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성의 10 Voice] <유희열의 스케치북>, 판타지가 희망이 되는 무대
, 판타지가 희망이 되는 무대" />
주인공이 되는 가장 멋진 방법은 다른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능력을 발휘 하는 것이다. 그리고 4주간에 걸쳐 방송된 KBS 100회 특집은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뮤지션이 아닌 음악인들을 주인공으로 초대하는 자리였다. 프로듀서들로 시작된 이 기획은 인디 레이블의 숨은 인재들을 소개했고, 드라마의 명장면 뒤에 숨은 목소리의 얼굴을 공개했으며 드디어 100회에 이르러서는 음악을 연주하는 세션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늘 무대 뒤편에 서 있었던 코러스가 무대 중앙에서 ‘ai no corida’를 부르는 동안 깜짝 출연한 인순이가 댄서의 역할에 충실하며 노래 한 소절 부르지 않은 이날의 피날레는 지난 4주간의 방송이 보여준 진심을 강력하게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심성락의 무대가 증명해낸 판타지
[윤희성의 10 Voice] <유희열의 스케치북>, 판타지가 희망이 되는 무대
, 판타지가 희망이 되는 무대" />
그리고 심성락이 있었다. 50년이 넘는 세월을 아코디언 연주자로 살아온 그는 2009년 연주 앨범 를 발표했다. 앨범은 다시금 그를 뮤지션으로 명명했고, EBS ,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 한국 대중음악 시상식은 심성락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그 사이 그는 음악을 중단했다. 인터뷰에서는 “개런티를 깎으면 일이 더 들어올 것이라는 충고가 있지만 나는 내 가치를 알아주는 무대에만 서고 싶다”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에서도 그는 “9개월 만에 악기를 봤어요. 음악이 싫더라고요”라고 지난 속내를 드러냈다. 그런 그가 “이 나이에 이렇게 젊은 분들 앞에서 연주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내가 이상한 마음이에요. 눈물이 나려고 해요”라며 객석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녹음실을 무대로 알고 살아 온 뮤지션에게도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나 벅찬 일이었다. 결국 그가 원한 개런티는 금전이 아닌 존중, 대접이 아닌 애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세상과 화해하며 “여러분들이 찾아주시면 언제든지 올게요”라고 말하는 순간, 방송은 무언가를 열심히 평생 동안 해 온 사람은 결국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판타지를 증명해 냈다.

유희열의 이러한 기획은 비단 음악인을 위한 감성만은 아니다. 라디오 진행을 하던 시절부터 세션 연주자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 온 그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이것이 방송을 통해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이 세상이 노력하는 자에게 주인공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공부해도 등록금의 장벽 앞에서 학업의 꿈은 흔들린다. 학력이 부족하면 실력은 폄하된다. 실력이 출중해도 외모가 부족하면 놀림거리가 되기 일쑤다. 수십억 자산가의 예치금은 비밀리에 보호되지만, 하루하루 개미처럼 일하고 저축한 고객의 재산을 보장해 주기는커녕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조차 없다. 보이는 것, 대물림되는 것이 점점 중요해지는 세상에서 노력으로 승부하는 사람들은 계속 옆으로 밀려난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세상은 종종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비웃기까지 한다.

중독적으로 소비되는 누군가의 고난
[윤희성의 10 Voice] <유희열의 스케치북>, 판타지가 희망이 되는 무대
, 판타지가 희망이 되는 무대" />
절망이 깊을수록 판타지는 유혹적이다. 불합리한 세상에서 끝내 제 힘으로 주인공의 자리에 도달한 사람은 곧 희망이 된다. MBC ‘나는 가수다’에서 유독 ‘발굴’에 대한 시청자들의 요구가 큰 것 역시 그러한 이유에서다. 사람들은 좋은 노래만큼이나 좋은 드라마를 원한다. 출연이 귀한 가수를 볼 수 있는 기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묻혀 있었던 가수가 실력만으로 스타가 되는 귀한 기회를 갖는 일이다. 그러나 판타지에 매료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미 너무 깊은 절망을 가졌다. 그들에게 이제 주인공이 되는 꿈은 희망이 아니라 당의정을 입힌 위로일 뿐인지도 모른다. tvN 에 출연한 최성봉 씨를 둘러싼 논란은 대중의 그러한 심리를 반영한다. 불우한 유년기를 보낸 그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무대에서 노래로 심사위원의 인정을 받았다. 그가 음악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그의 의지와 목소리는 충분히 대단하다. 그러나 제작진은 그의 학창시절과 관련한 발언을 편집했고, 사실을 밝힌 기사에는 “감동이 반감되었다”는 댓글이 달렸다. 밝은 재능이 어두운 과거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어려움이 재능을 더욱 빛나게 하는 형국이다. 포효하는 야수에게는 상처가 있어야 하듯, 노력은 이제 중독적으로 소비되는 이야기로 재단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 유희열을 말해야 한다. 심성락은 오른쪽 새끼손가락의 일부를 절단 당했고, 고막을 다쳐 난청을 안고 살아왔다. 그러나 유희열은 그의 이러한 고난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무대를 만들어 어려운 시절을 거쳐 기어이 살아남은 음악이 그의 세월을 증명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하림과 함춘호는 그의 아코디언 연주에 기꺼이 조연이 되어 주었다. 그렇게 주인공이 탄생한 순간, 그 자리의 모두는 스스로 주인공이 되었다. 늙은 연주자의 50년 세월이 긍정되는 순간, 그 뒤를 따라가는 연주자들, 그리고 자신의 길을 가는 모든 젊은이들의 시간 역시 긍정되었기 때문이다. 판타지가 희망이 되는 자리는 바로 이런 곳이다.

글. 윤희성 nine@
편집. 이지혜 seven@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