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확 잘라버리겠다는 상사 구용식(박시후)을 향해 “죄송합니다”라는 말 대신 “어우 무서워. 역시 인생, 갑과 을이군”이라고 받아치는 겁 없는 비서(MBC ). 키가 180cm가 훌쩍 넘는 톱스타 독고진(차승원)의 속을 살살 긁어놓다가도 술에 취해 “형님, 죽지마세요”라고 울먹거리는 귀여운 매니저(MBC ). 올해 상반기, 배우 임지규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비서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매니저를 연기했고 그 어느 때보다 대중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어디서 이렇게 연기 잘하는 배우가 튀어나왔냐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임지규가 지금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꼬박 10년이 걸렸다. 연기를 전공하지도 않은 부산 청년이 배우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무작정 상경해 어렵사리 첫 단편영화 를 만났지만 그 후 별다른 기회가 없었고, 2007년 영화 으로 ‘독립영화계의 스타’라는 별칭을 얻었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기엔 역부족이었다. 한 발 다가가면 두 발 도망가는, 닿을 듯 말듯 한 그의 꿈.
친구들은 어느새 안정된 직장을 얻고 결혼을 하는 동안, 임지규는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혼자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서른이 되는 과정에서 이 일을 그만둬야 되나”라는 생각까지 했던 그를 이곳까지 오게 만든 힘은 무엇이었을까. “누군가 내 삶을 영화로 본다고 하면 이런 생각을 할 거 아냐. 저 힘든 거 조금만 참으면 후반에 성공하는 이야기가 나올 텐데, 왜 못 참고 포기하지? 잘하든 못하든 어쨌든 마무리만 짓자, 그러면 뭔가 얻겠지 라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동안 콤플렉스였던 왜소한 체형마저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승화시킨, 어느새 자신이 꿈꿨던 미래에 성큼 다가선 임지규가 진심을 담아 추천하는 성장영화 다섯 편이라니. 어머, 이건 꼭 봐야해. 1. (Primal Fear)
1996년 | 그레고리 호블릿
“11년 전에 연기학원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영화다. 에드워드 노튼이 굉장히 연약하면서도 그 안에 다중인격을 가진 인물을 연기하는데, 그 사람과 내가 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한 눈빛과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어느 순간 폭력에 찌든 모습으로 바뀐다. 와, 저게 정말 한 사람이 연기하는 걸까,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개성이 강한 연기만이 잘하는 연기인 줄 알았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처음으로 배우로서 자극을 받았던 작품이다. 나한테 어떤 외국배우를 좋아하냐고 물어봤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에드워드 노튼이다.”
는 로마 가톨릭 대주교 살인 용의자 애런을 변호하겠다고 나선 베일의 이야기지만, 베일을 연기한 리처드 기어보다 더 주목받았던 배우는 애런 역의 에드워드 노튼이다. 순식간에 선악을 오가는 인상적인 연기 덕분에 무려 데뷔작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2. (Failan)
2001년 | 송해성
“당시 좋아했던 배우 장백지가 에 출연한다고 해서 봤는데, 장백지 연기도 정말 좋았지만 최민식 선배님을 보고 진짜 놀랐다. 점퍼 하나 걸치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는 3류 건달의 모습을 정말 리얼하게 표현하셨다. 덕분에 최민식 선배님이 연기하셨던 강재의 모습이 마치 내 이야기인 양 아프게 바라볼 수 있었다. 깡패 생활을 접은 강재가 부둣가에 앉아 자신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중국 여인(장백지)이 써준 편지를 읽고 운다. 남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던 그 사람이. 그 장면을 하루 만에 못 찍고 그 다음날까지 이어서 촬영했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하루를 넘기고도 충분히 아깝지 않은 명장면이었다. 나도 보면서 같이 울었다. 극장에서도 한 3~4번 봤고, DVD로도 여러 번 봤을 정도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영화다.”
