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한국에도 수많은 만화 캐릭터들이 인기를 얻던 시절이 있었다. 매달 나오는 만화 잡지에는 둘리, 찌빠, 페페, 주먹 대장 같은 우리만의 캐릭터로 가득했고, 아이들은 그 캐릭터가 벌이는 수많은 모험들을 보며 꿈을 키웠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캐릭터들도, 만화 잡지도 모두 사라졌다. 지금 남은 것은 둘리뿐이다. 그리고 <아기공룡 둘리>를 탄생시킨 김수정 작가 역시 그 시대의 만화가 중 허영만, 이현세 등과 함께 현역에서 활동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그는 10여년에 걸친 긴 연재 끝에 <아기공룡 둘리>를 끝낸 뒤, 애니메이션과 캐릭터 산업을 통해 <아기공룡 둘리>의 생명력을 이어왔다. 그리고 얼마 전 방영을 시작한 <아기공룡 둘리>는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에 참여한 첫 번째 TV 애니메이션이다. 둘리 탄생 26년 만에 자신이 원하는 둘리의 이야기를 TV에 옮긴 김수정 작가에게 둘리의 이야기를 들었다.

<얼음별 대모험> 이후 10년 만에 다음 애니메이션을 냈다.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가 있나.
김수정
: <얼음별 대모험>은 당시에 호평을 받았었다. 그 당시 애니메이션 시장을 생각하면 관객도 나쁘지 않았고. 그래서 미국 영화사에서 TV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면서 5:5의 제작비로 투자 제의가 있었고, 한창 그 제작 준비를 했었다. 그 때 편당 제작비가 30만 달러 정도였는데, 당시 환율이 1달러에 900원 정도여서 그럭저럭 제작비를 맞출 수 있었다. 그런데 IMF가 터진 거다. 갑자기 환율이 1달러에 1700원까지 올라갔다. 그래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 때 기회를 놓친 후에 쉽게 제작할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나는 디지털 기술을 제대로 배울 생각에 학교를 몇 년 다녔고, 만화가협회 회장도 맡았고. 그러면서 시기를 놓쳐 버렸다. 그러다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준비한 게 3년 전이었다.

“원래 판타지보다 밥상에서 밥 먹는 이야기, TV보며 하는 이야기가 주였다”

이번에는 어떻게 제작하게 된 건가.
김수정
: 어디서는 둘리가 몸값 때문에 KBS를 버리고 SBS로 옮겼다는 기사도 봤다. (웃음) 하지만 솔직히 둘리에 대해 제안을 한 방송사가 SBS밖에 없었다. 어떤 곳에서는 요즘 무슨 둘리냐, <닌자 둘리>같은 걸 해보면 생각해 보겠다는 말까지 했고. 반면에 SBS는 우리가 칸에서 열린 미콤이라는 영상 마켓에서 반응이 좋은 걸 보고 제안을 해왔다. 그 뒤에 투니버스가 투자 의사를 밝혔고. 솔직히 국내 시장만으로는 수익을 내기 쉽지 않고, 수출과 캐릭터 판권 사업에 기대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아기공룡 둘리>를 시작했다. 반응은 어떤 것 같나.
김수정
: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다. <아기공룡 둘리>가 오랜 시간이 걸쳐서 다양하게 만들어지면서 각자 마음 속에 둘리를 갖고 있다. 원작을 읽은 사람들은 아주 좋아하지만, 어떤 사람은 옛날의 TV 애니메이션을 생각할 수도 있고, <얼음별 대모험>이나 교육용 애니메이션으로 둘리를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을 거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지금의 애니메이션은 또 다른 느낌일 것 같다. 시간을 두고 지켜봐줬으면 한다.

