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하진 기자]
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이진욱 음악감독이 한경텐아시아와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이진욱 음악감독이 한경텐아시아와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음악감독 겸 작곡가 이진욱과 러시아 피아니스트 라흐마니노프의 인연은 특별하다. 이진욱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듣고 클래식 음악에 빠져들었고, 피아니스트로서 정체성을 굳혔다. 그리고 이번엔 그의 일생과 음악을 주제로 한 뮤지컬의 음악감독을 맡았다. 수년 전 첫사랑을 다시 만난 것처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운명’처럼.

이내 두려움이 앞섰다. 라흐마니노프를 좋아하는 만큼, 그의 음악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도 가지 않은 길, 또 언젠가는 누군가 갈 길이라는 생각에 덥석 잡았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과 삶을 한 겹, 두 겹 벗겨 낼수록 존경심과 애정은 더욱 커졌다. 때로는 수많은 음표가 그려진 그의 악보가 속을 메스껍게 만들기도 했지만, 대신 값진 희열과 짜릿함을 안겼다. 작품이 끝나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라흐마니노프’, 그리고 그의 음악이다.

10. ‘라흐마니노프’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이진욱 : 사실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은 클래식 전공자들도 엄두를 못내요. 처음에 작가가 ‘힙합으로 해보면 어떨까요?’ 하기에 당황했죠.(웃음) 맡기로 하고,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을 정말 많이 했어요. 다른 분들과 긴 회의도 하고요. 선택한 이유는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는 것 때문에 선택했어요. ‘가보자!’하고요.

10. 음악인들에게 라흐마니노프는 왜 힘든 벽일까요?
이진욱 : 어릴 적 피아노를 배울 때, 등급이 나눠지잖아요. 바이엘을 보면 가장 뒷장이 라흐마니노프 작품이에요.(웃음) 그만큼 난해하고 어려워하는 클래식이죠. 음표가 많기도 하고, 테크닉에 파워를 못 따라가요. 한 번 치고 나면 손에 무리가 엄청 오죠.

10.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땐 당황할 수밖에 없었겠네요.
이진욱 : 피아니스트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작곡가예요. 막연하게 꿈꾸고 있었는데 이번 뮤지컬로 만나게 된 거죠.

이진욱 음악감독/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이진욱 음악감독/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10.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올라 같이 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탐나기도 했겠네요.

이진욱 : 사실 제가 치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어요.(웃음) 아마 20대였으면 제가 이것, 저것 다 한다고 했을 겁니다. 30대가 넘어간 지금은 오히려 선택과 집중을 잘 하는 게 좋다는 걸 알았어요.

10. 피아노뿐만 아니라 현악 4중주도 인상적이에요.
이진욱 : 제작 환경이 좋았다면 오케스트라를 전면에 배치시키고 싶었어요. 독일에는 소규모 오케스트라로 공연을 올리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피아노에 현악기를 다루는 남자 연주자들을 세웠죠.

10. 라흐마니노프를 많이 아는 만큼, 스트레스가 엄청났을 것 같아요.
이진욱 : 어떤 분이 ‘협주곡, 하루만 연습하면 되잖아’라고 하더라고요. 굉장히 서운했어요.(웃음) 다른 뮤지컬과 달리 어렵다, 쉽다의 개념이 아니라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적인 사실감을 살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부담이 컸어요. 학교 후배인 이범재 피아니스트를 ‘쉽다’고 꼬셨는데, 나중에 악보를 보더니 ‘이게 뭐냐?’고 화를 내더라고요.

10. 이범재 피아니스트와 대화를 많이 나눴겠어요.
이진욱 : 무척 많이 했어요.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을 치면 손이 마비되기도 해요. 지금은 정말 잘해주고 있어서 고맙죠. 피아니스트에 오케스트라, 사실 모험이기도 했는데 제작사에 고마워요. 제 말을 믿어줬거든요. 소규모 오케스트라와 2인극을 만들 수 있었던 것 자체로 만족합니다.

10. 첫 공연을 올렸을 때, 잊을 수 없겠어요.
이진욱 : 그간 공연 음악을 많이 만들었지만, 이번 ‘라흐마니노프’를 끝으로 은퇴를 하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공을 많이 들인 작품이에요.

이진욱 음악감독/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이진욱 음악감독/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10. 라흐마니노프에 대해 뼛속까지 알았겠는데요.(웃음)
이진욱 : 라흐마니노프의 음악, 또 그에 대해 몇 장을 들춰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굉장히 꼼꼼한 사람이라는 걸 알겠더라고요. 편집증이 어마어마했겠구나라는 생각도 들고요. 음표를 보면서 ‘왜? 여기서?’라는 물음이 계속 들었고요. 정말 열심히 썼다, 제정신이 아니었겠구나…싶었어요.(웃음) 매직아이를 몇 시간씩 들여다보고 있는 기분이랄까요.

10. 음악인으로서 영향도 받았겠어요.
이진욱 : 이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웃음) 악보 하나하나에 집착을 했던 사람이고, 역사 책도 뒤져보면서 그가 처한 상황을 이입하면서 음악 작업을 한 것 같아요.

10. 클래식 음악을 넘버로,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의 구분도 중요했을 것 같아요.
이진욱 : 라흐마니노프에 하나씩 맞추고 싶지 않았어요. 어떤 부분은 실제 교향곡같이 풀어냈고, 드라마 감정선을 따라가고 싶었던 부분은 또 달리 표현했어요.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배우, 연출자, 연주자 너 나 할 것 없이 여기저기 의견을 많이 냈죠. 배우들이 음악에, 또 제가 대본에 의견을 내면서 만들어갔어요.

