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려원에 대한 첫 인상은 우울한 음악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막시밀리안 헤커와 디어 클라우드, 어 파인 프렌지 등 감성 충만 인디 팝 음반들이 놓여 있었다. 활력이 넘치는 목소리, 생글생글 웃는 미소와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뜻밖이라는 기자의 반응에 “넬을 가장 좋아하고 라디오헤드나 콜드플레이도 좋아한다”며 “원래 집순이인데 집에서 이런 음악을 들으며 그냥 누워 있을 때가 많다”고 답한다. 인터뷰의 OST라며 틀어놓은 헤커의 축축하고 우울한 음악 사이로 어렴풋하게 배우 정려원의 민낯을 살폈다.

정려원은 뜨거운 빨강이다
정려원은 ‘좋아하는 색’이라며 빨간색 지갑을 꺼내보였다. ‘미친 빨강’이라고 색깔을 정의했다. 정려원 하면 노랑이나 초록색이 떠오른다는 말에 그는 “다들 속고 있는 것”이라며 자신을 ‘불나방’이라고 불렀다. 도시적이고 여성적인 인상과 달리 화끈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그는 “모험심이 강해서 모르는 길이 있으면 꼼꼼히 찾아가는 게 아니라 돌아가더라도 덤벼드는 스타일”이라며 “추진력은 만 퍼센트인데 지구력은 제로”라고 농담을 던졌다. 하고 싶은 일은 기어이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당장 할 수 없으면 오만 가지 상상에 빠져버린다고 한다. ‘새빨간 불나방’이기에 좋아하는 패션 분야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정려원은 “동대문에 가면 손이 떨린다”며 난리법석을 떨어 주위 사람들을 지치게 한다는 자신을 묘사해 보였다. 연예계 대표 패셔니스타로 유명한 그는 직접 옷, 신발, 팔찌, 반지, 귀고리, 벨트 등을 디자인하고 만든다. 사업가 기질이 없어 당장 브랜드를 만들 생각은 없지만 전시회는 생각 중이다. 영화 출연도 그에겐 ‘미친 빨강’이다. 촬영이 없는 날에도 영화 촬영지인 강원도 영월을 지켰다. 슬레이트를 직접 쳐보며 일일 스태프를 자처하기도 했다. 현장에서 정려원은 ‘뜨거운 빨강’이었다.

정려원은 시대극이 두렵지 않다
SBS 드라마 는 정려원의 출연작 중 최악의 성적을 낸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정려원의 도시적이고 현대적인 이미지가 캐릭터 구축에 방해가 됐을 것이라고, 의 실패로 출연을 주저했을 것이라고 오해하기 좋은 시나리오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영화 의 박건용 감독이 연출한 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남한의 한 시골 마을을 점령한 인민군과 마을 사람들의 갈등, 교감을 그린 작품이다. 정려원은 인민군 장교 김정웅(김주혁)과 사사건건 부딪히다 정드는 초등학교 교사 박설희를 연기했다. 정려원은 “예전에 사극을 싫어했던 이유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를 한국에서 다닌 게 아니어서 역사를 잘 모른다는 사실을 들킬까봐였다”며 “사극을 보는 것도 좋아하고 사극에 대한 거부감도 전혀 없다”고 재차 강조했다. 무엇보다 정려원이 에 출연하고 싶었던 것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총출동하는 영화 처럼 훌륭한 배우들이 많이 나오는 작품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흥행 실패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중이 주는 힘으로 먹고 살기 때문에 잘 돼야 하기도 하지만 흥행이나 시청률 같은 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심지가 견고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정려원은 음악에 자신이 없다
2000년 샤크라의 멤버로 데뷔한 정려원은 올해로 연예계 데뷔 11년째를 맞는다. 비슷한 지점에서 출발한 아이돌 그룹 출신 배우 중에서는 꽤 성공한 축에 든다. 그룹 해체 전부터 아침드라마 조연으로 연기를 시작해 10년 가까이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드라마 외에 뚜렷한 히트작은 없지만 상업영화의 주인공을 네 편 연달아 맡았다는 것은 ‘배우’로서 확고히 자리잡았다는 증거다. 연기자로 삶의 방향을 바꾸고 나서야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꼈다”는 정려원에게 왜 음악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은 부질없어 보였다. 스물이 채 되기도 전에 별 생각 없이 한국에 놀러 왔다가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샤크라의 멤버로 데뷔한 정려원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틀 받으면서도 어느 순간 ‘이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가’ 하는 질문에 휩싸였다. 처음 드라마에 캐스팅돼 출연 중일 때 그는 앨범 녹음이 있는 날임에도 촬영장에 가고 싶은 자신을 보며 ‘노래보다 연기를 좋아하는 정려원’을 처음 발견했다. “가수로 무대 위에서 뭔가를 표현하는 것보다 연기로 표현하는 것이 더 좋아요. 노래도 잘하고 싶지만 짧은 시간에 감동을 줄 자신이 없어요. 스테디셀러처럼 꾸준히 저를 표현하는 스타일인데 그러기엔 연기가 더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음악에 자신이 없다는 정려원의 고백은 ‘연기에 대한 자부심’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정려원 “나는 새빨간 불나방이다”
정려원 “나는 새빨간 불나방이다”
사진제공, 원엔터테인먼트

글. 고경석 기자 k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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