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명 중 여섯 명이 최고의 순간으로 꼽은 이기 팝
아홉 명 중 여섯 명이 최고의 순간으로 꼽은 이기 팝
아홉 명 중 여섯 명이 최고의 순간으로 꼽은 이기 팝

지난 17일과 18일 이틀간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현대카드 시티브레이크’는 국내외 정상급 아티스트들의 공연을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기 앤드 더 스투지스, 메탈리카, 뮤즈, 림프 비즈킷 등 해외 밴드들을 비롯해 신중현 그룹, 김창완 밴드, 정차식, 트램폴린, 장기하와 얼굴들,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등이 ‘시티브레이크’에 모여 저마다 뜨거운 무대를 선보였다. 그 중 음악평론가, 기자, 업계 관계자 등 전문가 아홉 명이 꼽은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을 꼽아봤다.

송명하(‘Paranoid’ 편집장)
BEST: Iggy and The Stooges. 처음부터 끝까지 넘치는 에너지로 충만했던 말이 필요 없었던 공연. 이들은 다른 음향이나 시각적 효과 없이 색소폰을 포함한 밴드의 기본편성과 보컬만으로 관객을 휘어잡았다. 거기에 이들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다거나, 히트곡 몇 곡을 좋아한다거나 하는 사전 지식은 필요 없었다. 이기 앤드 더 스투지스의 음악을 하나도 모르는 아니,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관객들도 모두 빨아들이는 블랙홀과도 같은 무대였다. 관객 모두를 무대 위의 뮤지션과 같이 미치광이로 만들어버렸다.
WORST: 뮤직 스테이지 대부분의 공연들. 다른 공연장과 달리 뮤직 스테이지의 객석 뒤편은 음식물을 올려놓기 좋은 드럼통들이 배치돼 있었다. 때문에 관객들은 뮤직 스테이지에서 열리는 공연에 집중하지 못했다. 심하게 말하면 음악카페에 하우스 뮤지션들이 고정적으로 연주한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무대를 바라볼 때 무대 바로 우측에 배치된 흡연구역을 이용하는 관객들에게도 무대 위의 연주는 그저 지나치는 길에 있는 버스킹 정도로 밖에 인식되지 못했다.

김작가(대중음악평론가)
BEST: Metallica. 한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를 넘어, 올 여름 다섯 개 록페스티벌의 대미를 장식하는 최종 보스로 과연 부족함이 없었다. 최근 ‘서머소닉’ 공연을 능가하는 연주와 ‘명곡 대방출’을 방불케 하는 초호화 셋리스트, 그리고 지난 2006년 내한보다 오히려 회춘한 제임스 햇필드의 성대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밴드 티셔츠는 물론이고 그들의 로고가 박힌 페스티벌 공식 티까지 모두 솔드 아웃되었다는 전무후무한 사실은 메탈리카의 위상을 보여주는 아주 단편적인 일례일 것이다. 그들과 동시대의 관객들에게는 혈관 구석에 묻혀있던 메탈 키드의 피를 다시 끓게 했을 것이고, 그들을 전설로 인식하는 세대에게는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스포츠의 문구를 록에서도 체감할 수 있음을 일깨워줬을 것이다. “See you very very soon”이라던 그들의 마지막 멘트가 현실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WORST: 신중현 그룹. 최악이라는 말 보다는 가장 실망스러웠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 동안 신중현의 공연을 여러 차례 봤다. 그렇기에 한국 록의 대부가 처음으로 페스티벌과 만나는 순간에 대한 기대또한 컸다. 하지만 그 기대는 어디에서도 채워지지 않았다. 지난 공연들에 비해 편곡은 허술했고, 신석철이 갑자기 빠지게 된 탓인지 밴드의 케미컬은 좋다 말할 수 있는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무엇보다 최근 신중현 공연의 백미인, 거대한 사이키델릭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 아쉬웠다.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연주될 때 등장한, 군복 입은 소년소녀 합창단의 무대는 여기가 록페스티벌인지 ‘열린 음악회’인지 헛갈릴 지경이었다. ‘슈퍼소닉’에서의 조용필 공연에서도 느꼈던 바지만, 아직 페스티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한국 레전드 아티스트들의 무대에는 사전에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아무리 백전백승의 명장이더라도, 그들의 곁에는 명 참모들이 있었다. 음악을 넘어, 역사의 증언이다. 동시대 관객들과 공연의 흐름에 정통한 참모 그룹이 붙어 레전드를 현재진행시제에 연착륙시키는 장치를 마련해야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곤혹스러운 질책은 아티스트가 아닌 그들과 페스티벌의 도킹을 기획한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메탈리카
메탈리카
메탈리카

