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채│그녀의 풀스토리가 궁금해?
정은채│그녀의 풀스토리가 궁금해?
물에 번진 펜글씨 같다. 영화 의 홍일점 영숙 역할을 맡은 배우 정은채의 얼굴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살짝 웃을 때도,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을 때도 그녀의 선명한 이목구비가 만들어내는 선은 또렷한 의미를 드러내지 않았다. 경직된 무표정이 아닌, 흐릿하게 번지는 묘한 표정. “스스로를 예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조금 특이한 건 있는 거 같아요.” 그녀의 방송 데뷔가 백퍼센트 오렌지주스가 아닌 미과즙음료 광고였다는 것은 그래서 흥미롭다. 맛과 향이 희미해서 가치를 얻는 미과즙음료처럼, 친구 전화에 휑하니 나가는 남자친구를 보며 심란해하는 그녀 역시 차분하다, 혹은 단아하다는 식으로 쉽게 정리할 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슴슴한 느낌? 만만하지 않은 아가씨
정은채│그녀의 풀스토리가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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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 많이 됐죠. 영숙이 캐릭터가 분량이 크진 않아도 어쨌든 이 영화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쉽지 않으니까.” 사실 플롯부터 비주얼까지 강동원 대 고수라는 구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에서 여배우, 그것도 신인인 그녀가 어떤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낸 건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본인 말처럼 자연스럽게, “너무나 큰 대선배님들” 사이에서 어색하지 않은 그림을 만들어낸다는 것에 있다. 가령 규남(고수)과 편한 오빠 동생 사이면서도 미묘한 연모가 담긴 관계를 어색하지 않게 그려내는 데에는 그녀 특유의 슴슴한 느낌이 제법 작용했다.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건, 이런 부담스러운 현장에 슬며시 풍경처럼 어울리는 건, 보이는 대로 마냥 하늘하늘한 태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다. 그녀가 출연한 광고 문구처럼 그녀의 ‘풀스토리가 궁금’한 건 그래서다.

“항상 백퍼센트 안정적이지 않은 게 있어요. 여기도 저기도 내 집이 아닌 느낌? 항상 짐을 싸고 있고, 항상 짐을 풀고 있고. 그게 일이었어요. 그래서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거 같아요.” 아버지 일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에만 이사를 다섯 번 했던 그녀는 열다섯이 되면서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국어 교사라 한국 학교의 분위기를 너무 잘 아는, 자기 아이는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라길 바란 어머니의 뜻이었다. 하지만 정작 입학한 학교는 “수녀님들과 함께 생활하는 어둡고 가슴 죄이는” 환경이었고, 기숙사 규칙은 엄했다. 그리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던 한국인 여학생은 기숙사 반입 금지인 전기 주전자로 물을 끓여 냄비에 ‘라면 뽀글이’를 해먹었다. “그러다 한 번은 사감 선생님께 걸렸어요. 너무 놀라서 라면을 쏟았다가 다리에 화상까지 입었어요.” 사감 선생은 안쓰러워 차마 벌점도 못 주고, 자신은 울면서 연고를 바르던 풍경을 말하며 어느 때보다 경쾌해진 목소리는, 이 얌전해 보이는 아가씨가 결코 만만한 타입은 아니란 걸 직감하게 해준다.

“어떤 분위기인 건지 아시겠죠?”
정은채│그녀의 풀스토리가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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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채│그녀의 풀스토리가 궁금해?
정은채│그녀의 풀스토리가 궁금해?
그래서 “갑갑한 학교보다 영화 속 자유로운 세상이 더 실제 세상 같아서” 연기자의 길을 택했다는 그녀의 말은 특이할지언정 의외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에 돌아와 일면식도 없는 한양대 연극영화과 최형인 교수에게 무작정 가서 연기자의 길을 물었던 사연은, 마냥 차분한 느낌만은 아닌 그녀 안에 숨은 강단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그 강단이 묘하게 침착한 태도 안에서 균열을 일으킬 때, 이 배우의 정적인 분위기는 동적인 에너지로 전환된다. 앞서 말한 광고의 미공개 버전에서 “너 나랑 몇 번 잤다고 사람이 그렇게 달라지냐? 너 뭐하는 인간이야?”라며 분을 토해낼 때, 아디다스 광고 무비 안에서 무심한 척 하다 강동원을 만났다는 사실에 좋아 죽겠는 표정을 지을 때, 이 신인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감정의 진폭을 보여준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좋아하는 아티스트로 비요크를 꼽으며 “어떤 분위기인 건지 아시겠죠?”라며 역시 여전히 보일 듯 말듯 미소를 짓는 그녀는 그래서 참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배우다. 그것은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녀는, 더는 짐을 싸지 않아도 될 자신의 자리를 이제야 찾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 위근우 eight@
사진. 이진혁 elev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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