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예진 씨를 좋아해요. 정말 좋은 배우라고 생각하고, 그녀의 찬란한 연기가 좋아요. 아, 공효진 씨도 너무 좋아해요.” 같은 시장에서 필연적으로 경쟁할 수밖에 없는 동년배 배우의 팬임을 밝히는 여배우의 대답은 신선했다. 좋아하는 배우를 묻는 질문에 외국 배우의 이름을 대거나 선배들을 닮고 싶다는 겸양 대신 박진희는 손예진과 공효진에 대한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동시대를 사는 배우들을 경쟁자 이전에 동료로, 아끼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박진희의 진심은 ‘연기자의 스트레스와 우울 및 자살 생각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월평균 1000만 원 이상을 버는 톱스타부터 100만 원 미만의 단역 배우까지 260명의 여배우를 인터뷰하면서 자살에 쉽게 노출되어 있는 연기자라는 직업군을 위로했다. 그것은 박진희가 배우라는 직업을 사랑하는 또 다른 방식이기도 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첫 번째는 한 작품이 끝날 때마다 슬플 정도로 연기에 몰두하는 것이다.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끝나고 너무 힘들었어요. 그렇게 힘들게 열 살이나 어린 민재를 사랑하게 됐는데 이제는 다시 신영이가 돼서 민재를 사랑할 수 없는 게 슬펐어요.” 그만큼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이신영은 박진희 자신이기도 했다. 10대와도, 20대와도 다르게 사랑하고 일할 수밖에 없는 30대 여성의 일상과 일탈을 연기하며 자신의 30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것은 최근 개봉한 <친정엄마>를 찍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친정엄마>에서 지숙이의 일생을 한 번 살고 나니까 제 인생을 쭉 돌아보게 됐어요. 내 인생은 과연 어땠지? 엄마와 나와의 관계는 어땠지? 어렸을 때는 나의 눈이 아니라 엄마가 바라보는 눈으로 세상을 알아갔다면 나이가 들면서 내 눈이 생기고, 어느 순간엔 친구나 연인의 눈으로 볼 때도 있죠. 저는 그 대상이 계속 바뀌었는데 엄마는 그 눈이 늘 저였을 거예요. 안쓰럽게도.” 늘 엄마에게 “엄마 때문에 내가 못 살아”라고 짜증 부리던 지숙 역시 대학생이 되고, 작가가 되고, 결혼을 하면서 엄마가 되었다. 자신이 엄마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친정엄마를 이해하게 된 지숙과 달리 박진희는 한 작품을 완성해냄과 동시에 엄마라는 존재의 안쓰러움을 절감했다. 그리고 엄마와의 애틋함, 한 번 연기해보지 않았던 죽음이라는 순간을 맞이하기까지 힘든 순간마다 그녀는 영화에서 위안을 찾았다. 다음의 영화들에서 박진희는 엄마와 함께 한 유년시절을 떠올리며, 좋아하는 배우의 열연에 웃으며 한국배우의 40%가 겪는다는 우울증의 늪을 피해갈 수 있었다.




1. <사랑과 영혼> (Ghost)
1990년 | 제리 주커

“처음으로 엄마랑 같이 극장에 가서 본 영화예요. 저보다 엄마가 너무 많이 우셨고 요즘도 TV에서 하면 보실 정도로 좋아하는 영화예요. 어렸을 때는 그다지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가 아니어서 슬프다기보다는 신기했어요. 당시에는 영혼에 빙의되거나 영혼이 살아있는 여자를 잊지 못하는 이야기를 거의 처음 보는 거였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한데 그 때는 ‘와, 세상에 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구나’ 할 정도로 스토리라인이 충격적이었어요. (웃음)”

<사랑과 영혼>은 많은 것들을 남겼다. 발표한지 20년도 더 된 ‘Unchained Melody’를 다시 메가 히트시켰고, 어떤 사랑 고백보다도 많은 이들을 눈물 흘리게 한 “동감”이라는 대사를 남겼다. 그리고 데미 무어와 패트릭 스웨이지에게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우피 골드버그에게는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안겨주었다. 사랑은 그 어떤 난관, 죽음까지도 넘어선다는 명제를 이보다 더 낭만적일 수 없게 담아냈다.



2. <미쓰 홍당무> (Crush And Blush)
2008년 | 이경미

“제가 좋아하는 여배우들이 손예진 씨와 공효진 씨예요. 특히 <미쓰 홍당무>에서의 공효진 씨를 너무 사랑해요. 막 웃으면서 보다가도 눈물이 날 것 같고. 아무래도 저도 여배우라서 그런지 여자들의 영화에 끌려요. 우리나라 뿐 아니라 할리우드도 여자가 주가 돼서 여자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들이 많이 없잖아요. 여배우는 남자 배우를 받쳐주거나, 같이 주연을 맡아도 남자의 이야기에 여자가 묻혀가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더 여자 목소리가 큰 영화들에 관심을 갖고 보게 돼요.”

