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린
역린
드라마는 드라마로 봐야 하고, 영화는 영화대로 즐겨야 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작품이 있다면, 실제 역사와 작품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실제 역사와 드라마의 내용을 일일이 따지려고 하면 끝이 없지만, 재미와 별개로 간단한 역사적 사실을 가끔 아는 것도 좋을 듯하다.

지난달 30일 개봉한 영화 ‘역린’은 실제 역사에서 모티브를 따온 팩션(Faction,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합성어) 영화다. 정조 1년 1777년 7월 28일에 일어났던 정조 암살 시도 사건인 정유역변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정유역변은 1777년 7월 28일 홍계희의 손자인 홍상범 등이 주축이 돼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전군 이찬을 추대하려고 했다는 역모 사건. 이미 드라마 ‘이산’, 영화 ‘영원한 제국’ 등 정조를 다룬 작품은 많지만, ‘역린’은 단 하룻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구미를 당긴다. 그런데 포털사이트에 ‘정유역변’이라고 검색하니 백과사전에도 없다! ‘역린’은 그날 밤에 정조의 암살 시도가 있었다는 팩트 하나만으로 정재영, 조정석, 조재현 등이 연기하는 허구의 암살단이라는 픽션을 제대로 녹여낸 것. 과연 실제 역사에는 정유역변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조선왕조실록의 원문을 그대로 따라가 봤다.

# ‘조선왕조실록’ 속 정유역변은 어떻게 표현됐을까? ‘도둑이 들었다’


‘역린’의 정조, 현빈
‘역린’의 정조, 현빈
‘역린’의 정조, 현빈

‘역린’ 속 정조, 현빈은 존현각(尊賢閣)에서 밤마다 운동을 하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정조실록의 1777년 7월 28일 기록에서도 ‘임금이 어느 날이나 파조(罷朝)하고 나면 밤중이 되도록 글을 보는 것이 상례’라고 설명한다. 실제 정조는 정적들의 암살 위협을 수차례 받아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왜? 큰 아버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해 왕이 된 정조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했으니,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일조했던 노론 벽파를 비롯한 정적들은 얼마나 정조가 무서울까! (사도세자는 영조의 아들로, 뒤주에 갇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인물이다.)

‘역린’이 표현했던 그날 밤의 이야기에 대해서 조선왕조실록은 ‘도둑이 들었다’고 표현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자.

“이날 밤에도 임금은 존현각(尊賢閣)에 나아가 촛불을 켜고서 책을 펼쳐 놓았다. 곁에 내시 한 사람이 있다가 명을 받고 호위하는 군사들이 숙직하는 것을 보러 가서 좌우가 텅비어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보장문(寶章門) 동북쪽에서 회랑 위를 따라 은은하게 울려왔다. 기와 조각을 던지고 모래를 던지어 쟁그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임금이 한참 동안 고요히 들어보며 도둑이 들어 시험해 보고 있는가를 살피고서, 친히 환시(宦侍, 궁중에서 임금의 시중을 들거나 숙직 따위의 일을 맡아본 벼슬아치)와 액례(掖隷, 내시부 소속 종)들을 불러 횃불을 들고 수색하도록 지시했다. 기와 쪽과 자갈, 모래와 흙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고 마치 사람이 차다가 밟다가 한 것처럼 되어 있었으니 틀림없이 도둑질하려 한 흔적이 있었다.”

이처럼 실록 속 정유역변의 단서는 기와 쪽과 자갈, 모래와 흙이 흩어져 있는 흔적으로 시작된다. ‘역린’은 아주 작은 묘사 하나로 방대한 24시간의 서사시를 완성해냈다.

# 반역자는 어떻게 됐을까?

‘역린’ 에서 가상 인물과 실존 인물은 누구 누구일까?
‘역린’ 에서 가상 인물과 실존 인물은 누구 누구일까?
‘역린’ 에서 가상 인물과 실존 인물은 누구 누구일까?

실록 속 그날의 역사에는 도둑의 흔적만 남아있지만, 이 같은 흔적이 홍삼범 등이 모의한 역변 사건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은 그 이후의 역사에서 드러난다. ‘역린’에서 정적들과 정조의 대립이나 정적들이 반역을 모의하는 장면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정유역변이 어떻게 처리됐는지 실제 역사를 통해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도둑 침입 흔적이 정조가 발견한 그날 밤, 당시 도승지 홍국영은 바로 입궁해 “이는 필시 흉얼들이 몰래 변란을 일으키려고 도모한 것입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러한 변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즉각 대궐 안을 두루 수색할 것을 청했다. 정조도 옳게 여겨 이에 홍국영이 숙직 중이던 군사들을 거느리고 수색했지만, 찾지 못했다.

