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영화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올해로 감독 데뷔 50년째를 맞았다. 1971년 '어둠 속의 벨이 울릴 때'(Play Misty for Me)이후 지금까지 39편의 영화를 연출했으며, 그중 24편에는 본인이 직접 주연으로도 출연했다. 감독·배우는 물론 자신이 설립한 영화사를 통해 제작자도 겸하고 있는 데다 영화음악까지 손수 작곡한다. 올해 91세의 나이에도 본인이 감독하고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를 준비하고 있는 '진정한 거장'의 영화 인생을 훑어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24세 때인 1954년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트럭 운전을 하다가 연기자 발굴 프로그램을 통해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단역을 몇 번 맡다가 '이가 깨지고 목젖이 너무 튀어나와서' 해고되기도 했다. 그가 연기자로서 대중에 얼굴을 알리게 된 것은 미국 CBS TV에서 6년간 방영한 서부극 시리즈 <로하이드>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배역을 맡으면서다.
로하이드 출연 중에도 늘 연기 인생의 미래에 불안해하던 그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온다.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이른바 <달러 3부작> 주연을 맡게 되면서다. 여기엔 운과 더불어 그의 영화에 대한 강한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운이라면 레오네 감독이 그에 앞서 만났던 몇몇 배우들이 변변찮은 출연료 때문에 모두 거절한 덕에 우연찮게 그에게까지 기회가 왔다. 열정은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요짐보>의 리메이크판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채곤 선뜻 출연 제안을 받아 들인 것이다. 1964년말 개봉한 첫 편 <황야의 무법자>(A Fistful of Dollars)>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 스타게티 웨스턴은 이탈리아 제작진과 자본으로 미국 서부지역을 닮은 스페인의 사막 지형에서 찍은 이탈리아산 서부극이다. 그는 이어 나온 <석양의 무법자>(For a Few Dollars More, 1965)와 <석양에돌아오다>(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1966)로 일약 글로벌 스타로 발돋움한다. 카우보이모자를 눌러쓰고 말수가 없으며 찌푸린 냉소적인 표정으로 믿을 수 없는 총솜씨를 발휘하는 캐릭터는 지금까지도 그의 대표 이미지로 굳어져 있다.
키 193cm의 당당한 체구에서 내뿜는 그의 마초 이미지는 돈 시겔 감독의 <더티 해리>(1971)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가 맡은 역은 샌프란시스코 경찰청의 해리 캘러한 경사 역이다.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선 미란다 원칙도 보란 듯이 무시하고 관료주의적 수사 체계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열혈 형사 캐릭터에 관객들이 환호했다. 그 덕에 네 편의 후속물이 더해졌다. 특히 4편 <서든 임팩트>편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애드립으로 한 대사는 미국 영화사의 10대 명대사 중 하나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의회 연설에서 증세론자들을 겨냥하면서 인용해 더욱 유명해졌다. "어디 한번 해보자고. 덤빌테면 덤벼 봐."(Go ahead, make my day).
연기를 하면서도 그가 늘 갈망했던 것은 영화를 직접 찍는 것이다. <로하이드>에서 3000마리의 소떼 사이를 말을 타고 누비면서도 그의 머릿속에는 촬영과 편집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는 스페인어로 '피할 수 없는 나쁜 길목'이라는 의미심장한 뜻을 지닌 말파소(Malpaso)라는 제작사를 설립하고, 1971년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로 배우 생활 17년 만에 드디어 감독으로 데뷔한다. 라디오 방송국 DJ 역으로 주연까지 맡은 이 영화는 여성 팬의 광적 스토킹을 다룬 멜로 스릴러물이다.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평생에 영향을 미친 두 사람은 세르조 레오네와 돈 시겔이다.
