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한 운명 앞에서 때로 인간은 한낱 나뭇가지만도 못한 존재가 되곤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놀라운 의지로 신의 시험과 맞서고, 그때 그는 강인하고 두터운 거목이 되어 한 톨의 자비도 없이 세상을 휩쓰는 운명의 비바람 속에서 주위 사람들을 구원한다. 빅토르 위고의 불멸의 고전을 원작으로 만든 뮤지컬, 그리고 그 뮤지컬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 <레미제라블>은 이처럼 스스로의 의지로 초인이자 구원자가 된 한 남자, 장 발장의 이야기다. 이 장 발장을 휴 잭맨이 연기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보다 완벽한 캐스팅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영화의 첫 장면, 세찬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노역을 하는 휴 잭맨의 장 발장이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맨 중의 맨’이라는 아름다운 헌사가 보여주듯, 언제부턴가 휴 잭맨은 믿고 신뢰할만한 남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189cm의 장신과 고밀도의 단단한 근육으로 다져진 강인한 체격이 1차 이유요, 여기에 그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두터운 획을 그은 영화 <엑스맨> 시리즈에서 분한 울버린의 영향 또한 클 것이다. <엑스맨> 외에도 드라큘라와 전면전을 벌이는 신의 사제로 분한 <반 헬싱> 시리즈도 있지만, 비단 액션 스타 혹은 슈퍼 히어로로서의 모습이 배우 휴 잭맨의 전부는 아니다. 실연에 힘들어 하는 룸메이트 제인(애슐리 주드)의 신경을 유들유들한 태도로 건드리던 <썸원 라이크 유>의 바람둥이 에디와 2001년의 뉴욕 한복판에 떨어져 세상물정 모르고 낭만을 시전하던 19세기 남자 레오폴드로 매력을 발산했던 <케이트 앤 레오폴드> 같은 로맨스 영화 속에서 휴 잭맨은 거구에도 불구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남자였다.
하지만 우리가 그에게 가장 가슴이 설레는 순간은 아들을 위해 낡은 로봇과 마주 서서 잽을 날리던 <리얼 스틸>이나 원주민 소년 눌라(브랜든 월터스)와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폭격 속에 몸을 날리던 <오스트레일리아>에서처럼 든든하고 헌신적인 보호자의 모습일 때였다. <레미제라블>에서도 마찬가지다. 코제트(아만다 사이프리드)의 연인 마리우스(에디 레드메인)를 구하기 위해 그를 어깨에 들추어 멘 모습이 얼마나 든든한가. 혁명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청년들을 그들의 부모 품으로 돌려보내자고 신에게 ‘Bring him home’ 해달라고 노래하던 목소리는 얼마나 절실한가. 인간은 누구나 감당하기 힘든 고난과 마주할 수밖에 없지만 그때 내 곁에서 격려하고 지켜주는 이의 존재가 있어 그 순간을 이겨낼 수 있는 법이다. <레미제라블>의 판틴(앤 헤서웨이)과 코제트에게는 장 발장이 바로 그런 이였다. <레미제라블>에서 휴 잭맨은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줄 뿐 아니라 묵직한 노래까지 들려준다. 70년대 천재적인 싱어 송 라이터 피터 앨런의 생애를 다룬 뮤지컬 <오즈에서 온 소년>으로 2004년 토니상 뮤지컬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적 있을 만큼 뮤지컬에서도 재능을 보여 온 휴 잭맨이 추천한 작품들은 시간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을 이야기와 넘버들로 가득한 뮤지컬 영화들이다.
1. <사랑은 비를 타고> (Singin` In The Rain)
1954년 | 진 켈리, 스탠리 도넌
“<사랑은 비를 타고>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뮤지컬 영화다.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영화지만 여전히 가장 멋진 뮤지컬 영화라고 생각한다. 남자 주인공 진 켈리의 댄싱과 음악이 정말 잘 어우러져 있다.”
가장 유명한 뮤지컬 영화 중 하나일 <사랑은 비를 타고>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전환되는 시점의 할리우드 영화계가 배경인 고전 로맨스 영화다. 아마추어 쇼 코미디언인 돈 록우드(진 켈리)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린다 라몬트(진 헤이근)와의 만남으로 갑자기 스타가 된다. 하지만 유성영화의 등장으로 목소리 연기가 형편없던 린다는 인기를 잃게 되고 돈 역시 함께 추락한다. 노란 우비를 입고 탭댄스를 추는 유명한 신을 비롯해 인상적인 장면이 많은 이 영화는 유쾌한 슬랩스틱 코미디이기도 하다.
2. <사운드 오브 뮤직> (The Sound Of Music)
1978년 | 로버트 와이즈
“이 작품 역시 오래된 영화지만 정말 명작이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많이 봤는지 정확히 셀 수도 없을 정도다. 내 아이들에게도 보여주었다. 아무리 시간이 많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는 클래식 영화라고 생각한다.”
