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기력일지 모른다. 무엇인가 얻지 못해 고통스러운 것은 욕망이 있다는 것이고 그 욕망을 해결해 고통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욕망하는 것이 없다면 그만큼 해결 방법도 찾기 어렵다. 웹툰 ‘지상 최악의 소년’은 이렇게 절대 허무에 빠져버린 한 소년을 그린다. 엄마의 임신 거부증으로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의 존재를 거부당해 감정이입 자체가 되질 않을 정도로 무표정이 되어버린 이현.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을 뽑는 서바이벌에서 “나는 없다”라는 말로 1등을 차지하고 부상으로 소원을 들어주는 신에게 “지구 멸망”을 말한다.

가족의 따뜻함이 절절하게 느껴졌던 전작 ‘패밀리맨’과 달리 ‘지상 최악의 소년’은 “주인공의 가장 큰 적이 엄마”일 정도로 얼핏 차가워 보이는 작품이다. 하지만 허무에 빠져 있는 이현에게 평범한 일상을 선물할 만큼 이야기를 풀어내는 정필원 작가의 시선은 여전히 따뜻하다. ‘불행한 사람들을 주로 주인공으로 만화를 그리는 오덕희’와 귀신과 외계인, 좀비 심지어 식물까지 포함된 12사도가 이현에게 다가가기 위해 펼치는 ‘열혈’, ‘하렘’ 등의 코믹한 작전은 실은 시시각각 이현을 쫓아다니며 관심을 쏟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평범한 일이다. “오덕희나 12사도는 이현에게 대체 가족이기도 해요. 평범한 인간관계의 상징적인 느낌이 있었거든요. 근데 사실 반드시 가족일 필요도 없는 거죠. 누군가를 지켜주는 건 친구가 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사소해 보이지만 일상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소박한 우정과 사랑은 우주 속에서 자신을 지워버린 소년에게는 자신과 마주할 힘이 됐다.

반복되는 일상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것. 피식거리며 ‘지상 최악의 소년’을 읽다가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은 이러한 메시지가 이현뿐만 아니라 행복을 갈구하는 우리에게도 유효하기 때문일 거다.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행복해지려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까지는 같을 거 같아요. 좀 더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긍정할 수 있는 게 행복을 위한 시작이 아닐까요. 결국,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하는 거죠.” 다음은 거창한 행복의 비법보다 이렇듯 은근한 위로를 주는 정필원 작가가 추천한 ‘겨울에 들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음악들’이다.




1. Norah Jones의 < Come Away With Me >
“노라 존스 1집에 있는 노래에요. 개인적으로 1집은 버릴 노래가 없는 앨범이라 생각해요.” 정필원의 말처럼, 노라 존스는 이 앨범으로 2003년 그래미 어워즈의 본상 4개를 석권했다. 편안한 멜로디 속 쓸쓸한 가을을 연상시키는 노라 존스 특유의 목소리는 그녀를 대체 불가능한 여성 솔로 싱어로 만들었다. ‘One flight down’은 이런 노라 존스의 목소리와 ‘One flight down, There`s a song on low and your mind just picked up on the sound’ 등의 가사가 사이좋게 섞인 곡이다. “제가 눅눅한 느낌의 노래를 좋아하는데요. 이런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습기 가득한 목욕탕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노래에요”라는 정필원의 말처럼 나른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곡이다.



2. Foo Fighters의 < Skin And Bones >
“지금은 끝났지만, KBS 쿨FM <유희열의 라디오천국>을 좋아했어요. 그렇게 좋아한 아티스트가 아니었는데 라디오 마지막 방송 가까워져 올 때쯤 많이 나와서 알게 됐어요. 듣기 좋더라고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UFO를 칭하던 이름인 푸 파이터스는 너바나의 드러머 데이브 그롤이 1995년에 만든 록밴드다. 그만큼 ‘The Pretender’와 같은 하드 록을 주로 부르지만 노라 존스가 피처링한 ‘Virginia Moon’처럼 부드러운 곡도 소화한다. ‘Walking after You’는 푸 파이터스의 어쿠스틱 라이브 앨범 < SKIN AND BONES >에 수록된 곡으로 ‘Tonight I`m tangled in my blanket of clouds’, ‘I cannot be without you, matter of fact’처럼 감미로운 가사가 인상적이다. 강한 남자의 툴툴거리는 고백처럼 로맨틱한 것도 없는 법이다.



