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식 평론가가 추천하는 이 작품]
수많은 관객에게 사랑 받는 대작부터 소수의 관객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 숨은 명작까지 영화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텐아시아가 '영화탐구'를 통해 영화평론가의 날카롭고 깊이 있는 시선으로 우리 삶을 관통하는 다채로운 작품들을 소개합니다.1970년 런던에서 열린 미스월드 대회는 난장판이 된 행사로 유명하다. 여성해방을 부르짖는 일단의 여성들이 행사 중간에 난리법석을 피운 덕분인데 이를 주도한 다섯 여성은 이른바 '평화저해죄(Breaching Peace)'로 기소됐고 결국 유죄판결을 받았다. 영국 법정에서, 당시의 정서로 볼 때는 적절한 죄목이었겠으나 후에 이 사건은 여성해방 운동의 중요한 분수령으로 자리잡게 된다.
박태식 평론가가 이번에 소개할 영화는 '미스비헤이비어'입니다.
성적 대상화를 국민 스포츠로 만든 세계적인 축제 미스월드에 맞서 진정한 자유를 외친 여성들의 유쾌한 반란을 담은 이야기로, 다채로운 여성 캐릭터들의 주체적인 여성 서사를 다뤄 호평 받았습니다.
'미스비헤이비어'(감독 필립파 로소프)를 보면서 이제까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다. '여성해방운동(Women's Liberation Movement)'이라는 용어가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 '여성해방이 인간해방'이라는 구호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리고 "난 예쁘지 않아요, 난 추하지도 않아요, 난 단지 화가 났을 뿐!"이라는 말이 유래된 곳 등등이다. 내게는 셋 다 익숙한 어휘들인 까닭에 영화에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인류를 움직인 중대한 역사 하나를 공부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최초로 백인 아닌 유색인종이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뽑힌 것도 70년 미스월드 대회였다. 샐리 알렉산더(키이라 나이틀리)는 4살 딸을 둔 엄마로 뒤늦게 대학에 진학했다. 역사를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주위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평생 가정주부로 자기를 희생한 엄마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조 로빈슨(제시 버클리)은 강력한 자기주장을 가진 열형여성이고 매사에 망설이는 샐리에게 큰 힘을 줬다. 또한 그라나다 대표로 미인대회에 참가한 제니퍼 호스텐(구구 바샤-로)은 변호사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를 둔 덕에 어릴 때부터 가족에게 존중을 받으며 살았다. 그러나 미인대회가 진행되는 양상은 그녀의 자존심을 이만저만 건드리는 게 아니었다.
세 여성 외에 미스월드 대회 전체기획자인 에릭 몰리(리스 이반)와 대회에 특별초대 손님으로 출연한 미국 코미디언 밥 호프(그렉 키니어)도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말하자면 주인공이 다섯이나 되는 셈이다. 이 다섯은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가 미인대회 당일 날 한 곳에서 만난다. 그러니 관객 입장에서는 차분하게 미스월드 행사 당일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이야기 전개에 긴장감을 한껏 높인 수준 있는 연출이라 하겠다. 미스월드 주최 측이 세계 각국에서 대표로 선발된 여성들을 다루는 모양을 보면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샐리가 대회 직전에 출연한 BBC 좌담회에서 '가축시장에 불과하다'고 정의내린 그대로였다. 여성들을 가슴·허리·엉덩이 크기로 평가하는 것은 물론 남성들이 좋아할 법한 특징들을 노골적으로 입에 담기도 한다. 밥 호프는 "매년 베트남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쇼에 미스월드 수상자를 데려갈 텐데 군인들에게 사기충전제가 따로 없죠. 또한 내 나이엔 필수품이고요"라고 한다. 이렇게 몰상식하고 난폭한 언어를 듣고 나는 새삼 놀랐다. 초등학생이었던 때 파월장병 위문공연에서 사회자들이 한 농담에 알지도 못하면서 덩달아 웃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당시 TV의 주 메뉴가 바로 그런 쇼였다. 유튜브에서도 당시 미스월드 대회의 현장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왜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 전 세계로 생방송 되는 가운데 벌어졌는지 궁금해진다. 오늘의 시각에서 몹시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말이다. 영화에서는 모든 문제가 가부장적 사고로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여자란 본디 가정주부로서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하고, 남성들의 일에 참견하지 말아야하며, 혹 대외활동을 하더라도 남성에게 순종적이어야 한다. 그러니 미인대회에 나와서 남성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일은 장려 받아 마땅하다. 영화 곳곳에서 어떻게 남성들의 여성비하적인 시각이 드러나는지 주의 깊게 관찰하길 바란다.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을 다큐멘터리 감각으로 풀어냈다. 그래서 미스월드 대회 후 주인공들의 행적을 뒤쫓았는데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독립된 인격체로 스스로의 삶을 자유롭게 선택하며 살아간 것이다. 역사학 교수로, 고등 법무관으로, 그리고 조산원으로 자신의 앞날을 개척했는데 그들의 행동 자체가 여성해방운동의 살아있는 증거다. 미스월드 대회에서 난동을 일으킨 직후 샐리가 미스월드에 뽑힌 제니퍼와 우연히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오늘 이 대회를 본 온 세계의 소녀들이 자신을 달리 보게 될 겁니다. 꼭 백인이어야만 세상에서 자리를 얻는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라는 제니퍼의 말에 샐리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기쁘네요, 세상이 당신과 그 아이들을 위해 열린 마음을 갖기 원합니다. 하지만 외모로 서로 경쟁하게 하면 우리를 위한 세계가 좁아지지 않을까요?" 스스로 선택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는 메시지다. 그 대사를 들으며 1963년 8월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워싱턴에서 한 연설에서 기억났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엔가 나의 네 아이들이 피부색으로 판단 받지 않고 인격으로 판단 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오늘날 한국에서 대세를 이루는 이른바 '걸 그룹'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A(남자 MC)씨의 엔진에 부스터를 달아줄 'XX소녀'의 무대를 보여드립니다"라는 소개를 받고 무대에 오른 여섯 명의 XX소녀들이 과연 인격으로 판단 받을 수 있을까. '미스비헤이비어'에 그려진 상황과 소녀들의 성을 상품화시키는 풍조가 만연한 우리나라와 과연 무엇이 다를까. 좋은 영화를 보고나서 괜스레 우울한 맘이 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박태식(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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