 처절하게 망가지는 이야기는 결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다. 1979년, 수줍고 순박한 청년이었던 영호(설경구)가 잔인한 5월의 광주와 잔혹한 시대를 거치며 모든 것을 잃은 중년의 남자가 되어가는 <박하사탕>은 잔인한 이 땅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새겨 넣은 수작이다.



5. <냉정과 열정 사이> (Between Calm And Passion)
2001년 | 나카에 이사무

“<냉정과 열정 사이>는 원작 소설이 아오이와 쥰세이 각자의 시점에서 쓰여진 것처럼 두 남녀 주인공의 관점에 따라 영화의 느낌이 달라져서 좋아해요. 사랑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같은 시간을 경험했지만 그 추억이 두 사람에게 다르게 간직되는 것이, 사랑이니까요. 그리고 이 영화도 O.S.T가 정말 아름다워요.”

이가 딱 맞물리듯이 서로의 빈자리를 딱 채워주는 인연,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연인들이 꿈꾸는 것이 아닐까. 운명의 장난이라 해도 좋을 오해로 서로의 곁을 떠났지만, 이탈리아 피렌체와 밀라노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10년의 세월 동안, 늘 서로를 잊지 못했던 아오이(진혜림)와 쥰세이(타케노우치 유타카)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장소,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재회한다. 일본의 두 소설가 에쿠니 카오리와 츠지 히토나리가 각각 여자와 남자의 입장에서 써내려 간 원작소설은 말 그대로 ‘세기의 러브 스토리’이다.




악어중대 병사들에게 이기는 것보다 살아남는 것이 더 우선이었던 것처럼 100억 규모의 대작 전쟁 영화를 리얼하게 재현한 <고지전>의 고된 현장은 좋은 연기를 하기 전에 지치지 않고 버티는 게 먼저인 곳이기도 했다. 그런 작품을 무사히, 잘 끝낸 고수의 얼굴을 평화로워 보였다. 고수는 “천천히 가는 걸 좋아해요. 무언가를 갖거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부담스럽고. 욕심내는 부분도 물론 있지만 그게 남들처럼 크지는 않고 좀 작은, 소박한 것들이에요”라고 말하는 천성이 느긋한 남자지만, <고지전>을 보고 나면 배우 고수의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큰 야망을 갖거나 복잡하게 재고 계산하는 걸 꺼리는 그에게 굳이 앞으로의 비전을 물었다.

“꾸준히 계속, 계속, 계속 대중과 같이 성장하며 나아가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제가 여러분 곁에서 보이지 않을 때도 저 역시 같은 시간을 보내고,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어요. 그 일상에서 얻은 영감과 에너지를 꾸준히 작품과 캐릭터를 통해 보여드리고, 나중에는 정말로 우리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노역을 하고 싶어요. 그 때까지 연기를 할 수 있다면, 이게 목표죠.” 아마도 우리는 언젠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늙은 배우를 만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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