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가펑클
아트 가펑클
아트 가펑클



“나는 세상의 모든 창조물들을 위해 노래했어요. 1951년부터 남들 앞에서 노래하기 시작했죠. 사람들은 내 목소리가 새소리 같다고 말해줬어요. 그때는 많은 이들이 날 알지 못했지만, 노래하는 게 천직이라고 생각했고 평생 노래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아트 가펑클은 노래 중간 쉬는 시간에 시를 읊어줬다. 그리고 시와 같은 가사로 이루어진 노래를 이어갔다. 한때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 젊은이들의 가슴을 아릿하게 했던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들. 노래가 곧 시이던 시절 사이먼 앤 가펑클은 전 세계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14일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아트 가펑클의 첫 단독내한공연에서는 시가 노래가 되는 마법과 같은 순간들이 이어졌다. ‘더 박서(The Boxer)’ ‘스카부르 페어(Scarborough Fair)’ 등의 노래가 나오자 객석을 채운 중장년층 관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제목부터 문학적인 ‘에이프릴 컴 쉬 윌(April Come She Will)’의 기타 전주가 나올 때에도 함성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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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가펑클의 미성은 여전했다. 간혹 힘이 부칠 때도 있었지만 우리 나이로 일흔 중반에 다다른 나이를 감안하면 원곡을 재현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가펑클은 자신의 목소리처럼 곱게 늙었다. 흰 셔츠 위로 검은 조끼를 입은 의상은 예전과 같았다. 아트 가펑클은 젊은 시절 폴 사이먼과 단둘이 공연할 때처럼 기타리스트 한 명만 대동하고 소박하게 무대를 이어 나갔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곡 외에 보사노바의 고전 ‘코르코바도(Corcovado)’도 가펑클의 미성과 잘 어울렸다. 아트 가펑클은 공연 중에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훌륭한 작곡가로 폴 사이먼과 함께 지미 웹, 제임스 테일러, 랜디 뉴먼 등을 꼽으며 이들이 만들어준 곡들도 들려줬다. 또 자신이 롤 모델로 삼은 에벌리 브라더스의 필 에벌리가 작년에 세상을 떠난 것을 언급하며 자신의 아들 아트 가펑클 주니어와 함께 ‘렛 잇 비 미(Let It Be Me)’를 노래하기도 했다. 아트 가펑클 주니어는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연상케 하는 미성을 자랑했다. 아트 가펑클은 현재 아홉 살이라는 또 다른 아들을 위해 만든 시를 들려줘 객석을 술렁이게 하기도 했다.

아들과 함께 노래하는 아트 가펑클
아들과 함께 노래하는 아트 가펑클
아들과 함께 노래하는 아트 가펑클



아트 가펑클의 솔로 시절 곡들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했던 솔로앨범 ‘브레이크어웨이(Breakaway)’에 수록된 ‘99 마일스 프롬 엘에이(99 Miles From L.A.)’를 노래할 때에는 그야말로 감성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오직 아트 가펑클만이 들려줄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아트 가펑클은 과거 폴 사이먼과 미국 전역을 돌며 버스킹을 하던 추억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둘이 노래를 해도 아무도 동전을 주지 않던 시절도 있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Sound of Silence)’ ‘브릿지 오버 트러블드 워터(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듣자 마음이 더욱 경건해지는 것 같았다.

이날 공연장에는 유난히 60대 관객들이 많아보였다. 공연을 본 이경애(66)씨는 “대학을 다닐 때 영화 ‘졸업’이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굉장한 열풍이어서 두세번 씩 봤던 기억이 난다”며 “당시로서 파격적인 스토리, 특히 마지막에 결혼식장을 박차고 뛰어나가는 장면들이 정말 강렬했고, 그 와중에 흐르는 아름다운 음악들이 그때는 그렇게 가슴을 뛰게 했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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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제공. 유니온스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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