3. Quruli의 <기적 OST (奇跡)>
정필원이 세 번째로 고른 곡은 쿠루리의 ‘奇跡’이다. “최근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OST에 수록된 곡이에요. 쿠루리는 원래 좋아하는 뮤지션이기도 하죠. 영화감독인 고레에다 히로카즈도 좋아하는데 마감하느라 아직 영화를 못 봤거든요. 아쉬운 마음에 음악만 듣고 있어요.” 1996년 결정된 쿠루리는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OST를 통해서 반듯하면서도 따뜻한 자신들의 음악을 그대로 드러내며 국내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소소하면서도 희로애락을 담은 듯한 쿠루리의 선율과 목소리는 조용한 일본의 시골 골목을 떠오르게 한다. ‘奇跡’ 또한 쿠루리의 색깔이 고스란히 녹아든 곡으로 반복되는 일상을 견디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따뜻함이 배어 있다.



4. 노리플라이의 < Dream >
“‘지상 최악의 소년’ 시나리오 구상할 때 듣고 참고했던 음악 중 하나에요. 가사가 우리를 위로해주는 것 같아요.” 정필원이 고른 네 번째 노리플라이의 ‘주변인’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어색함을 느낀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만한 외로움을 담고 있다.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 참가를 통해 팀을 결성한 권순관과 정욱재는 ‘고백하는 날’, ‘강아지의 꿈’ 등으로 소소한 하루를 담은 일기 같은 음악을 들려줬다. ‘지쳐 있었어. 어느 계절의 끝에. 빛이 바랜 오래된 셔츠를 입고’ 등 ‘주변인’의 가사는 홀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지상 최악의 소년’ 이현을 떠오르게 한다. 한없이 쓸쓸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내 마음 어딘가 열리지 않았나 봐. 기억하고 있다면 조금은 나아질까’처럼 자그마한 희망을 건드리는 가사가 인상적인 곡이다.



5. Pat Metheny Group의 < Still Life (Talking) >
정필원이 마지막으로 떠올린 곡은 Pat Metheny Group의 ‘Last Train Home’이다. ‘칙칙폭폭’ 출발하는 기차의 설렘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이 음악은 가사 없이도 듣는 사람의 마음을 진하게 울린다. “예전 MBC 에서 많이 듣던 음악이에요. 기차가 어디론가 떠나는 느낌이 잘 표현된 거 같아요. 겨울에 들으면 딱 어울릴 거 같아요.” 미국의 대표적인 재즈 기타리스트인 팻 메시니가 리더로 있는 Pat Metheny Group의 이 곡은 떠나온 곳을 향한 그리움과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두근거림을 동시에 느끼는 여행자에게 제격인 음악. 물론 일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의 여행자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웹툰 안에서 스스로 작품을 ‘찌질하게 눈물 빼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정필원 작가는 “유부남이 TV에서 결혼한 거 후회한다고 하는 거랑 똑같은 거”라고 말한다. “물론 불편한 게 있지만 정말 싫어서 그런 얘기를 하는 건 아닐 거예요. 저도 자조적으로 자신을 희화화하면서 힘든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거죠”라고 말한다. “회사로 치면 주 7일 근무에 야근까지 하는” 일이지만 좋아서 하는 것이기에 정필원 작가는 매일매일 온 힘을 기울인다. “작가로서 가고 싶은 길이 있어 그곳으로 가는 것보다 길 자체를 찾아가고 있는 거 같아요. 다음 작품을 하면서 지금을 되돌아보면 ‘지상 최악의 소년’을 객관적인 눈으로 볼 수 있잖아요. 그때 알게 된 시행착오를 조합해서 다음 작품으로 만들고 그렇게 ‘아, 나는 이렇게 변해가고 있구나’ 하면서 자연스럽게 깨닫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앞으로의 변화를 부지런하게 고민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다듬어가는 정필원 작가. ‘지상 최악의 소년’ 연재가 끝나가는 요즘이 아쉬우면서도 그의 다음이 기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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