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 위기에 놓인 한 마리 호랑이를 보는 느낌이다. 강인한 느낌의 얼굴선과 터질 것처럼 팽팽한 텐션의 근육, 웬만한 일에는 좀처럼 열리지 않을 것 같이 차분하되 강단 있어 보이는 입매를 가진 배우 한정수에게선 이젠 보기 드문 순혈 100퍼센트 마초의 에너지가 흘러나온다.

물론 그에게 ‘짐승남’이라는 호칭을 선사하고 함께 남자로서의 매력을 십분 발휘할 기회를 준 건 KBS <추노>의 최장군 역할이다. 그는 분노에 미쳐 날뛰는 동료 대길(장혁)을 막기 위해 창을 들이밀 정도로 원시적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임무에 앞서 갑옷을 준비할 정도로 철저하고, 또한 여비 마련을 위해 뒤가 구린 행인을 붙잡고서도 딱한 사연에 마음이 약해지는 속정 깊은 인물이다. 즉 옷을 벗고 장작을 패는 퍼포먼스 없이도 충분히 뭇 여성의 마음을 설레게 할 만한 진짜 남자다. 하지만 극중에서조차 본명이 아닌 장군이라는 이름이 위화감 없이 귀에 들어올 수 있는 건, 대본 속에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캐릭터를 완벽하게 육화해낸 한정수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어떤 캐릭터도 그를 거치면 강인한 남자의 기운을 풍긴다.

<추노> 이전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더라도 <추노> 곽정환 감독의 전작 KBS <한성별곡-正>에서는 무예가 뛰어난 동시에 올곧은 성정의 한성부 형방 주부 서주필 역을 맡았었고, 그의 얼굴을 대중적으로 알렸던 SBS <왕과 나>에서는 일당백의 호위내시대장 도금표를 연기하며 유약하고 음흉한 이미지로만 남아있던 내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꿔놓았다. 하지만 이런 매력적인 캐릭터들보다 더 남자다운 존재가 있다면 바로 한정수 자신이다. “20세기는 이데올로기의 시대였지만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이기에 사회에 좀 더 밀접하게 참여하고 싶은 마음으로 연기를 시작”했던 남자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청춘들의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 <한성별곡-正>에 출연하며 곽정환 감독과 인연을 맺었고, 역시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을 담았다는 이유로 <추노>를 선택했다. 그가 순혈 마초인 건, 테스토스테론 과잉 분비의 수컷이라서가 아니라 꿈을 향한 열정과 육체적 원시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한정수가 추천하는, 강렬한 록 사운드를 빌어 세상의 관습에 반대한 다음 뮤지션들의 음악처럼.




1. Nirvana의 < Nevermind >
록, 그리고 저항. 90년대에 이 단어를 가장 완벽하게 구현해낸 밴드로 너바나를 꼽는 것을 주저하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제가 너바나를 좋아할 때만 해도 아직 대세는 LA 메탈이었어요. 그런데 어느새 시애틀 그런지가 대세가 되더라고요. 하지만 그 중에서 최고는 역시 너바나죠. 개인적으로는 펄잼보다 훨씬 앞선다고 봐요.” 본조비로 대표되는 LA 메탈 밴드들이 조금은 달착지근한 멜로디와 화려한 외모를 앞세워 인기를 얻고 있을 때,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의 단순하지만 강렬한 연주는 그대로 록 신의 무게중심을 LA에서 시애틀로 옮겨왔다. 이들의 음악 스타일이 얼터너티브 록이라는 명칭 그대로 록의 새로운 대안을 보여주었다면, 낡은 카디건을 걸친 리더 커트 코베인은 90년대 미국 중산층 젊은이들의 불만을 가사에 담아내는 새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아직도 수많은 록키드들이 너바나의 이름을 언급하는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2. Rage Against The Machine의 < Rage Against The… >
“이름부터 기계에 대한 저항이잖아요. 굉장히 반골 성향의 밴드죠. 처음 들었을 때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음악적으로도 강한 연주에 랩을 가미했잖아요. 대학 때 베이스를 쳤는데 정말 자주 카피한 밴드예요.” 너바나를 비롯한 90년대 초반 미국 록 밴드들이 세상에 대한 불만을 투덜댔다면 그다음 세대라 할 수 있는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은 역사상 그 어느 밴드보다 더 직설적으로 자본주의와 미국 제국주의의 폐해에 대해 고발했다. 하버드 출신 기타리스트 톰 모렐로의 매서운 기타 리프와 보컬 잭 덜라로차의 하이톤 랩핑을 통해 전달되는 그들의 날 선 메시지는 1집의 대표곡 중 하나인 ‘Killing In The Name’에서 특히 불을 뿜는다. ‘배지를 달고 있는 백인이라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게 정당화되고 있다’며 미국 공권력을 비판하는 이 노래의 가사는 아예 앨범의 가사집에 수록되지 못했다.



