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만져지지 않는다. 눈으로 볼 수도 없다. 음악의 통로란 오로지 귀뿐이지만, 때때로 일상의 리듬을 바꾸거나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는다. 지난 8월 27일부터 29일까지 3부작으로 방송된 EBS ‘음악은 어떻게 우리를 사로잡는가’는 그 이유를 성실하고도 지루하지 않게 탐구한 작품이다. 리듬은 시간의 흐름을 조절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설명되고, 조성은 음들이 구석구석을 여행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으로 비유된다. 음악에 학문적으로 접근하되, 머리가 아닌 감각으로 받아들이게 했던 이 다큐는 여기에 음악에 대한 뮤지션들의 솔직한 고백까지 첨가하며 창작자와 청자 사이에 작지만 튼튼한 다리 하나를 놓는다. 이 중심에는 약 7년 동안 의 연출자로 활약했던 백경석 PD가 있었다. 다음은 예상치 못한 싱커페이션(당김음)과 악센트가 가득했던 그와의 인터뷰다.방송 직전까지도 편집을 했다고 들었다. 방송이 끝난 지금 기분은 어떤가.
백경석 PD: 편집만 딱 3개월이 걸렸다. 편집실에서 나올 때는 감옥에서 출소한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 방송 끝난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아직도 잠을 잘 못 잔다. 눈만 감으면 편집을 하는 거다. (웃음) 다큐멘터리를 처음 만들어 봤는데 1년 동안 영혼을, 말하자면 머릿속 한 곳을 하나의 주제에 계속 저당 잡힌 기분으로 산 것 같기도 하다.
“이번 다큐는 배움과 발견의 과정이었다” 원래 을 오랫동안 연출했는데, 이 기획은 어떻게 구상하게 된 건가.
백경석 PD: 에 있던 시절 ‘헬로루키’ 등에서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2천 팀 넘게 심사하면서 항상 이런 고민이 있었다. ‘음악이 아름답다는 건 뭐지? 나는 옳은 기준을 가지고 있나? 뮤지션들이 만든 음악에 대해 내가 알지도 못하면서 심사를 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이게 개인적인 화두가 돼 버린 건데, 지난해 3월 팀으로 발령을 받아 아이템을 생각하다가 이번 다큐를 기획하게 됐다. 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땐 “이제까지 없던 음악 다큐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땐 뭐가 나올지 몰랐으니까. (웃음) 윗분들도 ‘잘하려나?’ 싶으셨을 거다. 어쨌든 처음에는 여전히 PD로서의 마인드와 가치관을 가지고 임했던 것 같다. 그때 생긴 음악에 대한 가치관이나 입장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겠지.
그게 어떤 입장이었을까.
백경석 PD: 사람들이 현대 미술을 볼 때는 난해하니까 공부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걸 이해하면 고상해진다고 여기기도 하고. 반면 음악에 대해서는 조금도 공부하지 않고, 직관적인 이해만으로 충분하다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래서 의미를 알 수 없던 그림이 이해할수록 더 흥미로워지는 것처럼, 음악을 통해서도 아는 만큼 들리는 기쁨을 많은 사람이 느끼길 바랐다. 궁극적으로는 다큐를 본 분들이 음악을 더 좋아하게 되길 원한 거고. 오래된 CD를 꺼내어 듣거나, 묵혀뒀던 기타를 다시 쳐보거나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도를 위해서 기획할 때 가장 중점적으로 염두에 두었던 건 무엇이었나.
백경석 PD: 크게 두 가지 포인트가 있었다. 첫 번째는 현재 이 유지하고 있는 가능한 친절한 방식의 해설과 정제된 그림으로 갈 것. 두 번째는 음악을 음악 안에서만 다룰 것. 많은 음악 다큐들이 사실은 음악인들을 다루는 휴먼 다큐거나 페스티벌의 열광을 담는 형식이지 않나. 때문에 처음 기획의 전체 틀은 3부 ‘음악가들’과 유사했다. 특별한 연출은 필요 없다, 음악가들이 진심을 이야기하는 것 이상의 답은 없다고 생각한 거다. 인터뷰를 광범위하게 해보거나, 입장이 다른 몇몇 뮤지션들을 따라다니면서 대립하는 입장이나 의견을 자연스레 드러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다가 지금의 기획으로 바뀌었다. 결국 프로덕션은 리듬을 다룬 1부 ‘시간의 주인’과 조성을 다룬 2부 ‘집으로 가는 길’을 중심으로 하고, 3부는 그 두 가지를 뺀 모든 걸 다뤄야 이야기가 끝날 것 같았다.
귀로 듣는 음악을 애니메이션과 CG 등 여러 장치를 통해 시각적으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1, 2부가 흥미로웠다. 음악을 시간의 이야기로 풀어내거나 여행에 비유하는 것도 탁월했고.