김성환(음악칼럼니스트)
BEST: Iggy and The Stooges. 이기 팝이 이번 행사 모든 공연을 통틀어 최고가 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록 공연이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열정과 에너지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사실 이기 팝의 얼굴과 몸의 주름이 보여주는 나이를 무색하게 시종일관 무대를 넘나들며 펼치는 자연스러운 액션과 객관적인 가창력의 우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혼신을 뽑아내는 가창은 다른 선후배밴드들이 모두 본받아야 할 귀감이었다. 그의 노래를 알고 있었느냐, 모르느냐는 이 날, 이 무대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이기와 스투지스가 펼치는 로큰롤의 열정 속에 자연스레 동참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진정한 ‘록 스피릿’이란 게 만약 존재한다면, 이 날 난 그것을 본 것 같았다.
WORST: Trampauline. 트램폴린은 평소에도 개인적으로도 음악적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는 국내 인디 아티스트다. (이는 물론 개인적으로 신스팝 장르에 대한 애정이 큰 것에도 기인한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그간 작은 클럽에서 어두운 분위기에서 공연하는 것에 익숙했던 것인지,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오후 5시에 보게 된 이들의 무대는 이전 무대에서 보여주었던 활력이 별로 느껴지지 못했다. 좀 더 넓은 무대에 많이 서고 싶다면, 관객을 확실히 끌어당기는 노하우를 익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다들 음식을 사먹기 위해서만 모여 있고, 정작 무대 앞에는 썰렁하기 그지없었던 뮤직 스테이지 관객들의 무반응도 이 안타까운 상황에 한몫했다. 물론 이 안타까움은 이틀 내내 대부분의 뮤직 스테이지를 지배했지만.

김영혁(김밥레코즈 대표)
BEST: Iggy and The Stooges. 시작부터 끝까지 1시간 가까이 뛰었으니, 올림픽 주경기장 트랙을 수십 바퀴는 돌고도 남을 에너지였다. 이들의 앨범 제목(혹은 곡 제목)대로 “Raw Power”가 무엇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공연이었다. 돌이켜 보면, 이기 팝의 주름진 알몸과 예측 불가의 액션은 메탈리카의 대형 화면이나 뮤즈의 레이저/로봇쇼보다 더 스펙타클했었다. 오늘날 땀과 격정으로 범벅이 된 원초적인 록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할 수 있는 밴드는 그리 많지 않다.
WORST: Limp Bizkit. 맥주는 시원하게 마셔야 하고, 우동 국물은 뜨거울 때가 좋다. 림프 비즈킷이 너바나 같은 다른 밴드의 익숙한 곡을 커버할 때는 김빠진 맥주를 마시는 느낌이었고, 라이브로 새롭게 들은 곡들엔 뜨끈함도 시원함도 없었다. 프레드의 카리스마가 감소한 탓일까, 덩달아 기타리스트 웨스의 분장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함께 뛰어 놀기엔 나쁘지 않은 공연일 수도 있었겠지만, 지나치게 관객들을 의식한 듯 보이는 무대는 그들이 일곱 장의 앨범을 발표한 밴드라는 걸 잊게 만들 정도였다.

