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 잠이 들었던 걸까. 전화벨 소리에 퍼뜩 놀라 눈을 뜨자 노트북 모니터엔 정리되지 않은 2009년 하반기 경제 전망 기사가 두서없이 나열되어 있었다. 반사적으로 모니터 우측 하단의 시간을 보았다. 새벽 2시 반. 다시 핸드폰을 쳐다봤다. 발신자 명 ‘찐따’. 아는 사람이다. “아, 건우 씨 웬일이세요?” “늦은 시간에 전화 드려 죄송합니다. 기자님께서 미리 알아두시면 좋을 거 같아서… 소희가… 방금 죽었습니다.” 소름이 돋았다. 뭐라 뭐라 위로의 말과 다른 매체보다 먼저 연락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말 따위를 지껄였고, 수화기 너머로 “…이제 은재 씨와 결혼… 니노를 입양…”이란 말이 들렸던 것 같다.

그의 이름은 W. 경제지 <10 이코노미>의 기자다. 방금 전화 온 민건우와는 몇 달 전 2009년 상반기 30대 기업 분석 기사를 쓸 때 재계 26위 천지건설 취재 때문에 만났다. 도무지 제대로 정신 박힌 인간이 없는 재벌가 가운데서도 천지건설을 둘러싼 정하조, 민 여사, 구은재 일가의 관계는 그야말로 막장이었다. 그러니 기자들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민 여사의 친딸인 민소희의 상해 소식은 대서특필됐다. 곧 범인을 찾았지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바로 정하조 회장의 며느리 신애리였다. 니노를 방치해 잃어버릴 뻔하게 한 민소희에게 분노해 그날 밤 취한 그녀를 고수부지로 데려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범행이 밝혀지기 전 위암 말기인 신애리는 어느 날 강한 복통을 호소하며 죽었고, 경찰은 정황 상 신애리의 단독 범행으로 잠정 결론지었다. 그리고 오늘 새벽, 의식을 잃은 채 한 달 넘게 누워있던 민소희가 결국 죽었다. 정말 막장이다. 빨리 데스크에 특종을 알려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W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예전에 취재하며 사람들이 신애리에 대해 진술했던 걸 녹취한 문서파일을 열어보았다. 희대의 악녀인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다시 깨어났다.

백미인: 내가 진짜 우리 수빈이 눈 다친 것만 생각하면 애리년 이것이 살아 돌아다니는 걸 볼 수가 없어. 그딴 것도 엄마라고 니노 이것은 애리년 밥만 몰래 꼬불쳐 두고 있고…(울먹거림) 어떻게 그런 것한테서 니노 같은 심성의 애가 나왔는지…
정하조: 이미 우리와는 상관없는 사람이야. 니노 엄마라는 것 하나로 어떻게 우리 집안에 들어오고 싶은 모양인데 난 우리 니노 절대 그런 엄마 밑에서 못 키워.
정교빈: 왜 이러세요. 저랑 걔 끝난 지 오랩니다. 걔 잔머리 굴리는 거 이제 안 통해요. 애 안 생긴다고 한약 지어먹던 애가 쫓겨나더니 갑자기 둘째 생겼다고 하질 않나. 그게 말이 안 되는 게 나중에 보니 한약은 꼬박꼬박 줄었더라고요. 그저 우리 니노만 불쌍할 뿐이죠.
구은재: 더는 애리 괴롭히지 마세요. 그 아이 안 그래도 힘들어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애리가 마음 편히 저 세상 갈 수 있도록 니노 맡아주는 것뿐이에요.
구강재: 나쁜 년이에요. 나를 배신하고 교빈에게 간 것도 모자라 교빈이 아이를 내 아이라고 거짓말하기까지 했어요.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 게 우리 집안 내력이라나. 니노가 복숭아 들어간 음식을 먹고 몸을 벅벅 긁은 건 사실이지만 나중에 확인해보니 알레르기도 아니었더라고요.
민소희: 뭐요? 신애리? 말도 꺼내지 마요! 이젠 구은재보다 더 짜증나는 존재니까. 혹처럼 달고 다니는 꼬맹이도 밉상이고.

이상하다.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찜찜한 기분이 W를 짓눌렀다. 그의 입에선 신음과 함께 알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확인하려면… 아니야… 신애리는 화장해서 뿌려졌잖아… 아니, 내가 미친 생각을 하는 걸 거야.” 다음날 W는 정하조 회장의 집과 신애리의 한약을 지은 한의원, 신애리가 입원했던 병원, 그리고 민 뷰티숍 근처 공원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것만으로 그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갑자기 누군가 아는 척을 했다. “W 기자님이시죠?” 민건우였다. 구은재와 니노도 함께였다. 민 뷰티숍에서 나오는 길 같았다. “급하게 느껴지시겠지만 내일 몇 몇 지인에게만 얘기하고 결혼식을 할 예정입니다. 어차피 소희 아니었다면 우리 이미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테니까요. 니노에게도 엄마 아빠가 안정적인 가정을 만들어줘야 하고요.” 대화에 니노가 끼어들었다. “아저씨, 아저씨도 오세요. 오셔서 축복해주실 거죠?” 천진하게 웃는 사이로 빠진 앞니가 도드라졌다.

