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김남길과의 인터뷰를 부러워했다. MBC <선덕여왕>에서 비담의 첫 등장, 닥치는 대로 사람을 베어 피가 흩뿌려진 얼굴 위로 그의 이름과 정체를 알리는 자막이 뜨던 순간 전율을 느낀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MBC <굳세어라 금순아>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해 영화 <후회하지 않아>, KBS <굿바이 솔로>를 지나 영화 <미인도>와 <모던 보이>를 거쳐 <선덕여왕>을 만난 배우 김남길은 비담을 통해 자신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예측불가의 커리어를 거쳐 예측불허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그에게 궁금한 것은 물론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비담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이것은 요즘 비담으로 살고 있는 김남길과 나눈 대화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처음 <선덕여왕>의 비담이라는 역을 제안 받았을 때 어떤 상황이었나.
김남길:
감독님들이 <미인도>를 보시고 나를 떠올렸다고 들었다. 하지만 원래 나는 당분간 사극을 안 할 생각이었다. 원래 전작에서 했던 장르나 비슷한 캐릭터는 좀 피해가려는 편이다. 아무래도 연기 논란을 피해가려면 (웃음) 그런 게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 그래서 처음에는 일단 사극이라는 이유로 <선덕여왕> 출연 여부를 고민했다.

“비밀병기란 말이 굉장히 부담됐다”

그러다 출연을 결정짓게 된 이유는 뭔가.
김남길:
먼저 감독님들을 만나 뵙고 캐릭터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비담은 실존했던 인물이긴 하지만 그동안 역사적으로나 드라마에서나 한 번도 제대로 조명된 적이 없고 역사책에도 “비담의 난을 일으켰다”는 한 줄의 설명 정도만 있다는 게 매력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인 캐릭터와 달리 스펙터클하기도 하고, 내가 보여주는 것에 따라 정말로 비담이 그 시대에 그런 삶을 살았을 거라는 상상을 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에. 외형적으로는 감독님들이 <와호장룡>의 무사 느낌을 얘기해 주셨다. 그리고 지금까지 극 중에서는 비담이 별다른 무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지만 앞으로는 창을 들고 나올 예정인데 그런 건 <적벽대전>의 조자룡 이미지에서 가져온 부분도 있다.

김영현, 박상연 작가와도 논의한 부분이 있나?
김남길:
한번 만나서 얘기를 해 보고 싶다고 하셔서 대본을 먼저 받아 읽고 만났다. 작가님들은 비담이라는 인물이 극 초반부터 충분히 설명되어 온 다른 주인공들과 다르게 갑자기 나타나서 두 회 정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납득시켜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비담이 어떻게 살아왔고, 자라왔고 문노와의 관계는 어떤지 등 전체적인 상황을 많이 얘기해 주셨는데 듣다 보니 상당히 만화적인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비담이 어떤 이미지일까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작가님들 말씀을 듣고 나니, 마침 <슬램덩크>를 다시 읽은 지 얼마 안됐을 때라 그런 방향을 떠올리게 됐다.

원래 만화를 좋아하나?
김남길:
좋아한다. <슬램덩크>를 다시 읽은 건 영화 <폭풍전야>를 찍고 있을 때였는데 혼자서 ‘왜 드라마나 영화를 이렇게 못 만들까. 이런 표정, 이런 표현이 정말 좋은데’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영화 하시는 분들을 만날 때마다 “만화에 나오는 입체적인 컷, 긴 호흡, 풀샷…이런 느낌 너무 좋지 않아요? 이런 걸 영화에 그대로 옮겨올 수만 있으면 정말 좋은 장면을 많이 나올 수 있을 텐데.” 그랬더니…

그랬더니?
김남길:
뭐라고 하시더라. “그럼 만화 해~ 만화 그려!” 하시면서. (웃음)

