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은 김수현의 드라마다. 그는 이름 자체가 완성도를 담보하는 대가이자 대사의 토씨 하나도 자신의 입말로 채우는 고집스러운 현역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여자와 그녀를 지켜주는 남자의 사랑도 김수현을 거친다면 단순한 순애보로만 포장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상답게 그는 이 멜로드라마에 여러 얼굴을 심어 놓았다. 얼지 않은 냉동고 속 마늘이나 “정말 맛있는 된장찌개”와 어울리지 않는 시판용 된장 같은 사소한 실수조차 크게 지적될 만큼 늘 완벽하게 쌓아올렸던 김수현 월드. 윤희성 기자와 김선영 TV평론가가 이 견고한 세계에 비판 혹은 지지의 전언을 보냈다. /편집자주
글. 윤희성 nine@
편집. 이지혜 seven@
SBS 의 서연(수애)은 가여운 여자다. 급작스럽게 맞닥뜨린 질병 앞에서 황망해 하는 그녀의 모습은 카프카의 속 주인공과 다르지 않다. 예고 없이 발현하는 불가항의 변화는 그녀를 침식하고, 원인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불행을 예감한다. 그녀의 질병이 ‘벌레’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단지 죽음이라는 시한부를 통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츠하이머는 결국 통제 불가능의 상태를 유발하는 병이다. 결국 서연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될 것이다. 그녀의 육신은 계속해서 서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겠지만, 그것은 더 이상 “깔끔하고 침착”한 서연의 특질을 보여주지 못하는 변질된 서연일 뿐이다. 그리고 세상이 본래의 그녀를 잊어가는 것보다 빨리, 서연은 자신의 실제를 망각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소멸되지 못함으로써, 그녀의 질병은 슬픔 이상의 비참함을 담보한다.
, 선의 위에 쌓아올린 욕망의 무덤 vs <천일의 약속>│드라마로 삶을 돌아보다" />왜곡된 모습에 영혼이 갇히는 것이 서연의 운명이라면, 지형(김래원)은 그 반대의 양상을 보이는 인물이다. 향기(정유미)와의 약혼을 파기하는 순간, 사람들은 지형의 영혼을 의심한다. 평소와 다름없는 그의 육체는 사람들로 하여금 태도의 지속에 대한 요구를 불러일으키지만, 지형은 더 이상 기대에 부응 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신체를 강탈해 간 불순한 영혼의 배후를 추궁하고, 그 끝에는 서연이 있다. 눈앞에 보이는 지형의 육체에 대한 믿음이 강할수록, 서연을 향한 원망도 커진다. 가여움의 운명을 부여받은 서연이 가해자로 해석되는 순간, 이야기가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에 모순이 발생한다. 서연의 옷차림과 명품 가방이 드라마 밖에서 불편함을 야기하는 것은 사실 서연의 씀씀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전제와 달리 서연에게 부여된 위협감의 징후에 대한 이유를 찾기 위한 의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은 끊임없이 서연의 불행을 상기시킨다. 비극은 물샐 틈 없이 그녀를 포위하고, 지형은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항목이 된다. 그런데 이 결합은 서연이 아닌 지형을 구원한다. 자신을 나무라는 수정(김해숙)에게 지형은 “죄책감 끌어안고 미치게 후회하면서 그리워하면서 살기를 바라”냐고 물었다. 그는 서연을 욕망이 아닌 선의로 선택했으며, 그 순간 서연은 여자가 아닌 환자, 실존이 아닌 운명으로 강제 환원된다. 자신을 구하러 와 준 지형에게 서연이 청혼을 승낙하는 순간에 드러나는 것은 서연의 공포와 무력감이며, 이것은 결국 지형의 선의를 수락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지형이 서연의 킬 힐을 거부했듯 드라마는 그녀의 욕망을 은폐하고 외면한다. 남는 것은 보호자로서 지형의 당위뿐이다.
