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일│우정을 바치고픈 21세기 영화친구들
정성일│우정을 바치고픈 21세기 영화친구들
그에게 5편이라니, 이건 고문과도 같은 과정이었을 것이다. 팬덤에 가까운 시네필들의 추종을 낳은 문제적 영화평론가이자, 2009년 영화 를 연출한 감독, 얼마 전 성황리에 막을 내린 제 4회 시네마디지털서울(CinDi)의 프로그램 디렉터인 정성일에게, 아니 영화에 대한 지독한 사랑으로 거의 평생을 살아온 이 남자에게 고작 5편의 영화를 골라달라고 부탁한 것은 말이다. 결국 고심 끝에 21세기, 라는 거대한 화두 속에서 영화의 새로운 세기를 연 다섯 편이 리스트 업 되었다.

최근 카투니스트 정우열과 함께 출간한 평론집 은 그의 영화에 대한 우정과 믿음을 담아 낸 책이다. “이 책에 실린 글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에 대해 먼저 고백을 하고, 그들이 말을 걸어오기를 기다렸던 기록입니다. 누군가 왜 당신은 영화 별점을 매기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적대적이면서 ‘10 베스트’에 대해서는 그렇게 호의적입니까? 라고 물어왔어요. 생각해봤더니 결국 10편의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가 똑같은 친구를 찾고 있었던 것이었구나, 라는 생각에 책 머리에 ‘영화라는 우정’이라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여기 뽑힌 지난 10년간의 영화들 중 베스트 5는 그가 기꺼이 우정을 바치고픈 21세기 영화친구들의 목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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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ulholland Drive)
2001년 | 데이빗 린치
“을 보면서 이제 20세기의 고전주의 영화가 끝났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면, 이제 21세기 영화가 시작됐구나 느낀 순간이 바로 를 보고나서였어요. 이제 영화가 이런 식의 화법이 이렇게 진행되어도 상관없구나, 하는 쇼크 같은 게 있었죠. 당신이 21세기 영화를 맛보고 싶다면 이 영화는 그 미로로 들어서는 입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연한 자동차 사고로 만난 두 명의 여자를 따라가는 여정. 일단 이 도로에 들어선다면 출구를 찾기 힘들 것이다. 꿈과 현실이 유연하게 교차하고 나뉘는 데이빗 린치 감독의 황홀한 드라이브를 따라가는 이 145분의 탑승은 그러나 멀미보다는 희열을 느끼게 해준다.
정성일│우정을 바치고픈 21세기 영화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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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ropical Malady)
2004년 |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감히 ‘미장-정글’이라고 부르고 싶은 영화입니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 영화의 핵심은 영화가 아직 ‘마술’이라는 믿음이 있어요. 조르주 멜리어스의 계보에 있는 거죠. 관객들이 모두 엄청난 기술의 CG에 익숙해져 있는 시대에 여전히 펑!하는 마법의 순간을 다시 스크린 위로 끌어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죠. 21세기 이런 저런 영화를 봤지만 마치 호랑이를 마주친 것 같은 충격을 받았던 영화입니다. 아직 보시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부디 그 순간을 맛보기를 권합니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세 번째 장편영화이자 완전히 새로운 언어로 영화의 역사를 쓰게 된 아시아의 신예를 세계적으로 알리게 된 작품. 2004년 제 57회(2004년)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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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Still Life)
2006년 | 지아 장 커
“뤼미에르의 계보 속에서 가장 21세기적 영화는 지아 장 커의 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감독은 산샤(三峽)에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들어갔다가 이들의 삶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요하구나,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거죠. 21세기 디지털 영화의 한 전범이자, 영화가 어떻게 세상을 기록할 것인가, 어떻게 세상을 만날 것 인가, 영화가 어떻게 세상에게 질문을 던질 것인가 라는 지점을 건드렸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로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한국에서도 DVD가 나와 있고 제가 코멘터리를 했습니다. (웃음)”

중국 산샤로 떠나간 아내와 딸 혹은 별거한 남편을 찾아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도착한다. 그러나 댐 건설로 수몰된 그곳에는 과거의 주소는 더 이상 없다. 그리고 그들이 찾아 헤맨 그 실체 역시 그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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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lephant)
2003년 | 구스 반 산트
“잊혀지지 않는 영화죠.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제일 이상했던 건 화면 비율이었어요. 1.33:1. 왜 이 비율로 찍었을까 궁금했었는데 중간에 아이들 둘이서 컴퓨터 게임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그 노트북 화면 비율인거예요. 또한 인물들을 팔로우하는 방식이나 각각 아이들의 스테이지가 반복되는 것도 컴퓨터 게임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거죠. 의 가장 놀라운 지점은 영화가 영화로부터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 가를 실험하는 가운데 가장 ‘시네마틱한 순간’을 찾았다는데 있어요. 컴퓨터게임이 없었을 때 노트북이 일상화되기 전에는 만나기 힘들었던 화법의 영화라는 점에서 21세기 적 영화로 꼽고 싶어요.”

99년 미국의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난사사건을 모티브로 시작된 는 로 이어지면서 를 찍을 때 까지만 해도 자기고백적인, 여전히 모던영화의 영향아래 영화를 끌고 갔던 구스 반 산트의 새로운 화법을 보여준다. 2003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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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ie Xi Qu: West Of The Tracks)
2003년 | 왕빙
“이 영화를 보고 한동안 멍한 상태가 되었어요. 감독이 곧 문을 닫을 거라는 철광도시 선양에 가서 작은 DV 카메라를 하나 들고 찍은 ‘원맨밴드’ 영화죠. 그리고 괴물 같은 상영시간 9시간 45분, 이 시간을 견뎌 보는 것이 중요한 영화예요. 소멸되는 것이 느껴진 달까. 한 도시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시간의 마모에 대한 기록이랄까. 만약 필름으로 찍었다면 불가능했을 영화이고, 혼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영화이기도 하죠. 스태프들과 함께라면 거의 3년 가까이 머물면서 찍기는 불가능했을 거니까요.”

영화가 시작하면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질 철광도시 선양의 한복판으로 기차가 들어선다. 눈 내리는 레일위로 카메라를 싣고 그 도시를 거의 10여 분간 담아내는 첫 장면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떠난 후 다시 한 번 기차가 그 죽은 도시를 돌면서 담아내는 적막함을 맞이하는 순간 그것은 아마도 가장 21세기적 영화 체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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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영화의 변화를 촉구하는 테크놀로지의 요구가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의 10년이 먼 훗날 돌아볼 때 영화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던 시대로 기록 될 거라고 생각해요. 마치 1927년에 살았던 사람들이 무성영화가 아닌 토키영화가 시작되었을 때 그 변화를 그저 말을 하는 구나, 정도로 생각했겠지만 결국 영화의 모든 과정을 바꾸어 놓았던 것 처럼요.” 정성일과 함께 21세기 영화를 이야기 하고 있으니 그가 그저 흘러간 시네마 천국의 찬란한 영광만을 껴안고 뒹구는 네크로필리아가 아니라, 지금 바로 영화의 더운 손을 부여잡고, 매 순간 다양한 방식과 다양한 포지션으로 사랑을 나누는 ‘초열애모드’의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이 지독한 사랑은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언젠가, 세상이 영화가 되는 그날까지.

글ㆍ사진, 백은하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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