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거렸다. 영화 <코리아>, 아니 정확히 말해 배두나가 연기한 리분희를 보는 내내. 이 배우가 이렇게 멋진 이였던가 하며 새삼 놀랐다. 전작 영화 <공기인형>의 잔상에 매여 있는 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몸으로 구현해 낸 그 인형이 눈빛 하나로 상대방을 한 걸음 물러서게 하는 운동선수가 되어 돌아왔으니 말이다. “감독님과 첫 미팅을 할 때 솔직하게 말했어요. 이 역할은 누가 해도 멋있는 역할이다. 그런데 내가 하면 조금 더 멋있을 것 같다고. 아하하하” 배두나는 이 솔직한 자신감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증명했다. <코리아>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스포츠 영화가 가야할 길에서 조금도 곁눈질 하지 않고, 바로 그 점이 자주 관객을 지루하게 만든다. 하지만 큰 키에 짧은 머리, 단호한 입매와 단단한 눈빛의 리분희가 등장하는 순간만큼은 등을 떼고 몸을 당겨 스크린에 다가가게 된다.

데뷔 초 출연했던 KBS <학교> 시절부터 “중성적이라는 얘기는 워낙 많이 들었던” 외형적 분위기 덕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톰보이 콘셉트의 화보가 아니라 매 순간 살아 움직이는 인물로 존재해야 하는 영화에서 진짜 리분희가 되어 관객을 설득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참고할 만한 힌트가 별로 없고 특별한 증거물도 없었던”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배두나는 “사진을 보고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부터 그림이 그려졌던 직감”을 믿었다. 그리고 “스코어를 따고도 소리 한 번 안 지르고 내가 더 잘 하니까 이기는 게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사람 기를 죽이던 카리스마” 속에 “겉으로 절대 표현하지 않지만 사실은 되게 몰랑몰랑하고 풋풋한 마음”을 숨긴 스물세 살 리분희를 만들어냈다.

멋들어지게 해냈지만 한편으론 의아한 선택이기도 했다. 봉준호, 박찬욱, 고레에다 히로카즈 등 우리 시대 쟁쟁한 작가들의 영화에 대체할 수 없는 방점을 찍던 배두나였으니 말이다. “저답지 않은 선택 아니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물론 특별히 빛나고 튀는 캐릭터도 좋지만 매번 그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더라구요. 옆에서 서포트 해주는 걸 이번에 해봤는데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게 해 준 이가 있다. 바로 영화 <킹스 스피치>에서 왕비 엘리자베스를 연기한 헬레나 본햄 카터. “배우로서 되게 반성하게 되었어요. 굉장히 기본적인 연기를 하는데 존재감이 다르잖아요. 작은 역할이고 남을 받쳐주는 연기라도 충분히 극에 무게감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저도 그녀처럼 경계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배우로서 새로운 길에 눈 뜨게 해준 <킹스 스피치>를 비롯하여 배두나가 추천하는 영화들은 그녀가 지향하는 연기와도 닮았다. 스스로는 결코 불타오르지 않지만 보는 이의 마음은 뜨겁게 달구는, 절제된 연기와 이야기로 마음을 뒤흔든 영화들이다.




1. <세 친구> (Three Friends)
1996년 | 임순례

“엄마(배우 김화영)가 주인공의 어머니 역으로 나오셔서 고등학생 때 보게 된 영화예요. 그간 제가 봐 왔던 <타이타닉>이나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할리우드 영화는 물론 당시 한국 영화와도 정말 다른 작품이었어요. 이 영화를 보고 영화라는 것에 새로운 시각이 생겼고 나중에 제가 배우가 되고 나서 초반에 영화를 선택할 때도 길을 제시하고 많은 영향을 주었어요.”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만든 임순례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고교 졸업 후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세 명의 동창생 무소속(김현성), 삼겹(이장원), 섬세(정희석)가 현실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 겪는 고민과 상처를 그린 영화다. 흔한 17대 1 패싸움도, 밤길을 달리는 오토바이 장면도 없이 아플 정도로 과장과 허세 없는 현실을 담아낸 담담하지만 묵직한 성장담이다.



2. <아무도 모른다> (Nobody Knows)
2004년 | 고레에다 히로카즈

“저는 감정을 폭발하듯 드러내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이야기가 극단으로 치닫는 영화도 마찬가지구요. 이 작품도 굉장히 절제되어 있잖아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은 <공기인형>에서 함께 작업했는데 인간적으로도 정말 좋은 분이세요. 약간 낯을 가리셔서 처음 만나는 사람은 차갑게 느낄 수 있지만 친해지면 정말 완벽한 분이세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1988년 일본 도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소재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부모의 보호 없이 어린 네 남매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좁은 아파트에서 숨어 살아가는 모습을 다큐멘터리처럼 차분하게 응시한다. 장남 아키라를 연기한 야기라 유야가 당시 15세의 나이로 제 57회 칸느 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해 화제가 되었다.



