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주의 10 Voice] <두 개의 선>, 하지 않고자 하는 욕망을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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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다’ 경계를, 한계를, 혹은 금기를 넘는 것을 의미하는 관용구가 현실에선 얼마나 어려운가. 다큐멘터리 은 임신 테스터 위 두 가닥 선을 보고 굳어버린 남녀에서 시작된다. 이 영화는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 선에 걸려 넘어진 이들의 솔직한 고백이다. 연애를 시작한지 10년, 연인이자 룸메이트로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던 지민과 철의 일상에 붉은 선 두 개가 그어졌다. ‘아이가 생긴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 절망했었다’고 지민은 고백한다. 테스터가 불량이길 바란 건 준비하지 못 한 임신이라서만은 아니다. 둘은 미혼이 아닌 비혼을 선택한, 즉 결혼하지 않기로 결심한 이들이다. 하지만 임신 소식을 전하자 돌아오는 답은 한결같이 “그럼 이제 결혼해야지”다.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누군가는 “이렇게 이기적인 애가 있냐?”고 누군가는 “결혼 안 하고 애를 갖는 건 부도덕한 짓”이라고 말했다. 다큐멘터리 감독과 대학 시간강사, 충분하지도 안정적이지도 않은 경제적 상황이지만 미성년도 아닌 서른 넘은 어른들이건만 결혼하지 않고 부모가 될 권리를 주장하기 쉽지 않다.

결혼을 둘러싼 것들에 대한 가장 현재적인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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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세 명의 동갑내기 여성 감독 지민, 나비, 손경화는 ‘여성영상집단 반이다’라는 이름으로 다큐멘터리 을 선보였다. 자기 자신들이기도 한 평범한 20대들의 목소리를 담은 은 카메라를 든 사람과 찍히는 사람, 보는 사람 모두가 수평적 관계에서 우리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수작이었다. 반이다가 제작한 은 지민 감독이 자신의 삶을 담은 사적 다큐멘터리다. 노동운동을 하며 도피와 수감 생활을 반복한 부모님을 보며 자란 그녀에게 평범한 가족처럼 사는 것은 내내 숙제였다. 결혼이라는 제도와 불화했던 부모는 지민이 삶의 형태로서 결혼은 무엇인가 고민하게 했고, 연애 6년차에 프러포즈를 한 철에게 그녀는 그냥 같이 살 것을 제안했다. 은 비혼, 동거, 임신과 출산에 관한 현재적이고 현실적인 물음을 솔직하고 생생하게 담아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흥미로운 건 “패배했다”고 고백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출생신고 마지막 날 결국 혼인신고서를 제출한 지민과 철은 패배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졌다고. 사실 두 사람은 많은 시도를 했다. 이성애자 커플의 합법적 결혼만이 정상 가족으로 인정받는 대한민국의 공고한 가부장제와 혼수와 예식, 임신 후 갖가지 검사 등 결혼과 출산의 과정에서 기계적으로 요구되는 ‘평범한 절차’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어떤 시도는 성공했고 어떤 시도는 실패했다. 가장 큰 실패는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의 수술비를 지원받는 과정에서 해당기관에 자신들의 관계를 설명할 명확한 문장을 찾지 못했고, 끝내 합법적 부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둘의 실패가 못나 보이지 않는 건 그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들여다보고 이를 인정하는데 솔직했기 때문이다. 보편과 상식이라는 허울에 갇힌 제도와 살아가는 형태는 점점 다양해지는데 지칭하는 이름표는 여전히 하나라는 현실이 물론 가장 큰 장벽이다. 하지만 정상 혹은 안정적인 가족의 형태를 갖고 싶다는 욕망이 여전히 결혼과 가부장제를 유지하게 하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한다. 지민과 철은 이 점에서 솔직했다.

반이다, 질문과 도약이 계속되는 한 패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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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목에 출입증을 건 멋진 도시 여자가 될 줄 알았지만 현실은 반지하 작업실에 옹기종기 모여 있고, 고졸 사원으로 수년 째 막내 취급을 받으며 “어떻게 일이 즐거울 수 있지?”라고 질문하면서도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큰 힘인지 모르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고, 만화가가 꿈이었지만 지금은 취미로 그림을 그리며 “자아실현은 여가로도 가능해 라고 누가 말해줬으면 좋았을 걸”이라고 웃어넘기는 이들은 솔직했다. 스스로 ‘쩔어’ 있다고 말하는 그들이 초라하지 않았던 건 지금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가진 건강함 때문이었다. 아기가 생기면서 지민과 철의 관계는 붉은 두 줄로 그어지며 부정당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저 선에 걸려 자빠진 것이 아니라 넘어진 자리에서 예전엔 이해할 수 없었던, 그래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하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자신들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알고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무엇을 하고자 하는 욕망과 선택은 쉬이 긍정된다. 반면 결혼을 하지 않을 권리, 부모가 되지 않을 권리, 취직하지 않을 권리같이 무엇을 하지 않고자 하는 욕망은 불온하고 위험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정작 사회와 시스템을 위협하는 건 이것 아니면 저것,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게 강요하고 보편적이지 않은 선택을 한 이들이 실체 없는 패배감을 학습하게 하는데서 비롯된다. 지민과 철의 어떤 시도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그들은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하라고 강요받는 젊은이들이 때로는 하지 못 해서 때로는 하기 싫어서 하지 않는 모습에 카메라를 가져간 반이다는 우리 안에 삐죽 튀어나온 욕망을 있는 그대로 긍정한다. 고르게 깎으려고만 드는 세상에 평균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행복해지면 안 되냐고 묻는다. 이 흥미로운 질문과 선을 넘고자 하는 도약이 계속되는 한, 패배는 없다.

글. 김희주 기자 fifte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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