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박미영 작가]
영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스틸컷
영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스틸컷
*이 글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블랙 로즈’라는 초콜릿의 첫 등장은 충격적이었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사각형 안에 장미가 새겨진 다크 초콜릿에 흠뻑 빠져들었다. 어른의 세계에 입문한 느낌이랄까. 쌉싸름한 뒷맛은 아이들이 상상으로도 그릴 수 없는 맛처럼 여겨졌다. 정작 어른이 되어서는 달큼한 초콜릿만을 찾고 있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리고 이따금 아득한 초콜릿의 첫맛을 그려보고는 한다.

브루클린의 10대 소년 마일스 모랄레스(샤메익 무어)는 후드티와 나이키 에어 조던 운동화, 힙합 음악과 그래피티 아트에 빠져 있다. 엘리트 학교인 브루클린 비전스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지만, 마음은 동네 친구들이 다니는 브루클린 중학교를 향하고 있다. 마일스는 뉴욕 경찰인 아빠 제퍼슨(브라이언 타이리 헨리)과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다. 매양 바른 말만 하는 아빠와는 벽이 느껴진다. 마일스는 관심이 가는 이성에게 통하는 필살기라며 “어깨를 툭 치고 ‘Hey!’라고 해봐”라고 일러주는, 친구 같은 삼촌 애런(마허샬라 알리)을 더 따른다.

마일스는 삼촌이 찜해둔 곳으로 그래피티를 하러 갔다가 방사능 거미에 물린다. 사춘기의 징후로만 생각했던 몸의 변화에서 스파이더맨의 기운을 읽어내고, 문제의 장소를 다시 찾아간다. 마일스는 그곳에서 스파이더맨, 즉 피터 파커(크리스 파인)와 마주친다. 피터 파커는 킹핀(리브 슈라이더)의 여러 차원의 세계를 열리게 하는 차원이동기를 막으려다가 그만 목숨을 잃고 만다. 간신히 도망친 마일스 앞에 다른 차원의 스파이더맨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먼저 피터 B. 파커(제이크 존슨)는 22년째 스파이더맨으로 살아오면서 스파이더맨 만화책, 시리얼, 크리스마스 캐럴, 끝내주는 주제가도 가졌지만 현재는 매력도, 사랑도 잃은 아재다. 스파이더 그웬(헤일리 스테인필드)은 친구를 잃은 슬픔에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는 10대 소녀다. 흑백으로만 존재하는 세계에 사는 스파이더맨 느와르(니콜라스 케이지)는 1933년 대공황 시기에 범죄자들과 싸우는 사설탐정이다. 3145년이라는 미래에서 온 페니 파커(키미코 글렌)는 스파이더맨 수트 대신에 스파이더 로봇 ‘SP//dr’을 조종하는 어린 소녀다. 방사능 돼지에 물린 스파이더햄(존 멀레이니)은 루니툰 캐릭터로 보여질 만큼 깜찍한 외모를 뽐내는 스파이더맨이다.

스파이더맨은 1962년 마블의 출판물로 첫 등장한 이래, 전 세계 마블 팬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다. 그리고 스파이더버스(Spider-Verse)는 2014년 마블 코믹스에서 연재된 스파이더맨 세계관의 총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 ‘얼티밋 코믹스 스파이더맨’ 속 평행세계로,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감독 밥 퍼시케티, 피터 램지, 로드니 로스맨)’는 시리즈 역사상 등장했던 모든 평행세계의 스파이더맨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 이야기다. 이들에게는 각각의 서사가 존재하지만, 소중한 누군가를 잃었다는 공통분모 또한 존재한다.

각각의 스파이더맨에게는 자신만의 고유한 능력이 있다. 마일스 역시 투명인간이 되는 위장술, 손만 대도 전류가 흐르는 베놈 스트라이크 능력을 갖게 된다. 문제는 능력 조절이 마음대로 안 되고, 한뜻으로 움직이는 동료들의 신뢰를 얻기에는 시간도 촉박하다는 점이다. 스파이더맨을 상대할 빌런의 면면도 솔깃하다. 2.4m의 거구에 2.1m에 달하는 어깨깡패 킹핀은 독보적인 외양만으로도 시선을 강탈한다. 또한 마블의 팬들에게 익숙한 빌런인 그린 고블린, 프라울러, 닥터 옥토퍼스의 등장도 반갑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마블 코믹스 원작을 오마주한 작품이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이미지 위에 직접 손으로 그린 그림으로 마감하고, 말풍선이나 “BOOM” “POW”등의 음향효과도 자막으로 등장하고, 만화책의 한 페이지처럼 화면을 여러 섹션으로 나누고, 만화책의 거칠게 넘어가던 느낌까지 구현했다. 클래식하게 담아내면서도 스타일리시함을 내려놓지 않았다. ‘스파이더버스’를 표현하기 위해 공을 들인 특수효과는 실사를 능가하는, 꿈틀거리는 생동감을 전한다. 그리고 다니엘 펨버튼은 경이롭게도 ‘음악’이라는 붓으로 형형색색의 그림을 그려냈다.

절대 죽지 않는 뱀파이어처럼, 절대 늙지 않는 10대로만 생각했던 스파이더맨. 그러나 피터 B. 파커는 22년을 스파이더맨으로 활약하면서 불룩한 똥배와 추리닝 차림으로 나이가 들었다. 갓 스파이더맨이 된 마일스에게 마스크를 소독하고, 수트 안쪽에 베이비 파우더를 뿌리라는 헐거운 충고도, 선배답게 “계속 나아가, 자신을 믿고 뛰어”라는 긴요한 충고도 하면서. 나는 히어로보다는 심하게 인간적인 그의 매력에 푹 빠졌다. 사실 마블의 히어로에게 유독 끌리는 점은 바로 그 인간적인 면이지만.

마블의 아버지인 고(故) 스탠 리가 이번에도 카메오로 수 차례 등장한다. 실사 영화가 아니라 애니메이션 속의 스탠 리는 뭐랄까 훨씬 더 스탠 리다웠다.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숨은 스탠 리 찾기’는 마블 시리즈를 누리는 커다란 즐거움인데 이번에는 더욱 반갑고, 더더욱 애틋했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관객의 심장에 찌릿찌릿한 섬광을 새기며 누구나 다 히어로가 될 수 있다고 설파한다.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라고, 누구든 이 마스크를 쓸 수 있다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면 된다고. 스탠 리의 마블 시리즈를 통해 코믹북의 첫맛을 보았을 관객들은 이 작품을 통해 곱씹어보는 뒷맛까지 누리게 될 듯싶다.

마블답게, 쿠키 영상이 있다. 이번 쿠키는 심하게 재미나니, 섣불리 극장을 나서지 마시기를!

12월 12일 개봉. 12세 관람가.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박미영 영화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한 작가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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