백경석 PD: 음악이라는 게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에 각 음을 높이가 다른 화분으로 표현한다든지, 못질을 통해 리듬을 보여준다든지 하는 은유를 쓰는 데 있어서 고민이 많았다. 1차원적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의 역량이 워낙 뛰어나서 처음 잡았던 시각적 콘셉트나 핵심 개념을 놓치지 않더라. 2부에서 시장의 풍경을 이용해 머니 코드를 보여준다든지 하는 것들처럼 보는 사람에게 재미있고 직관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아이디어를 많이 내놨다. 그리고 음악을 시간의 이야기로 다루게 된 건 사실 마지막쯤 얻은 결론이다. 편집을 거듭하다 보니 이게 결국은 그 문제라는 걸 깨달은 거다. 자세히 보면 1부에서 이이언 씨의 ‘Bulletproof’와 함께 흐르는 영상은 뒤늦게 EBS의 기존 자료들을 싹싹 긁어모아 넣은 것들이다. 여행에 대한 은유는 한양대학교 작곡과에 계신 정경영 교수님께서 먼저 제공해 주신 거고. 여러모로 배움과 발견의 과정이었다. (웃음)
이론적인 공부도 병행해야 했을 텐데.
백경석 PD: 방송 내용에 내가 공부한 걸 최대한 다 담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웃음) 일단 주제를 정한 후에는 검색부터 시작했다. 관련된 책들이라면 국내외 것을 막론하고 무조건 뒤지기도 했다. 실제로 가장 도움이 많이 됐던 건 외국 대학교의 음악감상 교재였다. 굉장히 딱딱한데 그 자체로 그냥 재미있었다. 그 외에 음악 관련 학회의 논문을 복사해서 무조건 읽은 적도 있고, 전문가분들의 자문도 많이 구했다. 그런데 음색 부분은 참고 자료도 별로 없고 영상으로 표현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몇 달 붙잡고 있다가 결국 포기해야 했다.
“칵스의 ‘Take me far from home’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지” 워낙 전문적인 분야이기 때문에 내레이션과 진행을 맡은 피아니스트 박종훈의 존재가 정말 중요했을 것 같다.
백경석 PD: 박종훈 씨는 클래식 분야에서도 손꼽히는 피아니스트면서, 대중음악 작업도 지속해서 하고 계시기 때문에 프로그램과 딱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물론 피아노가 화성과 멜로디 등 음악 전체를 포괄할 수 있다는 미덕도 있었고. 촬영 과정에서도 헌신을 많이 해주셨다. 우리는 김치찌개를 시켜서 먹고, 박종훈 씨는 촬영을 위해 연습도 해야 하니까 옆에서 막 라이브로 피아노를 연주해주시고. 하루에 세 시간씩 자면서 열흘 동안 찍는 강행군이었으니 나중에는 “컷!”만 하면 졸더라. 박종훈 씨가 작곡하면서 고뇌하는 장면들은 사실 다 조는 장면이었다. (웃음) 그런데도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으셔서 깊이 감사하고 있다.
약간의 연기가 필요한 역할이었는데 쑥스러워하진 않았나. (웃음)
백경석 PD: 그 분이 말수는 없지만 원래 쑥스러운 건 없는 사람이다. 부끄러운 게 별로 없고 되게 대범하다. 연기도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약간의 가이드를 드리니 금방 좋아지시더라. 신이 촬영순서와 상관없이 섞여 있으니까, 완성된 작품을 보면 이 분이 연기를 잘 했다가 못 했다가 한다. (웃음)
박종훈이 직접 만든 ‘음악은 어떻게 우리를 사로잡는가’라는 곡도 발표됐는데, 처음부터 타이틀곡으로 계획했던 건가.
백경석 PD: 그런 것까진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는데 박종훈 씨가 제안해주셨다. 타이틀곡이 있는 게 좋겠다면서 직접 쓰겠다고 하시더라. 아예 새로 쓰신 건 아니고, 스케치 정도 해놓은 곡이 있었는데 다큐 제목이 정해진 후 마무리를 한 거다. 덕분에 프로그램 같은 제목의 음악이 탄생했다.
이야기의 굵직한 줄기는 클래식이되, 트로트나 재즈 등 다양한 장르를 소개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이런 특성은 음악의 기초를 다루기 때문이었나.
백경석 PD: 많은 참고 문헌들이 클래식을 중심으로 음악을 설명하고 있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런 책들이 전부 서양클래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중심이 됐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곡들은 검증된 음악이기도 하고, 선곡이나 설명을 하기에도 깔끔하고 선명한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클래식을 기반으로 한 후 동등한 층위에서 대중음악을 집어넣으면, 후자의 권위에 대한 편견이 없어질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특히 2부에 삽입된 칵스의 ‘Take me far from home’이 음악의 여행이라는 콘셉트와 잘 어울렸다.