초반부터 ‘<선덕여왕>의 비밀병기는 비담 김남길, 최종병기는 춘추 유승호’라는 언급이 있었다. 캐릭터에 대해 알려진 것도 적었고 김남길이라는 배우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도 지금만큼 높지 않았는데 부담스럽진 않았나?
김남길:
아…그 얘기가 나올 때마다 ‘왜 도대체 비밀병기란 얘기가 자꾸 나오는 거야? 제작발표회 때 나왔으면 됐잖아!’ 그랬다. (웃음) 원래 작가님들은 비담이란 캐릭터에 대해 최대한 오픈하지 말자는 의견이셨고, 그러다보니 기획 단계에 있었던 비담의 아역 부분도 과감하게 없어져서 비담은 어느 순간 어느 정도 큰 뒤에 나타나는 캐릭터가 됐다. 그래서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나도 일반 시청자들처럼 작품을 보면서 울다 웃다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다음 주에 들어간다고 하셔서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 나서 다시 ‘비밀병기’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하니까 청심환이라도 찾고 싶고…(웃음) 그런 부담이 많았는데 지금은 부담감보다 책임감이 커졌고, 연기에 소홀함이 있으면 안 된다는 채찍질을 스스로 하게 되니까 도움이 된다.

“백지 상태였던 비담이 서서히 욕심내는 걸 표현하게 된다”

첫 등장이 강렬했다.
김남길:
일단 작가님들이 임팩트 있는 신을 써 주셨지만 그걸 어떻게 시청자에게 보여주느냐가 배우와 감독 입장에서의 고민이었다. 갑자기 등장하면서도 지금까지의 흐름에서 튀지 않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방법이 뭘까. 21, 22회에서 비담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그 이후에도 흐름을 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때 제일 스트레스와 고민이 많았다.

비담은 그동안 사극에서 볼 수 없었던 캐릭터고 <선덕여왕>에서도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현대어에 가까운 말투를 사용하는데.
김남길:
그래서 처음엔 작가님께 “시청자 게시판을 못 보셨는지요, 제가 이 모든 질타를 다 감수하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러기도 했다. (웃음) 하지만 비담은 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았기 때문에 궁중화법을 알지 못한다는 설명을 들으니 표현을 잘 해서 설득력이 있다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또 당시 다른 인물들이 너무나 어둡고 힘든 일들이 많아서 내가 나온 뒤에도 너무 이야기가 무겁게만 가면 명색이 비밀병기인데 ‘비밀스럽게 시청률 하락을 도모하는 인물’이 될까 봐. (웃음) 그래서 약간은 모험이었지만 유쾌한 부분도 좀 넣어서 방방 뜰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되 문노를 만날 때는 천진난만하면서도 예의를 다 배우지 못하는 느낌의 껄렁거림을 보여주려고 했다. 이런 것들은 편하게 연기할 수 있도록 잡아주신 감독님들 덕이 크다. 김근홍 감독님도 그러시지만, 박홍균 감독님은 특히 배우들에게 많은 부분을 믿고 맡겨 주신다. 감독님들 최고!

비담은 외적인 설정이나 비주얼 외에도 복잡한 내면을 지닌 인물인데 어떻게 접근했나.
김남길:
비담은 그냥 순수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순수하기 때문에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덕만 같은 친구가 생겨서 너무 좋았고, 그래서 남들이 심각한 상황에도 혼자 들떠서 딴 생각 하는 애. 남들은 그걸 보고 뭐라 하지만 얘한테는 그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친구들과 뭔가를 함께 한다는 설렘이 중요했던 거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그 백지 상태였던 비담이 서서히 뭔가를 가지고 싶어 욕심내는 걸 표현하게 된다. 일단 비담이 태생적으로 가진 천성이나 기질은 미실과 진지왕으로부터 물려받은 건데, 미실이 악역이니까 악한 부분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원래는 왕자의 신분이었고 대업을 이루려는 기질을 갖고 있던 것이 문노의 손에서 자라며 억제되었던 것뿐이다.

