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성의 10 Voice] <나도, 꽃!>, 인간 여자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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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무태만, 대민업무 불친절, 명령 불이행, 의사소통 부재. 인사고과에 따르면 MBC 의 차봉선(이지아)은 부적절한 경찰이다. 그러나 실전의 세목들을 모두 살피지 못하는 기록을 비웃기라도 하듯, 사실 차봉선은 그럭저럭 큰 문제없이 제 일을 해 나가는 공무원이다. 드라마의 문법에서도 역시 차봉선은 평가 기준에서 상당히 비켜 난 인물이다. 연애 태만, 남자에게 불친절, 청춘 불이행, 보호본능 유발 동기 부재의 그녀는 사랑을 한 몸에 받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부각되기에는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 언행을 일삼는다. 가련하거나 꿋꿋해서 주변의 응원을 유발하는 일군의 여성캐릭터들과 달리 차봉선은 ‘뻣뻣하다’는 희대의 특징을 가진 여자 주인공이다. 얄미운 친구에게도, 들이대는 남자에게도, 속셈이 빤한 동료에게도 그녀는 철벽을 쌓아 올린다. 그리고 드라마는 그 벽 뒤의 여자에게 말을 건다. 그럭저럭, 살아갈 만하냐고.

희망이 없는 세상에서의 생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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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순은 괄괄했고, 고병희는 꺼벙했다. 김도우 작가의 작품 안에서 여자들은 언제나 현실의 피조물이었다. 곱고, 젊고, 날씬하며, 알고 보면 호락호락하다는 판타지를 걷어낸 그 여자들은 돈을 버는 것의 고단함, 밥을 먹는 것의 소중함, 사랑을 하는 것의 고달픔을 알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김삼순과 고병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과 사랑을 말했던 것과 달리 차봉선에게는 희망이 없다. 심지어 그에 대해 말할 때마다 “세금을 오백 원씩 걷어야”한다고 주장할 만큼 차봉선의 세상은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순찰을 돌 때마다 관할구역 밖으로 경찰차를 몰고 달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지만, 그녀는 욕망을 억누른다. “다리를 건너도 특별할 게 없다는 걸”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른이 넘은 그녀가 핑크치킨을 애정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철부지라서가 아니다. 아이돌과의 유사연애에서 그녀는 다리를 건널 필요가 없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공격해오지 않는 유일한 무엇이 필요할 뿐이다.

그래서 차봉선은 말하자면, 김삼순의 연장이자 고병희의 본편이다. MBC 은 없는 척 외면하던 삼순이들을 세상 밖으로 소환했고, MBC 는 그녀들이 재벌의 구원 없이도 행복해 질 수 있음을 설득했다. 그러나 세상은 더욱 부당하고 무례해진다. 온순하고 매끈하지 않은 것들을 향한 린치는 점점 강해지고, 심지어 분노하는 것조차 비웃을 만큼 야비함이 만연하다. “당신은 안과 밖이 다른 사람인가요?”라고 묻는 공익광고는 그야말로 공익을 위해 개인의 친절함을 강권할 뿐, 밖의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힘껏 싸워야 하는 사람들의 안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은 이런 세상에서 여전히 모난 채로 살아가는 돌맹이들에게 굳이 정을 내리치지 않음으로서 다시 삼순이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조마루(이기광)는 차봉선의 무뚝뚝한 밖을 향해 동경의 시선을 보내고, 박태화(조민기)는 차봉선의 헝클어진 안을 괜찮다고 다독인다. 차봉선이 “전요, 전 제가 싫어요. 제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순간, 시청자들은 ‘먼저 자신을 사랑하라’는 슬로건의 피로에서 해방된다. 자신을 혐오할 수도 있다. 의심해도 괜찮다. 대신 그 이유에 대한 답을 구하기를 멈추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연애가 위로가 되고 삶이 되는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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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움푹 파인 구덩이는 타인의 모서리와 꼭 맞는 쌍을 이룬다. 모두가 매끈할 필요는 없다. 불쌍한 차봉선이 무결점의 남자가 아니라 불행한 서재희(윤시윤)와 짝이 되는 것은 판타지에서는 한 발 멀지만, 구덩이의 깊이만큼 모서리를 감쌀 수 있다는 위로를 구체화 한다. 그리고 드라마는 상대의 모서리에 다치지 않기 위해서는 제 구덩이의 바닥을 단단히 다져야 한다고 일러준다. 매일이 지옥이었던 엄마가 웃었던 장면을 추억하려 차봉선이 애쓰는 것은 어리광이 아니라 타인의 기억으로 자신의 역사가 결정되는 것을 막으려는 필사의 노력이다. 징후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인과로 빚어진 인간으로서 자신을 이해하겠다는 결심인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철벽의 높이가 아니라 그것을 쌓아올린 벽돌 하나하나의 생김새다. 네모진 상처로 남은 질문이 하나씩 해결 될 때마다 벽은 자연스럽게 낮아지고, 그제서야 그 너머의 여자는 진짜 얼굴을 드러낼 것이다. 담장에 가려 들리지 않았던 이름이 들리고, 움직임은 비로소 꽃이 될 것이다. 차봉선의 연애를 응원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에 이르러 드라마는 다시금 어떤 여성형이 아닌 ‘인간 – 여자’를 구현하기 시작했고, 연애가 인생의 여유가 아님을 각성했다. 사랑이란 목숨을 걸고 하는 게임이 아니라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 되어야 할 삶이다. 꽃이 되고 싶은 마음은, 결국 어떻게든 살아내고 싶은 누구나의 소망인 것이다.

글. 윤희성 nine@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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