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방학의 정바비는 인터뷰에서 자신을 “멜로디의 노예”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여름의 문턱에서 발표했던 가을방학의 앨범 은 선율이라는 주인을 모시는 뮤지션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애정표현이 담긴 작품이었습니다. 이미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노래에 피아노는 물론, 현악기와 관악기로 구성된 실내악 편곡이라는 새 옷을 입히고 가사를 조금 바꾸기도 하면서 노래는 좀 더 선명하고 뚜렷하게 자신이 가진 멜로디의 힘을 증명합니다. 조금은 낯설고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들지만 결국에는 원래 그 노래를 좋아했던 지점에 다시 반하게 되는 건 청아한 목소리, 미묘한 문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듬어 닮은 지점을 확인하게 되는 음표의 움직임이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이 원곡이 주었던 기쁨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계피의 목소리로 선뜻 감정을 거머쥐고 시작하던 노래 ‘이브나’는 악기들의 리드에 따라 보다 아련하고 망설이는 마음으로 감정을 바꾸고, 새침한 노래였던 ‘여배우’는 오히려 실내악 편곡을 만나 가볍고 솔직한 분위기로 바뀝니다. 뿐만 아니라 같은 멜로디에 같은 단어를 싣고 있지만 노래는 듣는 사람을 다른 시간, 다른 공간으로 이끌기까지 합니다. 말하자면 비가 막 그친 여름날의 정동 골목, 막 해가 기울기 시작한 응접실에 놓친 홍찻잔 같이 오래된, 하지만 반질반질하게 닦아서 기억 한편에 저장해 놓은 지극히 사소한 판타지가 재생되는 것이지요. 너무 거창하게 부풀리지 않고, 하지만 적당히 봉긋해 진 꿈결 같은 노래들을 무대에서 만나고 싶다면, 9월 1일에는 가을방학과 김재훈이 함께 꾸미는 호숫가에서의 콘서트를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열광적인 축제의 계절은 끝나고, 가을의 첫날에는 아무래도 촉촉하게 다듬어진 판타지에 빠지는 편이 더 어울리기 마련이니까요.

글. 윤고모 nine@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