정유역변의 실체는 2주 뒤인 8월 11일 드러난다. 그날, 7월 28일의 살해 미수 사건 이후 또 한 차례 암살 시도가 이뤄지려 했다. 그러나 수포군(밤에 궁궐 문을 지키던 군사)의 동물적 감각 덕분에 발목을 잡힌다. 이날 김춘득, 김세진이라는 군사가 경추문에서 몸을 포개고 누워 있었다. 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수포군을 2~3차례 부르자, 김세징이 응하려고 했다. 그런데 김춘득이 “부르는 음성이 이상하니 동정을 살펴보자”고 말한다. 조금 있으니 어느 사람이 경추문 북쪽 담장을 몰래 넘어 가려 하자 김춘득 등이 근처에 있던 수포군들과 함께 수상한 자를 추격해 잡게 된다.

수상한 자는 전흥문이라는 사람으로 정조가 직접 죄인을 문초하자, 그는 홍상범이 몰래 자객을 양성해 반역을 도모해 오고 있었고, 호위 군관 강용휘와 결탁했다는 범죄 사실을 진술했다. 이에 홍상범의 9촌 홍동지, 강용위 조카 별감 강계창, 강용휘의 딸 나인 강월혜가 가담했음을 밝혔다. 강월혜는 영화 속 정은채가 맡은 인물이기도 하다. 궁궐 곳곳에 있던 자객들의 모티브를 읽을 수 있다. 또한, 재미있는 점은 ‘역린’에서 등장하는 고 상궁과 복빙이라는 인물이 실록 속에서도 등장한다. 영화 속 귀여운 어린 나인으로 등장했던 복빙은 실제 역사 속에서는 가담자나 마찬가지였다. 강월혜는 “강용휘가 한 말을 전했더니, 고 상궁이 만류하지도 않았고 또한 그의 양녀 복빙과 함께 방안에서 이 일을 비밀로 말하며 속으로 성공하기 바랐었습니다”고 자백했다.

이후 정조는 계속된 추국을 통해 은전군 이찬을 추대하여 반정을 꾀하려던 전말을 파악하고, 가담자들을 사형시키거나 유배 보냈다. 특히 가장 핵심 주모자인 홍상범은 책형(?刑 : 시체를 저자에서 찢어 죽이는 형벌)됐다.

# 영화 ‘역린’을 볼 때 주의할 점! (* 영화 ‘역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정순왕후(한지민)와 복빙
정순왕후(한지민)와 복빙
정순왕후(한지민)와 복빙

실제 역사는 영화 ‘역린’처럼 강월혜(정은채)가 정조에게 정변 사실을 미리 알리지도 않았고, 현빈이 아주 멋있는 모습으로 활을 쏘며 자객들을 쓰러트리지도 않았다. 상책 갑수(정재영)의 존재도 없다. 이 모든 것은 상상력의 산물, 그냥 재미로 즐기면 된다.

다만 영화 속 정순왕후와 정조의 대립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린’에서 정순왕후(한지민)는 영조의 계비로 조정의 실권을 잡고 있는 듯한 모양새를 보인다. 정조를 쥐락펴락하고, 혜경궁 홍씨(김성령)에게 굴욕을 준다. 실제로 정순왕후는 정순왕후는 노론 벽파를 가까이한 인물로 사도세자를 옹호하는 시파와 남인을 가까이하던 정조와 전형적인 대립관계로 인식된다. 정순왕후는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며 정조의 시파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도 했다.

정조 1년 시기에 정순왕후와 정조는 드러내놓고 대립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정조는 도움을 받았다. 정조가 즉위 후 노론 벽파의 핵심인 홍인한, 정후겸 등을 처분할 때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가 이들 탄핵에 동참했다. 정조는 명의록(홍인한 정후겸 등을 사사한 일을 기록한 책)에 ‘세손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내전(정순왕후)이 안에서 세손을 도와 세손이 무사하게 되었다’라는 내용을 수록하기도 했다. 물론 김귀주는 정조의 정적 정리가 마무리되자 1779년에 귀양 보내졌고, 정순왕후와 정조는 사도세자 때부터 이어지는 대립 관계로 인해 개인적 감정은 좋지 않았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지만, 1777년 당시에는 정순왕후 측과 정조의 극심한 대립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홍상범의 모반은 자신의 아버지 홍술해가 황해도관찰사로 있을 때 유배당한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시작된 것이다. 영화에서는 정순왕후의 마지막 결정이 떨어지는 장면이 나왔지만, 실록에서는 알 수 없다. ‘역린’을 통해 정순왕후가 정조의 암살에 가담했다는 것보다 정조의 정적이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될 듯하다.

실록에서는 오히려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지친인 이택수가 정유역변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이택수가 모역에 동참한 것을 보고 “네 어미는 곧 자궁(慈宮, 임금의 생모)의 지친이다. 내가 차마 모역에 연좌된 것으로 논하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이 실록에 기록돼 있다.

정조는 재위 초, 홍인한 정후겸 등 사도세자의 죽음에 앞장서며 실권을 장악하던 노론 벽파를 숙청하는 등 탄탄한 왕권을 구축하는 데 노력했다. 정유역변도 정조에게는 오히려 자신을 반대하는 정적들을 제거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몇몇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정유역변이 정조의 자작극일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 정조 독살설의 주범으로 몰렸던 심환지가 알고 보니 정조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막후 정치를 펼쳤다는 것이 최근에야 공개됐으니 말이다.

글. 박수정 soverus@tenasia.co.kr
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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