3. Green Day의 < Dookie >
만약 90년대 미국 펑크 신에서 너바나보다 더 동시대 젊은이들의 패배주의를 잘 드러낸 밴드가 있다면 아마 그린데이일 것이다. 소위 네오 펑크라 불리는 그들의 음악은 단순한 펑크의 리듬 안에서도 다분히 팝적이고 신나는 멜로디를 뽑아내지만 메가 히트 앨범 < Dookie >의 속지에 소개된 것처럼 ‘반경 수 미터 내에는 범접도 못할 것 같은 맹렬한 에너지와 성깔’은 단연 독보적이다. 그 약동하는 에너지 안에서 사회에 대한 비판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찌질함’은 그린데이의 가장 두드러진 개성이다. “< Dookie > 앨범 재킷을 보면 굉장히 난장판에 우스꽝스럽잖아요. 옥상에서 누군가는 똥을 붓고, 핵폭탄이 터지고, 별의별 캐릭터가 난동을 부리고. 저는 그런 해학과 풍자가 좋아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청춘의 무력함을 사지절단에 빗댄 `Basket Case`에서 이런 개성을 확인할 수 있다.



4. U2의 < The Joshua Tree >
“< The Joshua Tree >를 비롯한 U2의 초기 음반을 좋아해요. 리드 싱어 보노는 의식도 뚜렷하잖아요. 그런 뚝심을 가지고 지금까지 자신들의 노선을 유지하는 것 같아요.”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는 U2의 리더 보노에게 “아프리카에 대해 그만 좀 떠들라”고 일갈했지만 사실 사회 문제에 대해 눈을 돌린 U2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그들에게 사회와의 긴밀한 관계는 음악 외적인 활동이라기보다는, 음악 자체가 사회에 참여하기 위한 활동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우리에겐 감미로운 ‘With Or Without You’로 유명한 < The Joshua Tree > 앨범에서 1980년대 영국의 탄광촌 파업을 노래한 ‘Red Hill Mining Town’이나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며 다른 나라들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미국의 모습을 그린 ‘In God`s Country’ 같은 곡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이 곡들은 국내 첫 라이센스 당시 삭제되어 발매되기도 했다.



5. Manic Street Preachers의 < Gold Against The Soul >
한정수가 추천하는 마지막 밴드는 영국의 펑크 그룹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다. 말 그대로 미친 거리의 전도사를 자처하는 그들은 오아시스, 스웨이드, 블러 등의 동시대 브릿팝 밴드보다는 70년대 영국 펑크 신의 전통에 더욱 가까운 뮤지션이다. “영국 펑크 밴드인 클래시의 음악을 듣다가 비슷한 성향의 음악을 찾아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를 듣게 되었어요. 이 친구들도 선배들처럼 굉장히 사회 비판적인 가사를 들려주죠. 개인적으로는 그들의 2집에 있는 `Roses In The Hospital`을 좋아해요.” 기본적으로 서구 문화에 대해 제국주의적이라며 배척하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의장이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를 직접 초대해 공연을 연 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의 좌파적 성격이 얼마나 선명한지 보여주는 한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으로 사회에 참여할 수 있다고 믿은 뮤지션들처럼 연기 역시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 한정수가 최장군에게 가진 아쉬움은 단 하나 “좀 더 꿈을 찾는 인물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추노>의 성공 이후, 검사 조직의 이야기를 그린 <검사 프린세스>에서 아내와의 사별 이후 일에 몰두하는 워커홀릭 검사 윤세준을 연기하기로 한 것은 흥미롭다. 스스로는 “좀 더 의식 있는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현대물에 도전하기 위해” 이 캐릭터를 맡았다고 말하고, 아마도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어떤 캐릭터도 그를 거치면 강인한 남자의 기운을 풍긴다. 정의를 위해 일하는 검사, 그리고 한정수의 눈빛이라면 최장군에게서 미처 다 드러나지 못한 또 하나의 남성성을 기대해볼 만하지 않을까.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