그는 레오네와 <달러 3부작>을 찍으면서 '생략의 미학'에 눈을 떴다. <황야의 무법자>의 원대본은 실제 영화화된 것보다 대사가 엄청나게 길었으나 이스트우드가 대들면서 10분의 1로 줄었다. "관객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는 영화는 B급 영화이고, 관객이 생각하게끔 만드는 영화가 A급"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돈 시겔로부터는 영화 제작의 가성비를 배웠다. 이스트우드의 영화 제작의 철칙 중 하나는 최대한 효율적인 예산으로 빨리 찍는 것이다. 감독 데뷔 이후에도 스타 배우로서의 이미지가 훨씬 더 강했던 그에게 기념비적인 작품이 탄생한다. 1992년 주연까지 맡은 <용서받지 못한 자(Unforgiven)를 통해 평단으로부터 감독으로서도 역량을 인정받게 된다.
이 영화는 폭력이 일상화되고, 폭력의 정당성만 부각되던 기존 서부 영화의 관념을 송두리째 흔들어 놨다. 과거 저질렀던 폭력에 따른 영혼의 상실감으로 괴로워하고, 그러면서도 현상금을 위해 다시 총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총잡이의 번민과 보안관이라는 공권력의 위선적 정의의 잣대, 편협한 세상에서 여성이 겪는 고난까지 흡수한 걸작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받았고 보안관 리틀 빌 역의 진 핵크만은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공교롭게도 개봉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세르조 레오네와 돈 시겔에 바치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과 같이 했던 이전 영화들과 완전히 결별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 인생의 새 지평을 연 작품이 됐다. 특히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의 나이 70대 때인 2000년대에 깊은 울림이 있는 명작들을 쏟아 냈다. 2004년 여성 권투선수의 비극적인 삶을 다뤘지만, 실상은 아버지와 딸의 사랑이 바탕에 깔린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다시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거머줬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삶에 지친 권투 관장 프랭키 던으로 나오고, 이 영화를 위해 수개월간 권투 연습과 함께 체중을 8kg나 불린 힐러리 스웽크(매기 피츠제럴드역)가 인생 연기로 여우주연상을, 권투 시합 중 한쪽 눈을 실명한 뒤 프랭키의 권투 연습장에서 숙식하며 트레이너를 하는 모건 프리먼(에디 스크랩 역)이 남우조연상을 석권했다. 이 세람이 빚어내는 흡입력 가득한 연기와 휴머니즘적 메시지는 볼 때마다 매번 새로운 감동을 안겨준다.
2006년작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지금까지 나온 모든 전쟁 영화중 가장 독특한 구도의 작품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치열했던 이오지마 전투를 소재로 같은 감독이 한 번은 미국의 관점에서, 또 다른 한편은 일본의 관점에서 다뤄 전쟁영화의 신기원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버지의 깃발>에서는 다섯 명의 해병이 성조기를 꽂는 퓰리처상 수상 사진의 뒷얘기를 통해 전쟁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겪는 심리적 고통을,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는 길이 26km를 연결하는 땅굴을 파고 7만 명의 미 해병을 상대로 2만 2000명이 맞서 단 1000명만 남기고 모두 전사한 일본군이 전쟁에 임하는 모습을 처절하게 그렸다.