<미쓰 홍당무>는 무지막지하게 웃긴 영화다. 촌스럽고 궁상맞은데다 착하지도 않은 양미숙(공효진)의 슬랩스틱 코미디와 삽질의 연속은 파란만장하다. 그러나 대폭소의 와중에 이경미 감독은 우리 사회의 위선과 엄숙주의, 편견을 까발리고 시원하게 밟아주면서 <미쓰 홍당무>를 특별한 영화로 만들었다. 공효진이 아닌 다른 대안은 떠올리기 힘든 영화 안에서 서우, 황우슬혜 등 걸출한 기대주들 또한 발견된다.



3. <제8요일> (The Eighth Day)
1996년 | 자꼬 반 도흐마엘

“<제8요일>에는 유독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많아요. 조지가 노래를 하면서 쥐들이랑 노는 걸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장면이 있어요. 그가 꿈꾸는 대로 호박이 뿅 하고 신데렐라 마차가 되기도 하고, 쥐들이 마차를 끄는 말로 변하고. 그런 것들이 보면서 조지가 아파서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아프기 때문에 자유로워지지 않는 건 아닐까 싶었죠. 조지가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어서 어눌하기도 하고 사회에서 활동하기에 어려운 부분은 있지만 사회에서 정상인으로 활동한다고 하는 우리는 그보다 더 큰 정신적인 문제를 많이 안고 있잖아요.”

모두가 이루고자하는 성공이라는 가치에 가깝게 다가간 아리(다니엘 오떼유)에게 어느 날 나타난 다운증후군 환자 조지(파스칼 뒤켄)는 어떤 의미였을까? 늘 일에 얽매여 있던 아리를 하루를 쳇바퀴 돌듯 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로 본다면, 그에게 다시 꿈꾸는 법을 알려주고 낭만을 가르쳐준 조지는 아마도 천사일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조지의 마지막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4. <리컨스트럭션> (Reconstruction)
2003년 | 크리스토퍼 부

“덴마크에서 만들어진 조금은 생소한 유럽영화예요. 시간과 공간과 사람의 감정이 어떤 시간이냐에 따라서 어떤 공간이냐에 따라서 또는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 영상미도 뛰어나고,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해요. 좋아하는 영화를 물어보면 꼭 빠트리지 않고 말할 만큼 제가 굉장히 아끼는 영화예요. 좀 낯설 수도 있지만 여러분들도 한 번 쯤 꼭 보셨으면 좋겠어요.”

영화는 이 모든 건 단지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단언하고 시작한다. 그러나 마음이 아플 거라고 예고한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무엇인지, 그저 주인공의 상상일 뿐인지 분간할 수 없는 네 남녀의 사랑에 관객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짐작하거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나름대로 상상할 뿐이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결국 완전히 혼자가 된 남자의 뒷모습에 마음이 아파올 것이다. 2003년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 수상작.



5. <쉰들러 리스트> (Schindler`s List)
1993년 | 스티븐 스필버그

“전쟁영화를 좋아해서 자주 봐요. 괴롭거나 슬플 때 전쟁영화를 보면서 위안을 얻거든요. 전쟁영화들을 보다보면 ‘저기는 지금 전쟁이 나서 죽느냐 사느냐 하고 있는데 지금 나는 여기서 이런 걸 고민하다니 미친 거 아냐?’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웃음) 그러다보면 제가 고민하고 있는 것들은 별 거 아닌 거처럼 생각돼서 한결 기분이 나아져요. 전쟁영화 중에서도 <쉰들러 리스트>를 좋아하는데 마구 터지는 액션이 아니라 그 안에서 깊게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서인 것 같아요.”

전쟁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휴머니즘의 상징과도 같았던 쉰들러(리암 니슨)의 노력은 유태인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려고 한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공장운영비 절감을 위한 고육책이었다는 이의는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야만과 살육의 광풍 속에서 자신의 재산을 불리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던 쉰들러가 변해가는 모습은 숭고한 의미를 갖기에 충분하다.




“한국에선 여자들의 이야기, 여자들의 영화가 나오기 힘들잖아요. <친정엄마>는 여배우들이 보여주는 여자 이야기라 좋았어요. 두 여배우가 한 작품의 감정선을 끝까지 끌고 가는 영화를 만든 건 의미 있는 일이었어요.” 삶이 얼마 남지 않은 딸과 혼자 남겨질 엄마의 이야기는 눈물을 동반할 것이라고 쉽게 예상된다. 그러나 박진희는 결코 관객보다 먼저 울지 않는다. “신파 연기를 경계”하고 “담백하게 감정을 절제”한다. “스태프들이 NG로 오해”할 만큼 자연스러운, 연기 같지 않은 연기가 진짜라고 생각하는 그녀는 자신의 앞날에도 계획보다는 ‘자연스럽게’를 내세운다.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현재 정해진 작품도 <자이언트> 밖에 없어요. 미리 걱정 안 하는 스타일이에요. 어느 순간 결혼을 해서 일을 관둘 수도 있고, 엄마 역할로 전환할 수도 있고. 아니면 마흔 될 때까지 결혼 안 하고 카리스마 있는 역할들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냥 그 때 그 때 자연스럽게 가려구요. 미리 걱정할 건 없잖아요? (웃음)” 13년의 경력에 낙천성으로 무장한 두둑한 배짱까지, 아직은 한참 남은 박진희의 40대가 벌써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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