10. 그렇게 완성됐기 때문에 더 특별하겠네요.
이진욱 : 음악과 드라마를 같이 만든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부분은 드라마적인 부분에 참여하고, 또 어떤 부분은 음악에 참여를 했죠. 다행히 모든 이들이 작품에 애정이 커서 각자 의견을 많이 냈어요. 보통 작품을 만들 때 모두 각자의 입장이 있어요. 생각해보면 누구도 중심이 될 수 없고, 다른 관점에서 하지 않으면 닫혀있는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제가 만약 나만의 관점만 갖고 고집을 부렸다면 지금의 시너지는 없었을 거예요. 물론 제 욕심을 부린 부분도 있지만요.(웃음)

10. ‘라흐마니노프’가 이진욱 음악감독에게 터닝 포인트가 될 것 같은데요?
이진욱 : 라흐마니노프가 어째서 매력이 있느냐면, 음악적으로는 굉장히 어렵지만 듣기에는 편안해요. 그리고 러시아 음악 자체가 모든 국가의 음악이 다 들어있어서 어떤 부분에서는 아시아와 굉장히 잘 어울려요. 우리나라의 정서와도 잘 맞죠. 드라마 ‘모래시계’의 음악도 러시아 민요인데, 큰 인기를 얻은 것처럼 정서가 비슷하니까 그래요. 일본, 중국도 마찬가지고요. 이 작품을 통해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성이 더 알려질 것 같기도 했고, 뮤지컬로 만날 수 있어서 신선했죠. 애초에 연출자, 제작자와 ‘클래식 음악회 성격과 연극, 뮤지컬적인 부분 모두를 가져가자. 적절하게 공유하자’고 했어요.

이진욱 음악감독/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이진욱 음악감독/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10. 음악감독으로서 고집부린 부분은 어디인가요?

이진욱 : 라흐마니노프의 뮤지컬 넘버를 현악기 4중주로 가져왔을 때 효과를 생각했어요. 그 부분은 해보지 않은 도전이고, 우려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분명 그만의 힘과 독특함, 혜택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죠. 또 극의 후반부에 긴 독백이 있는데, 그 역시 다른 이들이 안 해봤기 때문에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아무도 하지 않았으니까 더 의미 있을 거고요. 비슷하거나, 똑같은 작품이고 싶지는 않았어요. 우선 (이)범재에게 미안하지만, 현악 4중주와 배우들에게도 음악을 구현시키는 무대에서 다른 건 보지 말고 잘 만들어진 클래식 작품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자고 했어요.

10. 일상이 모두 ‘라흐마니노프’가 됐겠어요.
이진욱 : 정말 오롯이 ‘라흐마니노프’에 집중했어요. 보통은 다른 작품과 병행하기도 하는데, 이번만큼은 달랐어요. 아무것도 못하고 여기에만 집중했어요. 다른 작품을 만들 만큼의 에너지도 없었고요.(웃음) 공연을 올렸으니 이제는 근처에 안 가려고 노력 중이에요. 하하.

10. 클래식 전공자로서 또 애착이 가는 음악가가 있을 것 같은데요.
이진욱 : 사실은 라흐마니노프의 영향으로 클래식 입시를 시작했어요. 라흐 형과 에피소드가 많죠?(웃음) 재즈 피아노, 밴드 음악 등을 하다가 백건우 음악회 실황을 봤어요. 그걸 보고 살면서 저런 음악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입시를 해보자고 준비를 한거예요. 정신을 차려보니 라흐마니노프의 악보를 하나, 둘씩 모으고 있는 저를 발견했죠.

10. 정말 운명이네요.(웃음)
이진욱 : 입시를 보려고 레슨을 받았어요. 라흐마니노프의 악보를 들고 갔죠. 지금은 이해가 되지만, 당시 레슨 선생님이 웃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이번 작품의 제안을 받았을 때 마치 첫사랑을 만나는 느낌이었어요. 음악 공부를 오래 했고, 대학원에서도 음악 분석을 전공해서 논문까지 마쳤는데, 그래서 어느 정도 클래식을 섭렵하지 않았나 했거든요. 자만이었죠. 라흐마니노프를 여는 순간, 와장창 무너졌어요.(웃음) 라흐마니노프에게 감사하기도 하죠. 작품을 통해서 풀고 싶었던 것, 갈증을 다 해소했어요. 라흐마니노프가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은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하죠.

10. 당분간은 빠져나오기 힘들 것 같은데, 차기작에 대한 계획도 있나요.
이진욱 : 모두 클래식 작품만 들어오는데, 어쩌죠?(웃음) 한, 두 작품의 음악감독을 맡아 진행 중이고요. 또 이야기 중인 것들도 있습니다. 남들이 하지 않은 것, 가지 않은 길을 가면서 신선하고 독특한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10. 끝으로 ‘라흐마니노프’의 시즌2 제안을 받아도, 하실 건가요?(웃음)
이진욱 : 모르겠어요.(웃음) 좀 더 해보고 싶은 것이 있긴 하지만. 제작사와 이야기를 한 건데, 공연의 막바지에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이 뮤지컬의 넘버로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과정을 마치 해설집처럼 풀이하는 음악회를 갖고 싶어요. 라흐마니노프가 처해진 상황과 그 음악을 어떻게 바꿨는지 말이죠. 가령 ‘저는 이 곡을 명동성당 앞에서 듣고 토했는데요,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들어보시죠’ 하면서요.(웃음) 현실화된다면, 관객들이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김하진 기자 hahahajin@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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