'현대판 사악한 도덕적 우화'라는 평이 달린, 폭력의 상처를 지닌 채 어른이 되어간 세 친구의 심리 드라마 <미스틱 리버>(2003)는 주연 숀 펜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줬다. 한국전 퇴역 용사로 쇠락한 디트로이트의 한 구역에 사는 고집 센 백인 노인과 아시아계 이민 청년 간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우정을 다룬 <그랜 토리노>(2008)에서 그가 보여준 영웅적 모습은 진정한 보수의 아이콘이 됐다. 그의 표현대로 미국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범죄와 부패 사건을 바탕으로 한 시대물<체인질링>(2009)에선 인간성의 상실과 공권력의 무자비한 횡포에 대해 직격탄을 날리는 동시에 삶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연출력을 보여줬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 세계의 가장 큰 철학은 '이야기'다. 그는 할리우드의 유행이 어떻게 흘러가든 거기엔 관심이 없다. 대신 마음에 와 닿고 자신이 잘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만 발견하면 이를 뿌리삼아 모든 영화적 요소를 펼쳐 나가는데 집중한다. 그는 영화에서 관객의 몫을 항상 염두에 두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서 한 말보다 하지 않은 말 때문에 더 흥미로운 '모호함의 매력'이 있다. <미스틱 리버>에서 션(케빈 베이컨)이 지미(숀 펜)에게 손가락으로 총을 쏘는 듯한 마지막 장면이나 <밀리언달러 베이비>에서 가방에서 앰플 주사기를 두 개 꺼낸 뒤 매기에게 한 대 놔주곤, 뿌연 유리창의 레몬 파이집에서 인기척이 나는 장면 등은 관객들에게 어떤 결말이 있을지 큰 궁금증을 유발한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머리가 묵직해 지거나 누구의 표현대로 '명치끝이 아파오는' 깊은 여운이 남게 된다.
제작자, 배우, 감독을 겸한 사람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외에도 또 찾아볼 수 있지만, 여기에 영화음악까지 직접 만든 사람을 찾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사선에서>(In The Line of Fire, 1993)에서 몇 차례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에서 볼 수 있듯, 스스로 재즈 피아니스트인 그는 <미스틱 리버> <체인질링>등의 영화음악을 직접 만들었다.
80대 후반의 나이로 마약 운반책이 된 실존 인물을 다룬 2018년작 <라스트 미션>(The Mule)에서 감독과 주연을 겸해 노익장을 과시한 그는 91세인 지금 또다시 감독 겸 배우로 나서는 <크라이 마초>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1973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영화 제작의 모든 과정을 사랑하고, 아마 평생 거기에 저를 바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원대한 계획을 갖고 살지 않았지만, 배움을 멈추지 않았던 삶이 자신을 계속 성장시킨 것 같다고도 했다. 그가 모토로 삼는 그의 아버지의 말이다. "사람은 나아지거나 부패하거나 둘 중에 하나밖에 없다."
글. 윤필영
주말 OTT 뽀개기가 취미인 보통 직장인. 국내 한 대기업의 영화 동호회 총무를 맡고 있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시각으로 영화 이야기를 전해 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24세 때인 1954년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트럭 운전을 하다가 연기자 발굴 프로그램을 통해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단역을 몇 번 맡다가 '이가 깨지고 목젖이 너무 튀어나와서' 해고되기도 했다. 그가 연기자로서 대중에 얼굴을 알리게 된 것은 미국 CBS TV에서 6년간 방영한 서부극 시리즈 <로하이드>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배역을 맡으면서다.
로하이드 출연 중에도 늘 연기 인생의 미래에 불안해하던 그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온다.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이른바 <달러 3부작> 주연을 맡게 되면서다. 여기엔 운과 더불어 그의 영화에 대한 강한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운이라면 레오네 감독이 그에 앞서 만났던 몇몇 배우들이 변변찮은 출연료 때문에 모두 거절한 덕에 우연찮게 그에게까지 기회가 왔다. 열정은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요짐보>의 리메이크판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채곤 선뜻 출연 제안을 받아 들인 것이다. 1964년말 개봉한 첫 편 <황야의 무법자>(A Fistful of Dollars)>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 스타게티 웨스턴은 이탈리아 제작진과 자본으로 미국 서부지역을 닮은 스페인의 사막 지형에서 찍은 이탈리아산 서부극이다. 그는 이어 나온 <석양의 무법자>(For a Few Dollars More, 1965)와 <석양에돌아오다>(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1966)로 일약 글로벌 스타로 발돋움한다. 카우보이모자를 눌러쓰고 말수가 없으며 찌푸린 냉소적인 표정으로 믿을 수 없는 총솜씨를 발휘하는 캐릭터는 지금까지도 그의 대표 이미지로 굳어져 있다.
