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관객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오페라의 유령>, <노트르담 드 파리>, <맨 오브 라만차>는 각각 가스통 르루의 <오페라의 유령>과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 드 파리>,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를 바탕으로 제작된 뮤지컬이다. 외국 뮤지컬들에 비해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한국소설 원작의 뮤지컬이 우리나라에서도 선보인다. 김훈의 동명소설을 밑그림삼아 제작된 뮤지컬 <남한산성>의 프레스콜이 첫공연을 이틀 앞둔 10월 7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열렸다.

<남한산성>은 인조 14년에 일어난 병자호란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인조가 청을 피해 피신한 남한산성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약 한 달여간의 피난처 생활 속에는 최명길(강신일, 오상원)을 필두로 한 주화파와 김상헌(손광업)을 중심으로 한 주전파의 대립, 기생 매향(배해선)을 사이에 둔 오달제(이필모, 김수용)와 정명수(예성, 이정열)의 삼각관계가 펼쳐진다. <남한산성>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여느 공연장에서 볼 수 있었던 붉은 막 대신 대나무를 연상시키는 녹색로프로 만든 막이다.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느낌의 대나무를 전체 콘셉트로 내세워 그들이 처한 공포와 추위, 두려움을 세트를 통해 느낄 수 있도록 제작됐다.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서범석)에게 두터운 신임을 얻은 정명수가 조선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1막 2장에서 리프트를 이용해 점차적으로 배우들을 등장시키고, 천을 이용해 홍타이지의 후광을 만들어내는 등 웅장하면서도 독특한 무대를 연출한 것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슈퍼주니어의 예성, 드라마와 영화로 친숙한 이필모, 강신일 외 뮤지컬 배우 김수용, 서범석, 배해선, 성기윤 등 탄탄한 출연진들도 관객들의 시선을 모은다. 뮤지컬 <남한산성>이 단순히 규모가 큰 재연극이 아닌, <노트르담 드 파리>처럼 그 시대 민중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작품이 될 수 있을지는 10월 9일부터 11월 4일까지 공연되는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죽어서 살겠다” 오달제, 이필모-김수용
사랑하는 연인 매향과의 눈물 섞인 이별을 하고 한양 행을 선택한 오달제는 이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직접 남한산성으로 들어간다. “명은 지는 해요, 청은 뜨는 해”라고 인조에게 청과의 화해를 청하던 최명길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조선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도 버리는 강인한 기개 외에도 매향, 부인 남씨(임강희)와의 멜로도 큰 축으로 선보인다. 아직 KBS <솔약국집 아들들> 송대풍의 이미지가 강한 이필모는 매향, 남씨와의 멜로에서, 뮤지컬 <렌트>와 <헤드윅> 등에서 굵은 연기를 보여준 김수용은 조선을 향한 애국적인 부분에서 더욱 두각을 나타낼 것으로 보인다.

“날 천대한 조선 놈들 다 밟아주겠다” 정명수, 예성-이정열
광해군 10년 명과 청의 전투에 파병되었다가 청의 포로가 된 정명수는 그 곳에 머물며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의 신임을 얻는다. 노비 출신이었던 그는 자신을 천대한 조선에서 청나라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와중 오달제의 연인 매향을 사랑하게 된다. 무려 열다섯 살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정명수 역에는 슈퍼주니어의 리드보컬 예성과 <노트르담 드 파리>, <삼총사> 등의 뮤지컬에서 넘치는 성량을 자랑하던 이정열이 더블 캐스팅되었다. <남한산성>을 통해 처음으로 뮤지컬 무대를 밟는 예성은 종종 과장된 액션이 도드라보이기도 하지만, 선배 뮤지컬 배우들에 뒤지지 않는 파워풀한 노래를 선보이며 존재를 확인시켰다.

추위에 더욱 단단해지는 매화 매향, 배해선
대범하고 지혜로운 기생 매향은 오달제만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여인이다. 청과 목숨 걸고 싸우겠다는 다짐을 하고 떠난 오달제를 뒤쫓던 그녀는 그의 아이를 잉태한 부인 남씨를 만난다. 남씨를 “형님”이라 따르며 보필하지만 두 사람은 청의 포로로 잡히고, 이후 남씨를 탈출시킨 매향은 어긋난 사랑을 해온 정명수 칼에 찔려 쓰러진다. 매향과 남씨는 굳은 심지의 오달제를 물심양면 내조하는 캐릭터이지만, 뮤지컬을 위해 새로 창조된 인물들이다. 매향은 최근 배해선이 연기한 뮤지컬 <삼총사>의 복수를 이뤄내는 강인함과 동시에 아토스를 향한 사랑을 가진 밀라디를 떠오르게 한다.

관전 포인트
14년 전 제작된 뮤지컬 <명성황후>는 국내를 넘어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서도 선보이며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제작된 많은 대형 역사 창작뮤지컬들은 수십억이 투입되는 대규모 세트와 웅장한 음악, 색다른 소재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지 못했다. 특히 2007년에는 정조의 개혁을 다룬 <화성에서 꿈꾸다>, 조선시대 기생 이야기 <해어화>, 드라마를 무대로 옮긴 <대장금> 등 시대도, 소재도 다른 작품들이 다수 제작되었지만 순탄히 공연을 이어가지 못했다. 대부분의 대형 역사 창작뮤지컬들은 거대한 몸집에 비해 극을 채우는 콘텐츠의 빈약함과 허술함으로 큰 호응을 얻지 못했고, 이후 수정보완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이미 검증이 완료된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지만, 형식적인 면에서는 앞서 언급한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뮤지컬 <남한산성>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결과가 궁금해진다.

글. 장경진 (thre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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