당신은 이번 <아기공룡 둘리>를 원작에 최대한 가깝게 만들려고 한 것 같다. 그림체도 만화의 그것과 굉장히 비슷하다.
김수정
: 맞다. 나는 예전의 KBS 애니메이션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완성도의 문제도 아쉬웠지만, 제작 과정에서 원작의 느낌이 거의 사라졌다. 실제로도 내가 제작에 참여할 수 있는 부분도 전혀 없었고. 그 당시에 <아기공룡 둘리>가 성공하고 나서 KBS에서 50부작으로 추가 제작을 하자는 제안이 있었는데, 그런 이유로 거절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생각하는 둘리를 만들고 싶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둘리란 무엇인가.
김수정
: 내가 처음에 생각한 것은 아이들의 동심의 세계와 꿈에 대한 것이었다. 원래 둘리도 처음부터 생각한 게 아니라 심의나 사회적 테마를 쉽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었다. 그렇게 둘리가 생겨나고 나서 1억 년 된 공룡이 만화에 나오는데 아무 것도 없으면 밋밋할 것 같아서 둘리가 초능력을 쓴다는 설정을 넣은 거고. 하지만 그 초능력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둘리는 결국 고길동과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서로 살아가면서 나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둘리와 고길동을 중심으로 한 사람 사는 이야기 안에서 아이들이 원하는 꿈과 환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 사는 이야기를 많이 집어넣었고. <아기공룡 둘리>에는 원래 판타지보다 밥상에서 밥 먹는 이야기, TV보며 하는 이야기가 주였다. 그게 너무 이어지면 지루하니까 판타지도 넣었고. <아기공룡 둘리>가 나온 뒤로 초능력을 쓰는 캐릭터들의 만화가 많이 나왔는데, 사실 초능력은 조미료 같은 것이었다. 중요한 건 둘리와 고길동을 중심으로 한 가정사였다.

“고길동의 집을 쌍문동으로 한 것도 이유가 있다”

<아기공룡 둘리>는 대안가족 이야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혀 다른 존재들이 하나로 부대끼며 사는 과정을 그리는데. <쩔그렁 쩔그렁 요요>도 비슷한 부분이 있었고.
김수정
: 나는 실제로 자식만 열한 명 있는 집안에서 살았다. 굉장히 가난했었고. 그래서 가족끼리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 <일곱 개의 숟가락>은 내 자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래서 가족애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깔려 있다. 요즘에는 고길동이 천사라는 소리도 듣는데 (웃음) 사실 고길동은 둘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둘리가 사라지니까 마음이 편해져서 살까지 찌는 게 고길동이었다. (웃음) 하지만 고길동이 둘리를 내쫓지 못하는 건 희동이 때문이다. 희동이는 고길동의 여동생의 아들인데, 고길동이나 그의 아내 정자나 희동이를 아주 사랑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유일하게 희동이한테 애정을 쏟는 게 둘리다. 희동이도 둘리를 따르고. 서로 부모 없이 정이 부족한 애들이 업고 업히는 과정에서 정이 생기는 거다. 그래서 길동이는 둘리 없으면 희동이를 못 키운다. 그러면서 둘리도 길동이한테 조금이라도 발언권이 생기고. 만화를 보면, 둘리는 희동이가 들어온 뒤부터 길동이에게 대들기 시작한다. 얻어먹는 처지지만, 가족으로 들어와서 얽히다 보면 그렇게 된다. <아기공룡 둘리>의 기본 바닥은 그렇게 사람 사는 이야기였다.

그러다 <BS 돌리>에서는 갑자기 어른이 된 둘리 얘기를 끌고 나왔다. 생활에 찌든 둘리의 이야기가 상당히 파격적이었는데. <아기공룡 둘리>에 비해서 굉장히 어두웠고.
김수정
: 그건 <아기공룡 둘리>의 외전 같은 이야기다. 그래서 마무리도 둘리가 미래를 지켜보다 현재로 돌아오는 식으로 마무리 했는데, 솔직히 반응은 안 좋았다. 좋게 말하면 시대를 앞서갔다고도 하지만. (웃음) 그 때 내가 굉장히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정서가 나왔던 것 같다. 이혼 뒤에 아이를 혼자 키우면서 몸까지 아프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래서 내 안 좋은 상황으로 둘리까지 끌고 들어가 버린 거다.