어린 시절의 비담이 수십 명의 사람들에게 독을 먹여 죽인 것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김남길:
비담은 그냥 문노가 시킨 대로 중요한 서책을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한 일인데 방법이 잘못된 것뿐이다. 그냥 스승님께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고, “잘 했다”는 말 한 마디가 듣고 싶었던 건데, 문노가 보기에는 어린 아이가 한 짓이라기에는 너무나 잘못된 일이었던 거지. 사실 문노가, 애들을 안 키워봐서 그렇다. (웃음) 어린애 키우는데 국선이 화랑 다루듯 해서는, 그래서 (고)현정이 누나도 문노를 보면 “왜 남의 애를 데려다 키워서 이 꼴을 만들어 놨냐” 면서 장난친다. (웃음)

선과 악이 공존하는 캐릭터인 비담이 지금까지 ‘선한 편’인 덕만의 쪽에 가까웠다면 앞으로는 점점 바뀌어 갈 텐데.
김남길:
아무래도 사람이다 보니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고 나서는 비담도 우리 엄마가 누구고 아버지는 누구며 왜 나를 버렸는지가 궁금하고 속상해진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비담이 선한 아이지만 가끔은 잔혹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앞으로는 내 안에 있는 악마가 꿈틀거리는 걸 숨긴 채 선한 척하며 사람들을 속여 나가는 인물이 되지 않을까 싶다.

“배우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게 궁극적인 바람”

훗날 ‘비담의 난’을 일으키기까지 상당한 갈등의 과정이 있을 것 같다.
김남길:
이를테면 덕만을 도와서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 여자가 알고 보니 내 어머니였다는 걸 알게 되면 변화가 크겠지. 하지만 비담의 성격상 어머니라서 슬퍼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걸 핑계 삼아 덕만에 대한 연민의 정 같은 걸 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모든 것을 덕만과 유신, 문노가 공유하는 면 때문에도 서서히 관계가 틀어지게 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미실과 비담의 가장 닮은 점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는 게 아닐까.
김남길:
그런 것 같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갖고야 말겠다는 야망과, 앞을 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려고 하는 의지가 미실을 닮았다. 외모는 문노를 많이 닮았다고들 하던데. (웃음)

그렇다면 비담이 아닌 김남길에게 있어 가장 큰 욕망은 뭔가.
김남길:
배우는 어쨌든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연기다. 내 연기가 우리나라에서 인정받아 사람들이 그걸 보며 울고 웃어준다면 좋겠고, 우리나라에서 공유할 수 있는 정서를 좀 더 폭넓게 가져가 아시아에서 담아낼 수 있는 정서까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다. 말 그대로 배우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게 궁극적인 바람이다.

스타에 대한 동경이 없다고는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스타가 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 게 아님에도 지금은 사실상 스타가 됐다.
김남길:
에이, 스타는 무슨. 스타란 <강철중>에서 내가 죽였던 (이)민호 정도는 돼야지. 민호랑 친하게 지낼 걸 그랬다. (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많은 대중에게 알려짐으로써 좋은 점이 있다면.
김남길:
영화를 하면서 좋은 선배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 분들도 대중성을 바라고 연기하시는 건 아니고, 음, 아예 없다고 하면 그래도 거짓말이겠지만. (웃음) 어차피 돈이나 인기도 연기를 하다 보면 따라오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걸 배우면서 생각한 건, 세상에 저예산이어도 우리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좋은 시나리오들이 참 많은데 ‘누가 하면 투자가 된다’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언젠가 나에게 대중성이 생기면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하는 데 있어 제작사나 감독이나 스태프들이 그 작품을 조금이라도 여유롭게 완성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나에게 조금이라도 인지도가 생겼다면 좋은 점은 그거다.

단역에서 조연으로, 주연급으로, 그리고 이제 스타성까지 갖춘 배우가 되었는데 최근 쓴 글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그 순간이 너무나 외롭다” 라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배우로 산다는 건 어떤 것인가.
김남길:
살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그래서 가끔 주위에서도 ‘넌 네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고 살아서 좋겠다’는 말을 하는데 나는 ‘그렇기 때문에 외롭다’고 대답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다 보면 처음에는 행복하지만 점점 타협을 하게 되고, 세상의 이중성이나 금전적인 문제와 타협하면서 내 정체성이 흔들리는 경우가 있다. 사실 지금까지는 그러지 않고 버텨 왔고, 원래 힘들었는데 앞으로 뭐 얼마나 더 편하게 살겠다고 그런 선택을 하겠냐 싶긴 하지만. (웃음) 어쨌든 아이러니하게도, 연기할 때는 정말 행복하다. 그리고 그만큼 외롭다.

인터뷰. 최지은 (five@10asia.co.kr)
인터뷰. 위근우 (eight@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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