까마득한 후배 깡패들도 그를 멸시하고 그 역시 자기 자신이 싫다. 살아가는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는 강재에게 어느 날 중국 여인이 찾아온다. 그녀만큼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이라 말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남자와 아무데도 의지할 곳 없는 여자, 최민식과 장백지의 호흡이 돋보이는 작품. 3. (Black)
2005년 | 산제이 릴라 반살리
“어느 순간부터 인도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눈이 안 보이는 8살 소녀 미셸이 한 선생님을 통해 ‘나도 뭔가 할 수 있다’는 걸 알아가고 성장해 가는데, 그 과정이 굉장히 설득력 있게 그려졌다. 우리는 어느 순간 뿅- 하고 성장해있는 걸 많이 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나도 어두운 상황에 있었지만 한 발 한 발 내딛으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갑자기 정전이 됐을 때, 미셸은 항상 다니는 길이니까 헤매지 않는데 오히려 선생님이 앞이 캄캄해서 넘어지고 난리가 난다. 입장이 바뀐 상황이다. ‘블랙’이 단순히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사람들의 편견이 주인공을 더욱 더 장애인으로 몰아가는 모습 역시 ‘블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성장하는 영화. 앞이 보이지 않는 제자에게 스승은 그의 눈이 되어주고, 알츠하이머에 걸린 스승에게 제자는 그의 기억이 되어준다. 엄마를 제외한 누구와의 소통도 거부하던 미셸이 처음으로 ‘워-터’라고 입을 떼는 장면에서는 누구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인도식으로 풀어낸 헬렌 켈러-설리번의 기적. 4. (3 Idiots)
2009년 | 라지쿠마르 히라니
“인도영화의 장점은 사회상을 통찰력 있고 직설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는 부모님의 반대 때문에 하고 싶은 걸 못하는 엘리트 공대생들의 이야기다. 우리나라도 얼마 전에 카이스트 학생들이 경쟁에 치여 안타까운 선택을 했는데, 나 역시 고등학교 때 내가 먼저 밟고 올라가야 성공할 수 있다는 교육을 받았다. 즐겁게 보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찔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인도에서 2009년 개봉 당시 를 제칠 정도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 명문 공대생들의 눈물겨운 싸움, 간간히 등장하는 인도 영화 특유의 뮤지컬 같은 유쾌한 장면이 잘 버무려져 있기 때문에 인도영화가 낯선 사람이라도 주인공들의 모습에 충분히 공감하면서 볼 수 있다. 5. (Good & Bye)
2008년 | 타키타 요지로
“망자를 보내면서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다. 오케스트라단이 갑자기 해체되면서 직장을 잃은 첼리스트가 여행가이드 면접을 보러 간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돌아가신 분에게 염을 해주는 ‘납관’ 일이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자길 버리고 도망간 상처가 있는데,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저 세상으로 보내드리는 부분에서 아버지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모습이 보였다. 일본 영화는 잔잔한 와중에 인간미를 자극하기 때문에 보면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망자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마음만큼이나 따뜻한 음악과 감성이 묻어난다. 특히 첼리스트였던 주인공이 들판을 배경으로 첼로를 연주하는 장면이 압권이다. 영화 과 의 히사이시 조가 OST를 작업했다. MBC 을 통해 말 그대로 ‘최고의 시간’을 보냈지만, 임지규는 지금 자신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오래갈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 끝나고 차기작이 좀 들어오지 않을까 살짝 기대했는데 정말 거~의 안 들어왔다. 이번에도 비슷할 거라 생각한다. 당장 일을 해야겠다는 욕심보다는, 임지규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만날 때까지 기다릴거다.” 여유롭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는 다음 스텝을 준비하고 있다. 그것이 영화가 될지 드라마가 될지, 혹은 “진심으로 한 번 해보고 싶은” 연극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임지규를 기다려 줄 차례다. 그가 지난 10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글. 이가온 thirteen@
사진. 채기원 ten@
친구들은 어느새 안정된 직장을 얻고 결혼을 하는 동안, 임지규는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혼자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서른이 되는 과정에서 이 일을 그만둬야 되나”라는 생각까지 했던 그를 이곳까지 오게 만든 힘은 무엇이었을까. “누군가 내 삶을 영화로 본다고 하면 이런 생각을 할 거 아냐. 저 힘든 거 조금만 참으면 후반에 성공하는 이야기가 나올 텐데, 왜 못 참고 포기하지? 잘하든 못하든 어쨌든 마무리만 짓자, 그러면 뭔가 얻겠지 라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동안 콤플렉스였던 왜소한 체형마저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승화시킨, 어느새 자신이 꿈꿨던 미래에 성큼 다가선 임지규가 진심을 담아 추천하는 성장영화 다섯 편이라니. 어머, 이건 꼭 봐야해. 1. (Primal Fear)
1996년 | 그레고리 호블릿
“11년 전에 연기학원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영화다. 에드워드 노튼이 굉장히 연약하면서도 그 안에 다중인격을 가진 인물을 연기하는데, 그 사람과 내가 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한 눈빛과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어느 순간 폭력에 찌든 모습으로 바뀐다. 와, 저게 정말 한 사람이 연기하는 걸까,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개성이 강한 연기만이 잘하는 연기인 줄 알았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처음으로 배우로서 자극을 받았던 작품이다. 나한테 어떤 외국배우를 좋아하냐고 물어봤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에드워드 노튼이다.”
