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 안 되는데, 저 연출 계속 해야 하는데…” 이젠 정말 교수다워 보인다는 말에 그는 웃었다. 2005년 MBC <내 이름은 김삼순>의 뜨거웠던 인기가 가라앉기도 전 방송사를 떠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길을 걷기 시작했던 김윤철 감독은 “학교에서 4년을 보내고 난 요즘에야 겨우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금 알 것 같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는 이론과 현장을 가장 균형 있게 오간 드라마 감독으로 손꼽힌다. 91년 MBC 입사 후 <짝>, <미찌꼬> 등의 작품을 연출했던 김윤철 감독은 2001년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영화 연출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에는 단막극 <늪>으로 몬테카를로 TV 페스티벌 골드 님프상을 수상했고 시청률 40%를 뛰어넘으며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내 이름은 김삼순>과 흔해 보이는 연애 이야기를 흔하지 않게 그려 냈던 <케세라세라> 등 인상적인 미니 시리즈 두 편을 만들었으니 연출가로서 그의 성적표는 독특한 포트폴리오와 비교적 높은 평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셈이다.

국문학을 전공하던 대학 시절에는 연극반에서 연극 연출에 빠져 지냈고, 졸업 전 방송사 시험에 ‘덜컥’ 붙는 바람에 드라마 감독이 되어 “큰 고생 하지 않고 비교적 평탄한 인생을 살았던” 그는 동료와 선배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른여섯의 나이에 떠났던 유학 생활에서 배운 것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시나리오, 연기, 연출을 처음부터 다시 배웠어요. 아주 기초적인 것들이었지만 조연출과 연출 과정을 거친 뒤에 그걸 다시 배우는 시간을 가진 게 의미 있었어요. 무엇보다 내가 뭘 모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게 중요했지요. (웃음)”

그래서 “가르침으로써 배운다”라는 일본 한 요리 학교의 교훈에 100% 공감한다는 김윤철 감독이 학생들에게 요즘 가장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는 간단한 명제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작품에 대한 애정이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건 학생들에게도, 저 스스로에게도 하는 얘기에요. 거기 더해 계속 공부하는 것, 그것만 있으면 모든 작품을 다 잘 할 수는 없더라도 계속 해 나갈 수는 있어요. 창작하는 사람들은 그것 말고는 기댈 대가 없어요. 제가 해 보니까 그래요” 그리고 그 누구보다 ‘공부’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감독인 그가 보며 공부했던, 그리고 수업의 교재로도 종종 사용한다는 드라마는 바로 이 작품이다.

<십계> (Dekalog) 폴란드 국영 TV
1988년, 크쥐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영화로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저도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과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극장 판을 먼저 접했지만 <십계>는 폴란드 국영방송국을 위해 만들어진 10부작 TV 시리즈물이에요. 미국에 공부하러 갔을 때 비싼 가격으로나마 중고로 전집 DVD를 구해 보며 좋아했는데 한국에 돌아오니 서점에서 19000원에 세일하고 있어서 반갑게 샀지요. (웃음) 드라마라는 건 대개 극적인 삶을 그리는 거잖아요. 사랑이든 돈이든 지위든, 뭔가를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제가 <십계>를 보면서 느낀 건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 나아가는 삶이 아니라 무수히 반복되는 삶, 뭔가를 얻고자 하는 삶이 아니라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삶도 드라마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오히려 그들의 삶을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극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그걸 찾아내지 못해서 그리지도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자기반성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지요.

특히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으로 알려진 ‘어느 사랑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우체국에서 일하는 소년이 이웃집 여자를 끊임없이 훔쳐보고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는데 그걸 안 여자가 이 소년을 유혹해서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소년이 결국 자살 시도를 해요. 그런데 여자가 뒤늦게 소년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었을 땐 소년이 “더 이상 당신을 훔쳐보지 않는다”며 사랑을 끝내지요. 대부분의 영화와 드라마는 사랑을 ‘하는’ 사람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그리지만 사실은 사랑을 ‘받는’ 사람의 시점에서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사랑과 죽음이 살인과 자살처럼 삶의 앞면과 뒷면이듯 그 관계도 언제든 뒤바뀔 수 있고 또 사실은 같은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감독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시리즈는 단순하고 소박하면서도 본질적인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찍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에요. 학교에서 일하며 영상 뿐 아니라 미술, 건축, 산업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의 교수님을 만나 뵈었는데 그 분들이 말씀하시는 미학의 공통된 첫 번째 원칙은 ‘단순함’ 인데, <십계>는 열편의 촬영감독이 모두 다르지만 키에슬로프스키의 소박한 시선과 프레임은 전체를 관통하고 있어요. 바르샤바의 겨울 풍경, 쓸쓸한 아파트 회벽, 숲, 사람들의 외로운 얼굴, 그들이 살고 있는 조그마한 아파트와 사무실 같은 것들을 바라보는 그의 숨결이 느껴지는 걸 보며 지금 세상에는 거대한 것, 화려한 것, 심오한 것을 찾아 쓰는 사람들로 넘쳐나지만 사소한 것, 소박한 것, 평범한 것은 누가 찾아 쓰고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요. 그런데 키에슬로프스키는 이미 20년 전, 우리가 서울 올림픽을 열던 해에 바로 그것에 대해 폴란드 사람들에게 물었던 거지요.”

“그러니까 연출은 정말 끊임없이 공부해야 돼요”

김윤철 감독은 SBS와 일본 아사히 TV가 함께 제작해 9월 방영 예정인 텔레시네마 프로젝트의 <결혼식 후에>의 촬영을 4월 초에 마쳤다. <고쿠센>의 작가 요코타 리에가 대본을 쓰고 신성우, 예지원이 주연을 맡은 이 작품은 오래 전 음악 동아리에서 만났던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남녀들이 그 중 한 커플의 재혼으로 15년 만에 다시 만나며 벌어지는 며칠간의 에피소드를 담는다. 언어와 정서가 전혀 다른 작가와의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주인공들과 비슷한 또래의 동아리 선후배, 동기들과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만나오며 사람들이 변하거나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번 작업의 결과물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고 걱정도 된다는 그가 오랜만의 현장 연출에 대해 설명한다. “찍으러 나갔을 땐 즐거웠지요. 그런데 요즘 편집실에 와서 내가 찍은 컷들을 보면 고통스러워요. 왜 이걸 안 찍었지? 왜 이렇게 찍었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하면서. 그러다 결국 내가 연출을 못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마음이 편해졌지요. (웃음) 그러니까 연출은 정말 끊임없이 공부해야 돼요” 역시, 마지막은 ‘공부’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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