퇴역해군인 트랩 대령(크리스토퍼 플러머)은 7명의 자녀를 둔 홀아비다. 엄격한 군대식 교육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어 아이들은 아빠를 두려워하는데, 트랩 대령 집안에 가정교사로 부임한 마리아(줄리 앤드류스)는 아이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함으로써 밝은 분위기를 만들려고 한다.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영화 속에서 마리아가 아이들과 함께 부르는 <도레미 송>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폰 트랩 대령 일가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이 작품은 미국에서 영화로 만들어지기 전 독일에서 영화로 만들어졌고,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로 공연된 바 있다.
3. <맘마 미아!> (Mamma Mia!)
2008년 | 필리다 로이드
“요즘 만들어진 뮤지컬 영화로는 <맘마 미아!>를 추천하고 싶다. 이번에 <레미제라블>에 함께 출연한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주연을 맡기도 했지만 이 영화 속에서는 메릴 스트립도 정말 멋지다. 특히 노을이 지는 바닷가에서 그녀가 ‘The winner takes it all’을 부르는 장면은 정말 할 말을 잊게 만들었다.”
1970, 80년대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스웨덴 출신의 팝그룹 아바(ABBA)의 음악으로 기획된 뮤지컬 <맘마미아>가 2008년 메릴 스트립, 피어스 브로스넌, 콜린 퍼스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리스 지중해의 작은 섬을 무대로, 젊은 날 꿈 많던 아마추어 그룹 리드싱어였다가 지금은 작은 모텔의 여주인이 된 도나(메릴 스트립)와 그녀의 스무 살짜리 딸 소피(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주인공이다. 아름다운 지중해 바닷가 풍광과 청명한 아바의 음악들로 언제 봐도 기분 좋은 상쾌함을 전해주는 영화다.
4. <물랑 루즈> (Moulin Rouge)
2001년 | 바즈 루어만
“이 영화는 음악뿐 아니라 미술까지 모두 환상적인 작품이다. 2002년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한 많은 부문에 후보로 올랐고 골든글로브 작품상과 여우주연상 등 많은 상을 수상했다. <레미제라블> 역시 <물랑 루즈>의 뒤를 잇는 작품이 되기를 바란다.”
호주 출신의 바즈 루어만 감독이 특유의 대담하고 화려한 영상미를 과시한 영화 <물랑 루즈>는 “젊은 시인이자 음악가가 꿈에 그리는 사랑을 찾아 지하의 세계로 간다”는 오르페우스의 신화에 뿌리를 두어 치명적 로맨스를 그린다. 배우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의 노래는 물론 화려한 쇼 장면 등 다양한 볼거리가 인상적인 <물랑 루즈>는 수백 명의 엑스트라와 무용수가 출연해 가장 화려한 뮤지컬 영화로 손꼽힌다. 제74회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과 여우주연상 등 총 8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미술상과 의상상을 수상했다.
5. <오페라의 유령> (The Phantom Of The Opera)
2004년 | 조엘 슈마허
“이 작품 역시 멋진 뮤지컬 영화다. <레미제라블>의 제작자이기도 한 카메론 매킨토시가 제작을 맡은 세계적인 뮤지컬이 원작이다. 단 한 소절만으로도 사람을 사로잡는 넘버들이 단연 돋보인다. 제라드 버틀러의 노래와 연기도 아주 인상 깊었다.”
가장 대중적인 뮤지컬 영화 중 하나인 <오페라의 유령>은 다양한 나라에서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다. 2004년에 개봉한 조엘 슈마허 감독의 <오페라의 유령>은 영화 <300>으로 유명한 제라드 버틀러가 팬텀 역을 맡아 <300>의 강인한 카리스마와는 사뭇 다른 치명적인 매력을 선보였다. 마치 블록버스터 같은 화려하고 정교한 세트 속에 원작 뮤지컬을 충실히 재현한 이 작품은 조엘 슈마허 특유의 카메라 워크로 뮤지컬 영화일 뿐 아니라 한 편의 뮤직비디오 같은 영상미를 자랑한다.
휴 잭맨은 <레미제라블> 홍보를 위한 내한 기자회견에서 “장 발장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 아닌가 싶다. 너무나 많은 역경을 겪고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더 높이 비상하지 않았나. 그래서 사람들이 장 발장에게서 영감을 받고 그의 겸손이나 용기, 남을 위하는 마음을 본보기로 삼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와 동행한 제작자 카메론 매킨토시는 이렇게 덧붙였다. “배우가 절대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게 그 사람 안에 있는 마음이다. 심성이랄까. 그런데 휴 잭맨은 정말 타고난 고운 심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장 발장을 잘 연기해준 것이다.” 다재다능한 배우에서 성실한 남편, 다정한 아버지까지 훈훈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휴 잭맨의 얼굴은 카메론 매킨토시의 말처럼 고운 그의 내면에서 비롯되는 것임이 분명하다. 맨 중의 맨, 휴 잭맨. 당신은 진정 아름다운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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