는 로마 가톨릭 대주교 살인 용의자 애런을 변호하겠다고 나선 베일의 이야기지만, 베일을 연기한 리처드 기어보다 더 주목받았던 배우는 애런 역의 에드워드 노튼이다. 순식간에 선악을 오가는 인상적인 연기 덕분에 무려 데뷔작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2. (Failan)
2001년 | 송해성
“당시 좋아했던 배우 장백지가 에 출연한다고 해서 봤는데, 장백지 연기도 정말 좋았지만 최민식 선배님을 보고 진짜 놀랐다. 점퍼 하나 걸치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는 3류 건달의 모습을 정말 리얼하게 표현하셨다. 덕분에 최민식 선배님이 연기하셨던 강재의 모습이 마치 내 이야기인 양 아프게 바라볼 수 있었다. 깡패 생활을 접은 강재가 부둣가에 앉아 자신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중국 여인(장백지)이 써준 편지를 읽고 운다. 남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던 그 사람이. 그 장면을 하루 만에 못 찍고 그 다음날까지 이어서 촬영했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하루를 넘기고도 충분히 아깝지 않은 명장면이었다. 나도 보면서 같이 울었다. 극장에서도 한 3~4번 봤고, DVD로도 여러 번 봤을 정도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영화다.”
까마득한 후배 깡패들도 그를 멸시하고 그 역시 자기 자신이 싫다. 살아가는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는 강재에게 어느 날 중국 여인이 찾아온다. 그녀만큼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이라 말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남자와 아무데도 의지할 곳 없는 여자, 최민식과 장백지의 호흡이 돋보이는 작품. 3. (Black)
2005년 | 산제이 릴라 반살리
“어느 순간부터 인도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눈이 안 보이는 8살 소녀 미셸이 한 선생님을 통해 ‘나도 뭔가 할 수 있다’는 걸 알아가고 성장해 가는데, 그 과정이 굉장히 설득력 있게 그려졌다. 우리는 어느 순간 뿅- 하고 성장해있는 걸 많이 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나도 어두운 상황에 있었지만 한 발 한 발 내딛으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갑자기 정전이 됐을 때, 미셸은 항상 다니는 길이니까 헤매지 않는데 오히려 선생님이 앞이 캄캄해서 넘어지고 난리가 난다. 입장이 바뀐 상황이다. ‘블랙’이 단순히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사람들의 편견이 주인공을 더욱 더 장애인으로 몰아가는 모습 역시 ‘블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성장하는 영화. 앞이 보이지 않는 제자에게 스승은 그의 눈이 되어주고, 알츠하이머에 걸린 스승에게 제자는 그의 기억이 되어준다. 엄마를 제외한 누구와의 소통도 거부하던 미셸이 처음으로 ‘워-터’라고 입을 떼는 장면에서는 누구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인도식으로 풀어낸 헬렌 켈러-설리번의 기적. 4. (3 Idiots)
2009년 | 라지쿠마르 히라니
“인도영화의 장점은 사회상을 통찰력 있고 직설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는 부모님의 반대 때문에 하고 싶은 걸 못하는 엘리트 공대생들의 이야기다. 우리나라도 얼마 전에 카이스트 학생들이 경쟁에 치여 안타까운 선택을 했는데, 나 역시 고등학교 때 내가 먼저 밟고 올라가야 성공할 수 있다는 교육을 받았다. 즐겁게 보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찔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인도에서 2009년 개봉 당시 를 제칠 정도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 명문 공대생들의 눈물겨운 싸움, 간간히 등장하는 인도 영화 특유의 뮤지컬 같은 유쾌한 장면이 잘 버무려져 있기 때문에 인도영화가 낯선 사람이라도 주인공들의 모습에 충분히 공감하면서 볼 수 있다. 5. (Good & Bye)
2008년 | 타키타 요지로
“망자를 보내면서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다. 오케스트라단이 갑자기 해체되면서 직장을 잃은 첼리스트가 여행가이드 면접을 보러 간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돌아가신 분에게 염을 해주는 ‘납관’ 일이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자길 버리고 도망간 상처가 있는데,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저 세상으로 보내드리는 부분에서 아버지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모습이 보였다. 일본 영화는 잔잔한 와중에 인간미를 자극하기 때문에 보면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망자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마음만큼이나 따뜻한 음악과 감성이 묻어난다. 특히 첼리스트였던 주인공이 들판을 배경으로 첼로를 연주하는 장면이 압권이다. 영화 과 의 히사이시 조가 OST를 작업했다. MBC 을 통해 말 그대로 ‘최고의 시간’을 보냈지만, 임지규는 지금 자신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오래갈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 끝나고 차기작이 좀 들어오지 않을까 살짝 기대했는데 정말 거~의 안 들어왔다. 이번에도 비슷할 거라 생각한다. 당장 일을 해야겠다는 욕심보다는, 임지규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만날 때까지 기다릴거다.” 여유롭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는 다음 스텝을 준비하고 있다. 그것이 영화가 될지 드라마가 될지, 혹은 “진심으로 한 번 해보고 싶은” 연극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임지규를 기다려 줄 차례다. 그가 지난 10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글. 이가온 thirteen@
사진. 채기원 ten@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