박현준(경인방송FM ‘박현준의 라디오 GA! GA!’ PD 겸 DJ)
BEST: Iggy and The Stooges. 일반적인 음악 팬들에게 이기 팝이란 존재는 영화 ‘트레인스포팅’에 삽입된 ‘Lust For Life’나 ‘아리조나 드림’과 같은 예술 영화에 쓰인 이국적인 느낌의 ‘In The Death Car’와 같은 영화음악 등 굉장히 제한적인 루트를 통해 알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60년대 후반부터 자신의 밴드 스투지스와 함께 온몸으로 펑크록의 P자부터 써내려간 한 장르의 선구자적인 인물이다. 특히 이번 페스티발에서는 솔로가 아닌 스투지스와 함께 무대에 올라, 장르의 시작과 영광을 나눴던 앨범들인 ‘The Stooges’, ‘Fun House’, ‘Raw Power’ 등에 수록된 펑크 고전들을 연주하면서, 국내 음악 팬들에게 봉인돼 있는 펑크 록의 타임캡슐을 직접 열어서 보여줬다. 펑크록이 장르 음악으로 국내에서도 이미 뿌리를 깊게 내린 점을 감안한다면, 이기 앤드 더 스투지스의 무대는 그 자체만으로 올 여름 모든 페스티벌을 통틀어 신의 한수였다.
WORST: 신중현 그룹. 사실 신중현 그룹의 무대는 시티브레이크의 모든 무대를 통틀어 개인적으로 가장 감격적인 무대였다. 두 아들 신대철, 신윤철과 함께 무대에 올라 ‘빗속의 여인’, ‘커피한잔’, ‘거짓말이야’, ‘미인’ 같은 신중현 음악인생의 필살기와도 같은 곡들을 들어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연배를 고려한다면, 이와 같은 무대를 관객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또 언제일지 장담할 수도 없는 무대였다. 그런데, 안타까운 순간으로 꼽은 이유는 무대가 아니라 관객들의 애티튜드를 이야기하고 싶어서이다. 신중현 그룹의 공연 도중 대다수의 관객들이 메탈리카의 공연장으로 이동을 하면서, 공연 중인 아티스트에 대한 배려가 많이 결여된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메탈리카의 예정된 공연 시간은 9시였고, 신중현 그룹의 공연 마무리 시간은 8시 40분이었는데, 신중현 그룹의 공연이 절정으로 치닫던 순간 메탈리카의 공연장으로 서서히 자리를 옮기기 시작하더니, 이내 썰물처럼 관객들이 빠져나가는 모습은 무대 위에서도 곤혹스러운 광경이었을 것이다. 신중현 그룹은 피날레로 준비한 아름다운 강산을 우리들의 미래인 아이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대형 태극기를 나부끼며, 메탈리카는 절대로 만들어 낼 수 없는 한 핏줄, 한 민족의 긍지를 담아낸 공연을 보여줬다. 물론 공연에 대한 호불호가 나뉠 수 있을 것이고, 개인의 취향도 고려해야할 부분이지만, 이날의 광경은 남들이 가니까, 좋은 자리를 놓치면 어쩌나 하는 심정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모습처럼 보여서 아쉬웠다. 무대와 무대 간의 여유 있는 시간 배정은 물론이고, 시간 배정과 무대 정리로 인해 당연히 발생할 수 있는 딜레이 되는 시간을 충분히 감안해도 신중현 그룹의 모든 공연이 마무리 된 후에 질서 있게 다음 공연으로 이동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무대 위의 아티스트에 대한 배려도 공연 관람의 일부란 것도 이 기회를 빌어 전하고 싶은 마음에 신중현 그룹의 공연을 보다가 이동해버린 관객들을 시티브레이크의 WORST로 꼽고 싶다.

신중현
신중현
신중현

정원석(대중음악평론가)
BEST: Iggy and The Stooges. 우리는 이 공연 전에 이기팝에 대해 과연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 이기 팝을 직접 보지 않고 그와 그의 음악에 대해 섣불리 이렇다 저렇다 말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정말 로큰롤이 지닌 원시성, 충동성, 폭력성, 퇴폐미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전대미문의 퍼포먼스였다. 여름 땡볕에 별다른 조명도, 무대세트도, 영상도 없이 몸으로 때워 가며 잠실주경기장을 그야말로 초토화시켰다. 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음악공연을 보았다기보다는 ‘거대한 에너지의 분출’ 현장을 목격한 느낌이다. 좋은 뮤지션은 보는 이를 즐겁게 하지만, 위대한 뮤지션은 보는 이를 미치게 한다.
WORST: Rocket from the Crypt. 샌디에고가 자랑하는 이 로큰롤 밴드의 오랜 팬이고 라이브의 명성을 익히 들어 큰 기대를 걸었지만, 전성기가 지난 탓인지, 아니면 원래 실력이 그 정도인지 그저 지루하고 평범했다. 관객이 재미없어하는 상황에서 율동까지 따라하라고 부추겼는데, 제법 민망했다.