키 193cm의 당당한 체구에서 내뿜는 그의 마초 이미지는 돈 시겔 감독의 <더티 해리>(1971)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가 맡은 역은 샌프란시스코 경찰청의 해리 캘러한 경사 역이다.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선 미란다 원칙도 보란 듯이 무시하고 관료주의적 수사 체계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열혈 형사 캐릭터에 관객들이 환호했다. 그 덕에 네 편의 후속물이 더해졌다. 특히 4편 <서든 임팩트>편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애드립으로 한 대사는 미국 영화사의 10대 명대사 중 하나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의회 연설에서 증세론자들을 겨냥하면서 인용해 더욱 유명해졌다. "어디 한번 해보자고. 덤빌테면 덤벼 봐."(Go ahead, make my day).
연기를 하면서도 그가 늘 갈망했던 것은 영화를 직접 찍는 것이다. <로하이드>에서 3000마리의 소떼 사이를 말을 타고 누비면서도 그의 머릿속에는 촬영과 편집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는 스페인어로 '피할 수 없는 나쁜 길목'이라는 의미심장한 뜻을 지닌 말파소(Malpaso)라는 제작사를 설립하고, 1971년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로 배우 생활 17년 만에 드디어 감독으로 데뷔한다. 라디오 방송국 DJ 역으로 주연까지 맡은 이 영화는 여성 팬의 광적 스토킹을 다룬 멜로 스릴러물이다.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평생에 영향을 미친 두 사람은 세르조 레오네와 돈 시겔이다.
그는 레오네와 <달러 3부작>을 찍으면서 '생략의 미학'에 눈을 떴다. <황야의 무법자>의 원대본은 실제 영화화된 것보다 대사가 엄청나게 길었으나 이스트우드가 대들면서 10분의 1로 줄었다. "관객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는 영화는 B급 영화이고, 관객이 생각하게끔 만드는 영화가 A급"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돈 시겔로부터는 영화 제작의 가성비를 배웠다. 이스트우드의 영화 제작의 철칙 중 하나는 최대한 효율적인 예산으로 빨리 찍는 것이다. 감독 데뷔 이후에도 스타 배우로서의 이미지가 훨씬 더 강했던 그에게 기념비적인 작품이 탄생한다. 1992년 주연까지 맡은 <용서받지 못한 자(Unforgiven)를 통해 평단으로부터 감독으로서도 역량을 인정받게 된다.
이 영화는 폭력이 일상화되고, 폭력의 정당성만 부각되던 기존 서부 영화의 관념을 송두리째 흔들어 놨다. 과거 저질렀던 폭력에 따른 영혼의 상실감으로 괴로워하고, 그러면서도 현상금을 위해 다시 총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총잡이의 번민과 보안관이라는 공권력의 위선적 정의의 잣대, 편협한 세상에서 여성이 겪는 고난까지 흡수한 걸작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받았고 보안관 리틀 빌 역의 진 핵크만은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공교롭게도 개봉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세르조 레오네와 돈 시겔에 바치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과 같이 했던 이전 영화들과 완전히 결별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 인생의 새 지평을 연 작품이 됐다. 특히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의 나이 70대 때인 2000년대에 깊은 울림이 있는 명작들을 쏟아 냈다. 2004년 여성 권투선수의 비극적인 삶을 다뤘지만, 실상은 아버지와 딸의 사랑이 바탕에 깔린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다시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거머줬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삶에 지친 권투 관장 프랭키 던으로 나오고, 이 영화를 위해 수개월간 권투 연습과 함께 체중을 8kg나 불린 힐러리 스웽크(매기 피츠제럴드역)가 인생 연기로 여우주연상을, 권투 시합 중 한쪽 눈을 실명한 뒤 프랭키의 권투 연습장에서 숙식하며 트레이너를 하는 모건 프리먼(에디 스크랩 역)이 남우조연상을 석권했다. 이 세람이 빚어내는 흡입력 가득한 연기와 휴머니즘적 메시지는 볼 때마다 매번 새로운 감동을 안겨준다.