3. <킹스 스피치> (The King`s Speech)
2010년 | 톰 후퍼

“이야기 자체가 특별히 창의적인 영화는 아니에요. 오히려 대중적인 코드가 많은 작품인데 이 영화에서 헬레나 본햄 카터를 보면서 커다란 영감을 받았어요. 사실 그녀가 평범한 역할에 어울릴 거라는 생각이 드는 배우는 아니잖아요? 물론 어렸을 때는 고전적인 미인 캐릭터를 했지만 점차 실험적인 작품을 많이 했잖아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부인으로 굉장히 평범하고 기본적인 연기를 훌륭하게 해냈어요. 그녀 덕분에 이 작품이 더 힘을 얻었다고 생각해요.”

조지 6세(콜린 퍼스)는 세기의 스캔들을 일으키며 왕위를 포기한 형을 대신해 국왕이 되었다. 하지만 말을 더듬는 콤플렉스를 가진 그에게 그 자리는 두렵고 불편하기만 하다. 전쟁 중 믿고 따를 수 있는 왕의 모습을 기대하는 국민들 앞에 당당히 서기 위해 왕비(헬레나 본햄 카터)의 도움으로 언어치료사 라이오넬 로그(제프리 러쉬)를 만난 조지 6세. 그렇게 두 사람의 엉뚱하고 감동적인 수업이 시작된다. 제 8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4. <빌리 엘리어트> (Billy Elliot)
2000년 | 스티븐 달드리

“성장 서사를 좋아하기도 하고 사회적인 배경이 반영되면서도 그걸 무겁지 않게 풀어낸 영화라서 보고 굉장히 큰 감동을 받았어요. 관객으로서 이런 느낌의 영화를 되게 좋아해요. 대중적인 코드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부분도 있지만 그걸 확 드러내지 않잖아요. 누구 하나 엉엉 우는 사람이 없지만 보는 사람을 슬프게 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영국 영화가 우리나라 영화와 약간 정서가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한 소년이 발을 구른다. 춤이라기보다 몸으로 대신 말을 건네는 듯, 제 안의 감정을 다 개어내는 것 같은 움직임이다. 11살 소년 빌리(제이미 벨)에겐 아버지의 권유로 시작한 권투보다 곁눈으로 배운 발레가 더 자신을 위로해준다. 아들의 장래를 위해 파업 중인 동료를 배신하고 탄광으로 향하던 아버지의 무표정한 얼굴과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빌리의 화려한 도약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 영화.



5. <미세스 브라운> (Mrs Brown)
1997년 | 존 매든

“이 작품은 영국에서 알게 된 영화에요. 주디 덴치가 빅토리아 여왕으로 나오는 시대극인데 이 영화를 보고 그녀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게 말로 설명하기는 좀 어려운데 (웃음) 뭐랄까, 연기가 정말 간결해요. 감정을 내지르지 않는데 보는 사람은 막 눈물이 나는, 제가 진짜 좋아하는 연기에요. 이 영화를 보고 반해서 주디 덴치 자서전도 찾아 읽었어요.”

18세의 어린 나이로 대영제국의 여왕이 된 빅토리아(주디 덴치)는 앨버트 왕자와 결혼하여 20여 년간 행복한 가정을 꾸렸지만 그와 사별한 후 깊은 슬픔에 빠진다. 그런 그녀를 구한 이가 바로 앨버트 왕자의 생전에 그에게 헌신했던 존 브라운(빌리 코놀리)이다. 여왕과 마부로 우정을 쌓아가는 두 사람의 사이는 호사가들의 시기를 불러일으키지만 존 브라운은 죽는 날까지 여왕에게 충정을 바친다. 데임(Dame) 작위를 받은 영국의 거물 여배우 주디 덴치는 최근 영화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에서 베테랑 배우 시벌 부인 역으로 변치 않는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저는 삶에 굴곡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주 힘들었던 순간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그 사람이 되어서 생각하지 않으면 연기를 잘 못 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계속 생각을 해요. 철저하게 그 사람이 돼서 생각을 하고 그 마음이 되어야만 해요.” 실제 리분희 선수보다는 물론 탁구 선수로선 키가 큰 배두나에게 탁구대는 꽤 낮은 높이였다. 영화 속에서 크고 곧게 서 있던 몸이 경기가 시작되면 탁구대를 항해 바짝 낮춰 구부러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자연인 배두나가 배우 배두나가 되는 순간과 닮았다. 날아오는 공과 온 몸으로 마주할 때의 긴장감 역시 “다음엔 더 힘든 걸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10년 넘게 하다 보니 힘든 게 당연해지고 그 시간을 거친 뒤 느끼는 중독 같은 희열이 있어” 그녀가 연기를 계속하는 이유와 통하는지도 모르겠다. 주위에서 닮은 얼굴을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어딘가 현실감이 적은 인상은 다른 이를 떠올릴 수 없는 독특한 존재감이 되어 대체할 수 없는 배우 배두나의 시간을 만들어왔다. 그리고 이제 “기본기가 탄탄해야만 할 수 있는” 작지만 무게감 있는 연기의 맛까지 알게 된 배두나. 다시 그녀가 몸을 낮춰 자세를 잡는 순간, 그리하여 우리의 심장이 또 한 번 두근두근 뛰게 될 그 순간이 기대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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