그 사이 둘리는 캐릭터로는 기억되지만 그 이야기는 잊혀졌다.
김수정
: 그건 아쉽다. 그래서 이번 시리즈에서 복습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아마 애니메이션으로 둘리를 기억한 사람들은 당황스러울 거다. KBS 애니메이션에서는 둘리의 가족 드라마적인 부분이 잘려 나갔었으니까. 이번에는 가족 이야기를 심층적으로 다루면서 <아기공룡 둘리>의 본질을 보여주고 싶었다. 둘리는 원래 순종적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모두가 아는 <아기공룡 둘리> 이야기는 생략하고 바로 캐릭터 전체의 에피소드로 들어간 건가. 둘리의 탄생 대신 다른 에피소드부터 방송을 시작했다. 철수와 영희도 빠져 있고.
김수정
: 생략한 건 아니다. 첫 방영분에서는 먼저 완성된 에피소드 중 세 개를 방송한 것이다. 둘리의 탄생이나 캐릭터들이 고길동의 집에 오게 된 과정은 중간에 삽입된다. 모두가 둘리 탄생 과정을 아는 상황에서 그 이야기를 처음부터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요즘 세대들이 “둘리가 뭐야?”라고 생각할 때 캐릭터의 기원에 관한 에피소드를 넣어서 복습 시킬 예정이다. 해외에서는 우리나라하고 다르게 시간 순대로 맞춰서 방송할 거고. 철수와 영희도 앞으로는 등장할 거다. 철수와 영희는 원래 둘리를 현실로 데려다놓고 빠지는 역할이니까, 애니메이션에서도 그만큼의 역할을 할 거다.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고길동의 집이 쌍문동인 건 이유가 있다. 둘리가 빙하에 갇혀서 한강까지 떠내려오지 않나. 그러면 빙하가 흘러서 어디까지 갈까 생각하다, 중랑천이 있는 쌍문동을 생각했다. 만약 쌍문동에 중랑천이 없다면 다른 곳을 생각했을 거다. 그리고 실제로 빙하가 한강까지 올 수 있는지 전문가들에게 물어보기도 했고. 그런데 모르겠다고 하더라. (웃음) 그래서 남극의 물이 서울 한강까지 연결이 되겠냐고 물어보니 “아마 물은 경계가 없으니까 오지 않겠어요?”라고 답해줬다 (웃음) 그래서 둘리가 빙하타고 남극에서 온 거다. 그 때는 우리나라에서 공룡 화석도 발견 안 되던 시기였으니까.

“처음에는 아이들이 이해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큰다”

만화나 과거의 TV 애니메이션이 방송되던 시절과 지금은 다르다. 어떤 부분에서 이번 작품이 경쟁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나.
김수정
: 사실 지금 아이들은 일본 애니메이션에 익숙해져 있다. 일본은 TV 애니메이션의 경우 인물 위주의 클로즈업을 쓰고, 음악으로 분위기를 잡는다. 그게 멋있게 보이기는 한데, 사실은 제작비를 아끼기 위한 방편이다. 오히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런 식으로 작업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풀 샷을 많이 쓰고, 만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 방안에서 벌어지는 캐릭터의 동적인 움직임을 많이 보여주려고 한다. 그리고 HD방식을 통해서 최대한 밝은 색감을 내려고 했고. 표정이나 동작을 최대한 디테일하게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보면 알겠지만 이 작품에는 캐릭터의 그림자가 없다. 그건 만화에서 나오는 표현인데, 그런 느낌을 살리면서 만화가 가지고 있는 재미를 살리고 시었다. 구닥다리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우리가 굳이 일본식 애니메이션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 정직하게 보여주고 싶다.

그런 방식을 요즘 시청자들이 받아들일까.
김수정
: 처음부터 익숙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일단 성우나 주제가에도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고. 하지만 우리 목표는 “처음 볼 때는 몰랐는데 가만 보니 잘 만들었다”는 말을 듣는 거다. 지금 애니메이션은 계속 재방송 된다. 그것들을 반복해서 보다보면 익숙해지지 않을까.

<아기공룡 둘리>를 만화로 다시 낼 생각은 없나.
김수정
: 그럴 생각은 없다. 둘리에 대해 할 이야기는 다 했다고 본다. 다만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이야기를 풍부하게 하고 시은 생각은 있다. 극장용을 만들게 되면 물론 새 시나리오로 쓸 것이고.

<아기공룡 둘리>가 어떤 작품이 되길 바라나.
김수정
: 우리 집 막둥이가 여섯 살이다. 태어날 때부터 둘리가 옆에 있었던 건데, 애니메이션이 그림만 완성됐을 때 그 아이와 함께 보면, 아이가 웃는다. 대사가 없어도 상황에 몰입하게 된 거다. 그런 작품을 계속 만들고 싶다. 한두 컷의 그림이 아니라 이야기로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작품. 물론 처음에는 아이들이 어려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애니메이션을 계속 볼 것이고, 그 때마다 새로운 걸 얻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는 둘리 편이었다가 지금은 고길동이 더 좋다는 사람들처럼. 새로운 <아기공룡 둘리>에서도 그런 매력을 만들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힘이 있다면 둘리의 팬들이 새롭게 생길 거라고 본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강하게 끌지 못할 수도 있고, 아이들이 이해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큰다.

글. 강명석 (two@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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