2006년작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지금까지 나온 모든 전쟁 영화중 가장 독특한 구도의 작품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치열했던 이오지마 전투를 소재로 같은 감독이 한 번은 미국의 관점에서, 또 다른 한편은 일본의 관점에서 다뤄 전쟁영화의 신기원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버지의 깃발>에서는 다섯 명의 해병이 성조기를 꽂는 퓰리처상 수상 사진의 뒷얘기를 통해 전쟁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겪는 심리적 고통을,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는 길이 26km를 연결하는 땅굴을 파고 7만 명의 미 해병을 상대로 2만 2000명이 맞서 단 1000명만 남기고 모두 전사한 일본군이 전쟁에 임하는 모습을 처절하게 그렸다.
'현대판 사악한 도덕적 우화'라는 평이 달린, 폭력의 상처를 지닌 채 어른이 되어간 세 친구의 심리 드라마 <미스틱 리버>(2003)는 주연 숀 펜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줬다. 한국전 퇴역 용사로 쇠락한 디트로이트의 한 구역에 사는 고집 센 백인 노인과 아시아계 이민 청년 간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우정을 다룬 <그랜 토리노>(2008)에서 그가 보여준 영웅적 모습은 진정한 보수의 아이콘이 됐다. 그의 표현대로 미국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범죄와 부패 사건을 바탕으로 한 시대물<체인질링>(2009)에선 인간성의 상실과 공권력의 무자비한 횡포에 대해 직격탄을 날리는 동시에 삶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연출력을 보여줬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 세계의 가장 큰 철학은 '이야기'다. 그는 할리우드의 유행이 어떻게 흘러가든 거기엔 관심이 없다. 대신 마음에 와 닿고 자신이 잘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만 발견하면 이를 뿌리삼아 모든 영화적 요소를 펼쳐 나가는데 집중한다. 그는 영화에서 관객의 몫을 항상 염두에 두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서 한 말보다 하지 않은 말 때문에 더 흥미로운 '모호함의 매력'이 있다. <미스틱 리버>에서 션(케빈 베이컨)이 지미(숀 펜)에게 손가락으로 총을 쏘는 듯한 마지막 장면이나 <밀리언달러 베이비>에서 가방에서 앰플 주사기를 두 개 꺼낸 뒤 매기에게 한 대 놔주곤, 뿌연 유리창의 레몬 파이집에서 인기척이 나는 장면 등은 관객들에게 어떤 결말이 있을지 큰 궁금증을 유발한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머리가 묵직해 지거나 누구의 표현대로 '명치끝이 아파오는' 깊은 여운이 남게 된다.
제작자, 배우, 감독을 겸한 사람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외에도 또 찾아볼 수 있지만, 여기에 영화음악까지 직접 만든 사람을 찾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사선에서>(In The Line of Fire, 1993)에서 몇 차례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에서 볼 수 있듯, 스스로 재즈 피아니스트인 그는 <미스틱 리버> <체인질링>등의 영화음악을 직접 만들었다.
80대 후반의 나이로 마약 운반책이 된 실존 인물을 다룬 2018년작 <라스트 미션>(The Mule)에서 감독과 주연을 겸해 노익장을 과시한 그는 91세인 지금 또다시 감독 겸 배우로 나서는 <크라이 마초>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1973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영화 제작의 모든 과정을 사랑하고, 아마 평생 거기에 저를 바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원대한 계획을 갖고 살지 않았지만, 배움을 멈추지 않았던 삶이 자신을 계속 성장시킨 것 같다고도 했다. 그가 모토로 삼는 그의 아버지의 말이다. "사람은 나아지거나 부패하거나 둘 중에 하나밖에 없다."
글. 윤필영
주말 OTT 뽀개기가 취미인 보통 직장인. 국내 한 대기업의 영화 동호회 총무를 맡고 있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시각으로 영화 이야기를 전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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