백경석 PD: 칵스의 노래를 발견한 건 굉장한 행운이었다. 2부 이야기가 너무 재미없을 것 같아서 고민하던 중, 마침 칵스의 싱글이 나왔는데 제목이 ‘Take me far from home’이었던 거다. 주제와도 딱 맞고, 노래를 들어봤더니 코드 변화도 많을뿐더러 세련됐다 싶어서 넣었다. 그 곡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지. (웃음) 정말 밋밋했을 거다.
“ 졸업 작품을 하고 있었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감각적인 부분을 강조한 1, 2부와 달리 3부는 단지 뮤지션들의 인터뷰로 구성돼 있음에도 반응이 좋지 않았나.
백경석 PD: 1, 2부를 찍는 동안 틈틈이 인터뷰를 했다. ‘음악은 어떻게 우리를 사로잡을까요?’라는 막연한 주제로 인터뷰했고, 그에 대한 답들의 결이 생기길 바라면서 그냥 쌓아뒀다. 편집할 땐 그 답변들을 성의껏 정리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은 단순한 구성이 나왔다. 맞는 말이지만 재미는 없을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보는 분들도 좋아해 주시더라.
세 편의 인트로가 모두 박종훈이 악보를 그리는 모습인데, 3부에서만 내레이션이 빠져있더라. 인터뷰한 뮤지션들의 존재를 최대한 전면에 내세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백경석 PD: 사실 별 생각 없이 뺐다. (웃음) 그래도 설명을 하자면, 1, 2부는 박종훈 씨가 주요한 화자로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니까 그의 내적 관심이라는 스타일의 틀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사적인 느낌을 주는 1인칭 내레이션이 어울리는 거다. 그런데 3부에서는 박종훈 씨가 아니라 인터뷰를 한 많은 음악가가 화자다. 그런 느낌이었기 때문에 개인의 말을 얹는 게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인트로도 박종훈 씨가 개인 작업을 하는 것 같은 비주얼에 음악이 흐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중 이영조 작곡가의 “음악은 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다”는 말이야말로 이 다큐의 기획 의도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 아닌가.
백경석 PD: 민망하지만 그런 열망이 있었다는 걸 숨길 수는 없다. 내 마음속에 있었던 말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내 자신이 그런 체험을 많이 했으니까. 7년 방송의 최대 수혜자가 바로 나다. (웃음) 뮤지션을 섭외하기 위해서,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서 음악을 열심히 들으면서 이것이 흥미진진하고 어마어마한 세계라는 걸 깨달았거든.
어쨌든 첫 다큐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끝낸 것 같은데.
백경석 PD: 돌이켜보니 잘못은 다 나의 몫이고, 주변에 있는 스태프들의 도움이 엄청나게 컸다. 내가 부탁했을 때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도와주신 뮤지션분들도 많았고. 그 모든 분이 없었더라면 이 다큐를 만드는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마지막 편을 보고 깨달았다. 내가 졸업 작품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아무도 그러라고 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해왔던 프로그램에 대해 느끼는 책임감이 있었던 것 같다. 형식적인 부채감은 좀 던 느낌이니 다음에는 좀 가벼워지려고 한다.
이번 다큐를 본 시청자들이라면 심화 편을 기대할 것 같기도 하다.
백경석 PD: 누구보다 내가 그렇다. 음색 같은 부분들은 시리즈가 돼야 할 정도의 큰 볼륨을 가지고 있는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그게 개인적인 숙제로 남아있는 건데, 기획과 방송에 관한 결정은 나 혼자 하는 게 아니지 않나. 내 제작 실력이 조금 더 좋아지고, 만듦새도 세련돼진다면 언젠가는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당장은 안될 것 같고. (웃음)
그렇다면 지금 생각하고 있는 다음 아이템은 무엇인가.
백경석 PD: 현재 막연하게 통과된 기획안이 있는데, 소재는 악기다. 이번 다큐를 찍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고생해서, 일단은 카메라를 들이대면 찍히는 소재를 다루고 싶다. (웃음) 또, 다음에는 ‘내 안에서 무언가 말하고 싶어서’라는 것보다 ‘악기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은 무엇을 궁금해할까?’라는 방식으로 구체화를 해볼까 한다. 지난 작업을 하면서 반성 리스트를 만들었으니 개선해봐야지. 하긴,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다큐를) 많이 만들어도 늘 똑같다고 하더라. 고민의 영역이 바뀔 뿐이지. (웃음) 그런 긴장감이 나쁘진 않다.
글. 황효진 기자 seventeen@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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