모두에게 동일하게 강요되는 삶의 방식
욕망이 거세된 사랑은 인류애 이상의 구체화가 불가능한 성질의 것이다. 그래서 향기가 서연을 질투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럽다. “내가 오빠를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아. 오빠랑 나는 닮은꼴일 수도 있겠다”는 향기의 말은 액면 그대로 선의와 예의에 충실한 종족들 간의 교감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형을 이해함으로써 향기는 약자인 서연을 향한 선의를 간접적으로 실천하기에 이른다. 사랑을 선택한 지형이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설명 된다. 지형이 여전히 직장에서 온전한 지위를 보장 받을 뿐 아니라 수정으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욕망이 아닌 도리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지형의 사랑을 응원할 뿐 아니라 이를 방해하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창주(임채무)와 현아(이미숙)의 입장은 선택의 문제로 해명되지 않고 시비의 영역에서 비판당하며, 이것은 결국 지형의 사랑에서 개인적인 특수성을 지워내 버린다. “우리도 겪게 될 수 있어”라는 수정의 말은 사랑의 열병이 아니라 선의를 필요로 하는 약자의 처지에 관한 것이며, 이를 통해 서연은 또다시 일반화 된다. ‘불쌍한 사람’이라는 명명은 ‘치매 환자’라는 분류와 다를 바 없는 폭력성을 띄지만, 지형 모자는 자신들의 선의에 도취되어 이것의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들은 결혼이라는 맹세를 통해 자신들의 선의를 증명 했으며, 이것으로 도덕적 우위를 점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답답증을 유발하는 것은 말투가 아닌 완고함 때문이다. 드라마에는 다양한 군상이 등장하지만 다양한 입장이 존중받지는 못하며, 모두에게 동일한 상식이 강요된다. 그리고 그 이해의 동맹은 가족이라는 집단의 존속을 위해 작동된다. 그래서 ‘사랑’이 아닌 ‘약속’을 말하는 이 드라마가 결국 멜로가 아닌 홈드라마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홈’의 실체가 개인의 욕망을 발견할 의지조차 없는 곳이라면 이것이 반드시 너그럽고 자상한 장소인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서연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생존이 아니라 존재의 확인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카프카의 벌레는 결국 방구석에서 쓸쓸하게 죽어갔다. 서연의 주체로서의 기억은 결국 이처럼 유폐되지 않고 비극에 맞설 수 있을까. 그 해답이 아이에게 이어진 유전자로 또다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글 윤희성
자서전은 자신의 삶을 하나의 통일된 성장 서사로 완성하려는 글쓰기다. 그리고 은 한 여성의 자서전에 대한 욕망과 좌절의 서사다. 서연(수애)은 “자기 글”에 대한 자존감과 “삯글이나 쓰는” 가난한 글쟁이라는 “자멸감”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아이며, 그것은 신춘문예에 두 번이나 당선된 ‘작가’인 동시에 타인의 자서전을 대필하는 ‘유령 작가’이기도 한 분열적 정체성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서연을 갑작스레 찾아온 알츠하이머는 존재를 퇴행시키는 불치병이다. 서연은 성장 서사는커녕 그녀를 무로 소멸시키려는 존재론적 위기와 마주친다. 정말이지 지독한 비극이다.글. 김선영(TV평론가)
이서연, 그 여자의 자서전 vs <천일의 약속>│드라마로 삶을 돌아보다" />서연의 비극은 고아라는 태생적 상실감에서부터 출발한다.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엄마에게 버림받은 “인생 자체가 신파”인 서연의 운명은 그녀를 “일찍 애늙은이”로 자라게 했다. 하지만 그녀의 진짜 비극은, “근본 없는 계집애”라고 흠 잡히지 않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진 자기보호색”이, 서연이 그것 빼면 아무 것도 아니라 말하는 자존감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의 자존감은 자기방어와 결핍의 소산이며, 이는 우아하고 품위 있는 겉모습과 “피투성이 알몸뚱이 짐승”같은 독한 내면이라는 분리된 자아를 만들어냈다. 지형(김래원)과의 연애에서 군림하는 여왕의 모습과 버림받은 ‘나비부인’과의 동일시를 함께 보여주는 것처럼.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는 내면 독백신은 그러한 분열적 자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리하여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분열된 삶을 통일하고 “자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서연의 자서전적 욕망이다. 알츠하이머는 그 욕망을 좌절시키는 시련인 동시에 강화하는 계기가 된다. 알츠하이머와 투병 과정이 존재와 글쓰기의 고통에 대한 상징처럼 묘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예컨대 서연이 치매 판정을 받은 뒤, “모든 기억이 사라져가면서 나도 함께 사라져간다는 거죠. 그럼 나는 뭐가 되는 건가요. 나는 어디로 가나요. 어디서 찾을 수 있나요”라고 토로한 대사는 그 자체로 실존에 대한 질문처럼 들린다. 또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고통은 적절한 문장을 찾기 위한 글쓰기의 고뇌와 유사하며, 시를 외우고 끊임없이 책을 읽는 투병의 모습은 언어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한 작가들의 모습과도 같다. 이는 알츠하이머 증세가 칠판이나 도화지처럼 글쓰기적 도구로 비유되는 데서도 나타난다. 서연은 자신을 백지로 지워가는 병에 맞서 파편적인 메모와 일기를 거쳐 자기 글을 쓰려 노력한다.
유한한 존재성을 성찰하게 하는 드라마
분열된 자아를 극복하려는 서연의 변화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그동안 서연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자기보호색”은 잔인한 현실 때문에 종종 과잉보호의 성격을 띠었다. 이는 타인에게 “신비주의”로 보일 정도로 닫힌 내면과 슬픔 앞에서도 담담한 척 하는 연기로 나타났다. 그런 그녀가 일생일대의 시련을 만나 점차 솔직한 얼굴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지형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외면하던 향기(정유미)의 심정을 궁금해 하며, 투병 사실을 밝힌다. 결정적 변화는 뱃속 아기에 대한 태도다. 낙태를 생각했던 서연은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듣고 난 뒤 출산을 결심한다. 아이에게서 들린 ‘나를 외면하지 말라’는 외침은 결국 그녀를 버렸던 친모와의 화해의 가능성을 남겨두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곧 치유를 말하진 않는다. 오히려 극은 결말을 향해 갈수록 더 소리치고 무너져가는 서연의 모습을 담는다. 직장까지 그만둔 그녀의 존재는 계속 소멸을 향해가고, 자서전을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한 꿈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녀의 자서전은 죽음을 앞둔 자의 낭만적 버킷리스트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녀는 생과 사 앞에서 초월적 태도를 보이는 대신, 매순간 절망과 “나는 아직 이서연”이라는 자기의지의 복합적 갈등으로 사투를 벌인다. 그 치열하고 ‘질긴’ 삶은 그 자체로 그녀의 자서전이 된다. 그리하여 은 시한부생을 낭만적으로 포장하지도, 덤덤한 척 애써 절제하지도 않고, 삶의 여러 얼굴을 정면에서 그려내어 우리의 유한한 존재성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만든다.
글 김선영
글. 윤희성 nine@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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