모두들 미친 사람을 보듯 W를 쳐다봤다. 결혼 피로연장에서 그가 갑자기 마이크를 잡고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이다. “민소희 살인사건의 범인은 바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성격 급한 정하조 회장이 누구보다 먼저 외쳤다. “뭐? 이런 미친… 저 놈 당장 끌어내!” 하지만 W의 다음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 범인은 신애리 살인사건의 범인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패닉에 빠져 웅성거리는 사이 그는 말을 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민소희 사건의 원인은 보복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애리를 범인으로 생각했죠. 하지만 저는 발상을 달리 해 보았습니다. 민소희의 죽음으로 이득을 얻는 사람은 누구일 것인가.”

갑자기 구은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민 뷰티숍을 민소희 대신 물려받은 구은재 씨? 아니면 훌훌 털고 사랑을 찾아 결혼하게 된 민건우 씨?” 건우의 얼굴은 반대로 시뻘겋게 분노로 달아올랐다. “여기서 잠시 신애리 쪽으로 이야기를 돌리죠. 신애리는 둘째를 임신했다고 했지만 불임치료약은 계속 줄어들었습니다. 제가 병원기록을 확인해본 결과 신애리는 아이를 임신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불임치료약을 계속 먹였던 거죠. 몰래. 아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가뢰과 딱정벌레를 건조해 만든 반묘란 약재는 불임치료를 위해 쓰일 때가 있습니다. 한의원에서 확인해보니 이번 처방에도 포함시켰더군요. 칸타리딘이라고도 하는 이 물질은 극심한 복통을 불러일으키는 치명적인 독극물이기도 하죠. 누군가 칸타리딘이 들어간 약을 규정치 이상으로 몰래 먹였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요? 모두들 신애리가 말기암 환자라는 것 때문에 복통을 호소하며 죽은 것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죠. 하지만 담당의의 말을 들어보면 그녀의 죽음은 생각보다 빠른 것이었습니다.” 이번엔 백미인이 반박했다. “무슨 소리예요? 그럼 우리집에서 독극물을 먹었단 건데 어떻게 애리 고 년만 독을 먹고 다른 식구는 멀쩡하단 거예요?” “그게 핵심입니다. 따로 그녀의 식사에 독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다시 여기서 민소희 쪽으로 넘어가보죠.”

허영심이었다. 범인의 이름을 마지막에 드라마틱하게 밝히겠다는 W의 욕심은. “신애리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상태인 민소희를 민소희 차로 이동해 고수부지에 버렸지만 범행을 저지르진 않았다고 진술했습니다. 민소희가 몸을 못 가누는 상태였다는 건 대리운전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된 사항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음주 때문이 아닌, 이미 범행을 당해서라면 어떨까요? 경찰은 버려진 민소희가 ‘퍽치기’ 당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고수부지 주변을 조사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죠. 하지만 저는 장소를 바꿔 민 뷰티숍 근처를 조사했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민소희 사건이 벌어진 날 낮에 누군가 공원 노숙자들에게 돈이 많지만 아이를 버린 매정한 뷰티숍 사장에 대한 이야기를 떠벌였다고요.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설득력이 있었다고, 아니 거짓말이라 의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잠시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종합해 보겠습니다. 그는 민소희가 죽었을 때 이득을 얻는 사람입니다. 그 이득은 바로 오늘 결혼을 통한 안락한 삶이죠. 두 번째, 그는 민소희에 대한 범행을 유도한 후 분노한 신애리가 민소희에게 접근해 주요 용의자가 될 것을 예상했습니다. 세 번째, 그는 용의자이자 가장 중요한 증인인 신애리를 없애기 위해 칸타리딘이 포함된 약을 규정치 이상 식사에 섞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오늘 누구보다 사랑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너무 오래 끌었다. 다음 말을 잇기엔 교빈의 스테이크용 나이프가 너무 깊게 W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교빈이 울먹이며 속삭였다. “나… 여태 한 번도 제대로 된 아빠 노릇 해준 적 없어. 더 이상 아무 말 하지마…” 온 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모든 것이 희미해지는 가운데 W의 눈에 예의 그, 니노의 천진한 미소와 빠진 앞니만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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