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정이현│나를 매혹시킨 드라마
소설가 정이현│나를 매혹시킨 드라마


“나는 레이스가 달린 팬티는 입지 않는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 가 세상에 나온 것은 2002년 봄이었다. 막 서른하나를 맞이한 소설가 정이현의 등장이었다. 20대 여성들이 ‘된장녀’라는 단어 하나로 재단되기도 훨씬 전, 그는 이미 루이비통 백이라는 소재로 형상화되는 연애와 결혼, 섹스와 순결, 계급과 욕망을 둘러싼 여성들의 딜레마를 섬뜩할 만큼 예리하게 그려내며 주목받았다. 자신을 비롯한 많은 친구들이 “1990년대 IMF가 오기 전 거품시대의 하릴없는 이십대들”이었다고 기억하는 그는 그 시절 왜 소설에선 ‘우리 같은 애들’이 나오지 않느냐가 항상 궁금했다. “소설 속 여주인공들은 마땅히 그래야 할 운명을 타고난 이들처럼 본질적으로 고독해 죽고 외로워 죽는데 우리는 왜 늘 사소한 일상의 욕망에 허덕이고 질투하고 미워하다 괜히 후회하기도 하는지. 그 사이의 괴리가 참 커 보였어요.”

그리고 자신이 발 딛은 그 자리에서 출발한 그의 소설들은 사소하지만 입 밖에 내어 말할 수 없는 여성의 욕망과 80년대를 살았던 소녀의 성장,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기억과 상처 등을 넘나들며 ‘평범한’ 독자들에게 다가갔다. 베스트셀러이자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되며 칙릿 소설이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던 그의 첫 장편 에서도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세상에서 어른이라고 인정하는 나이를 지난다 해서 모두 다 어른은 아니라는 것, 삼십대인 우리도 일상에서 부딪히며 사랑하고 후회하며 매일 조금씩 성장해 간다는 것”이었다. 이 작품을 읽고 작가에게 가장 많은 편지를 보내는 이들이 다름 아닌 군 복무 중의 군인들, 즉 가장 불안한 시기를 지나는 청년들이라는 사실은 가 ‘성장소설’이라는 그의 생각에 힘을 싣는 지점이다.

“어릴 땐 방 안에서 혼자 책을 읽거나 TV를 보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공상을 하는 아이였어요. 저는 어떤 면에서 아주 전형적인 80년대 서울 거주 청소년이라 대중문화에 몹시 자연스럽게 노출된 성장기를 보냈거든요. 초등학교 때 을 보고, 중학교 때는 나 를 듣고, 반포 뉴코아 백화점에서 하는 MBC 예쁜 엽서전에 구경을 가기도 하고, 그런 날들이 저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했을 거고 제 소설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트렌디’ 하다기보다는 동시대성과 구체성을 지님으로써 남다른 힘을 갖는 작품들을 써왔던 정이현 작가가 그동안 자신을 매혹시킨 드라마들을 회상했다.
소설가 정이현│나를 매혹시킨 드라마
소설가 정이현│나를 매혹시킨 드라마
MBC
1993년. 극본 박정화, 이정선. 연출 장용우
“인생에서 한 편의 드라마를 고르라면 망설임 없이 에요. 그 때 저는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여대생이었는데 열네 살 소년에게 어쩌면 그렇게 감정이입이 잘 되던지, 아직 제가 ‘아이’라고 생각했나 봐요. 그래서 이 드라마가 방영되는 날 마치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는 양 부리나케 귀가해 TV 앞에 앉던, 이십대 초반의 어떤 시절이 고스란히 되살아나요. 내 청춘의 드라마가 멋진 캠퍼스 드라마가 아니라 중학생 이야기라는 사실이 좀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하지만 그러고 보면 소년이 주인공인 작품에 유독 매혹되곤 했던 것 같아요. 세상에 막 눈을 떠가는, 연약하지만 동시에 튼튼한 소년.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자랐을까 궁금해지네요.”
소설가 정이현│나를 매혹시킨 드라마
소설가 정이현│나를 매혹시킨 드라마
KBS
2000년. 극본 노희경, 연출 표민수
“이 작품의 원작이 된 故 박영한 선생님의 을 워낙 좋아해요. 장선우 감독이 만든 동명의 영화도 참 좋아하고. 사실 이렇게 좋아하는 원작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에는 대개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은데 은 그렇지 않았어요. 각색이란 이렇게 하는 거구나,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죠. 두 사람은 그저 절절하게 사랑했을 뿐인데 누군가에겐 의도하지 않은 가해자가 되는 상황에 기막혀 하기도 하고 가슴 아파하기도 했어요. 가장 누추한 곳에서, 사랑의 본질에 관해 탐구하는 명작으로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듯해요.”
소설가 정이현│나를 매혹시킨 드라마
소설가 정이현│나를 매혹시킨 드라마
SBS
2005년. 극본 송재정, 김도상. 연출 김병욱
“김병욱 감독님의 시트콤을 다 좋아해서 하나를 고르기가 어렵지만 이 작품은 조기종영을 맞은 비운의 시트콤이라 아쉬움이 커요. 특히 소유진 씨의 캐릭터는 정말 최고였죠. 저는 김병욱 감독님이 인간을 바라보는, 즉 자신의 캐릭터를 바라볼 때 묘하게 따뜻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냉정하리만치 차갑기도 한 그 시선을 좋아해요. 창작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이 한 작품의 창작자가 어떤 위치에 서서 작품에 관여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게 되는데, 그 분은 늘 인물에서 반 발자국쯤 떨어진 관찰자의 입장에 서 있는 것 같아요. 자신이 만든 인물들을 사랑하지만 생래적으로 더 이상 깊은 곳까지 개입하지 못하고 떨어져서 지켜보는 거죠. 계급이나 경제적 문제 같은 사회적 아젠다를 일상의 인물들 속에 무심한 듯 툭 던져놓고서 절대로 어떤 결론을 내리지 않는 면도 좋아요. 그 현실적인 혼란 속에서 인물들을 살아가게 하는 거죠. 그런 면에서 장르는 다르지만, 저와 닮은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시체가 발견된 것은 5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정이현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 는 그가 이전에 썼던 작품들에 비해서도 한층 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가까이서, 그리고 넓은 눈으로 바라본 작품이다. “제목 그대로 며 제각각 마음의 문을 닫고 있던 사람들이 ‘아, 나도 너를 몰랐구나’라고 아주 작게 인지하는 순간에 대해 쓰고 싶었던 마음에서 출발했다”는 이 작품은 하나의 이름 없는 시체로부터 개인으로, 가족으로, 집단으로, 사회로 차근차근 이야기를 넓혀 나가면서도 재미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등단 초 소설이란 ‘진짜 짝퉁’ 같다고 말한 적 있으며 지금도 작가로서 마지막까지 놓고 싶지 않은 것은 “내가 사는 이 시대. 지금 이곳을 바라보는 나만의 시선”이라는 그의 바람이 키워낸 결과물이다. “글을 쓰게 된 이유를 확실히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아마도 ‘닿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요. 제가 오늘 밤 제 책상 앞에서 타이핑한 한 줄의 문장을, 몇 년 후 먼 곳에 사는 낯선 독자가 읽는다는 것. 가끔은 그 사실에 전율이 일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속내를 꺼내놓는 그의 문장들은 앞으로도 더 멀리, 더 많은 이들에게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진제공. 문학동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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