이세환(소니뮤직 차장)
BEST: Limp Bizkit. ‘한 물 갔다’는 말을 들어온 림프 비즈킷은 시작부터 ‘Rollin’으로 관중들을 흥분시키더니 낮부터 땡볕에 지쳐있던 사람들을 점프하게 만들었다. 본인들 노래뿐만 아니라 메탈리카, 너바나,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곡까지 들어볼 수 있었다. 이기 팝의 공연에 눈을 못 뜨고 가만히 입 벌리고 보았던 관중들이 그제야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모두 자기들이 뮤지션인 듯 떼창을 하기 시작했다. 다음의 뮤즈 공연이 밋밋한 느낌이 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WORST: Limp Bizkit. 최악의 공연 역시 림프 비즈킷이었다. 헤드라이너로도 손색이 없는 팀이었는데 음향이 객석을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 특히 구조상 무대 왼쪽 편 좌석에서는 기타소리가 크게 들렸다. 좋은 소리를 듣기 위해 찾아 콘솔 바로 앞까지 거친 슬램 무리를 피해 들어가 공연을 봐야했다. 다섯 개 록 페스티벌을 모두 가 보았지만 항상 메인 스테이지 음향은 좋은 반면 나머지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서브 스테이지의 음향도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림프 비즈킷
림프 비즈킷
림프 비즈킷

김두완(음악칼럼니스트)
BEST: Iggy and The Stooges. 책이나 사진으로만 봤던 진짜 펑크록이 눈앞에 펼쳐졌다. 예전에 경험했던 펑크는 모두 사이비였던 것일까? 진심이 통하지 않으면 펑크록이 아니다. 펑크록 한답시고 노는 척, 멋있는 척하는 밴드들은 이기 팝을 본받으시길.
WORST : 기린. 기린이 추구하는 콘셉트는 잘 알겠으나 무대에서 무엇을 말하려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권석정(텐아시아 기자)
BEST: 신중현 그룹. 사실 신중현이 록페스티벌에 출연한다고 했을 때 걱정이 조금 앞섰다. 아무리 전설이라고 해도 그의 나이 75세다. 최근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온 그의 공연을 본 관객들이라면 노쇠한 목소리에 실망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날 신중현은 요 몇 년간 지켜본 공연 중 가장 좋은 컨디션을 보여줬다. 수만 명의 젊은 관객들이 앞에 있어서일까? 그는 70대 노장이 아닌 혈기 넘치는 로커의 모습이었다. 가녀리게 떨렸던 신중현의 목소리는 곡이 거듭될수록 점점 또렷해졌고 ‘미인’에서는 쩌렁쩌렁했다. 특히 ‘미인’의 합창은 한국 록의 고전이 록페스티벌에서 울려 퍼지는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신대철과 신윤철이 주고받는 기타 솔로도 압권이었다. 거장을 소환하는 것이 록페스티벌의 미덕이라면, 이날 신중현 그룹의 공연은 그 미덕의 최대치를 보여줬다.
WORST: Iggy and The Stooges. 정확히 말하면 이기 팝이 다른 록페스티벌에서 얻은 감동을 앗아가 버린 순간을 최악의 순간으로 꼽고 싶다. 이기 팝은 무대에 등장하자마자 관객들을 잡아먹어버렸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조금 과장하자면 올여름 록페스티벌에서 경험한 이런 저런 공연들의 감동이 일순간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후 공연들도 밋밋하게 느껴졌다. 이기 팝이 벨트를 풀었지만, 바지를 내리지 않은 순간도 아쉬웠다. 공연이 막바지로 가면서 분위기가 최고조에 오르자 이기 팝은 벨트를 풀었다. 순간 팬들은 그가 바지를 내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는 벗지 않았다. 어느 한 관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정말 예쁘다(You are so fucking pretty)”라고 음흉한 목소리로 말했을 뿐. 만약에 그가 바지를 내렸다면 어땠을까?

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제공. 현대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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