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은 대한민국의 욕망이 집결하는 각축장이다. 이 땅의 진입장벽은 강남 공화국이라 불릴 만큼 높고 굳건하지만, 누구도 강남 입성에 대한 욕망을 꺾지 못한다. 오히려 강남의 높은 집값은 강남의 위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곳의 프리미엄이다. 내 자식을 서울대에 보내기 위해, 더 좋은 아파트에서 살기 위해, 이 사회의 상위 몇 %가 되기 위해 강남으로 향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 강남의 기원에서 시작하는 SBS 는 권력과 자본의 연대, 그리고 거기서 소외당한 사람들이 한데 뒤엉킨 ‘강남 현대사’다. 위근우 기자와 조지영 TV평론가가 강남 공화국의 기원을 다룬 임상 보고서에서 서로 다른 지점을 읽어냈다. /편집자주
글. 조지영(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
SBS 는 제목 그대로 거인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역사라고 해도 좋다. 강남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세계에서 유래 없는 개발”에 대한 서사를 이끄는 건 조필연(정보석)을 비롯한 국가 권력의 중추들과 황태섭(이덕화), 홍기표(손병호)로 대표되는 건설 자본이다. 첫 회에서 조필연과 이강모(이범수)가 나눈 대화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현재 최고의 기업인으로 명성을 얻은 이강모 조차 “강남을 저렇게 발전시킨 건 나”라는 조필연의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 “당신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좀 더 사람 살만한 곳이 되었을 것”이라 말할 뿐이다. 말하자면 그 개발의 양상이 인간적이었건 비인간적이었건, 그 주체는 어느 특정한 인물이다. 이 거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부 청사의 위치와 지하철 노선 같은 국가 대계의 방향은 수정되고, 그 때마다 압구정동 방 세 칸짜리 집에 대한 소망을 가진 수천, 수만의 보통 사람들은 울고 웃을 수밖에 없다. 무력하게. 이것은 실제 한국 현대사를 지배했던 개발독재의 실상을 고발하는 이 드라마의 정치적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다.
거인들에 의한, 거인들의 각축전 vs <자이언트>│이것은 드라마인가 오늘 본 뉴스인가" />서사의 초점을 건설회사 사장인 황태섭에게 맞춘다면 는 이명박 대통령의 건설회사 사장 시절을 모티브로 한 KBS 의 교묘한 패러디에 가깝다. 툭하면 돈줄이 마르고 기후마저 도와주지 않아 노숙자 신세가 되지만 연탄재로 매립지를 메우는 아이디어로 재기하는 그의 입지전은 속 박형섭(유인촌)을 연상케 한다. 즉 는 그러한 영웅 서사의 플롯을 거의 그대로 따라가는 동시에, 그 성공 신화가 황태섭의 친구 이대수(정규수) 같은 보통 사람들의 억울한 희생 위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밝히는 전략으로 아직까지 현대사를 지배하는 영웅 혹은 거인에 대한 향수를 전복시킨다. 또 다른 입지전의 주인공이자 군부 출신인 조필연의 말투가 MBC 의 박정희와 흡사하다는 우연은 그래서 더 흥미롭다. 많은 보수 세력이 그래도 이만큼의 발전을 이룬 건 그들 덕이라 찬양하던 그 거인들이 한 짓은 결국 자신들의 사욕을 채운 것에 불과하다. 정권을 국가라는 이름으로, 정권 유지를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며.
하지만 이렇게 영웅 서사가 붕괴된 지점에서, 이들 거인을 모든 악의 원흉으로 지목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여전히 는 거인을 위한, 거인에 의한 이야기로 남는다. 아마도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이대수 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법 선량한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몇 몇의 거인들이 요정과 중앙정보부에서 담합하고 모략을 짜는 동안 결국 보통 사람들이 드라마 속에서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무지에 의한 침묵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발전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중학생이던 이강모(아역 여진구)가 반의 실질적 권력자인 조민우(아역 노영학)에게 맞서 다수결의 원칙을 관철시키기까지는 조민우와 동시에 전교 1등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이 한 시대의 부당한 룰을 고치기 위해서는 스스로 거인이 되거나 자신들을 대표할 거인의 출현을 기다려야만 하는가.
보통 사람들에 의한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전반부엔 황태섭과 조필연의 입지전으로 점철됐던 드라마가 이제 어른이 되어 “억울한 게 싫으면 성공하면 돼”라고 외치는 이강모와 “힘 없어 버림받기 싫어” 회사를 갖겠다는 황정연(박진희) 같은 다음 세대의 입지전으로 이어지는 건 필연적이다. 적어도 여태까지 의 세계에서 악하고 병든 거인들을 대체할 수 있는 건 건강한 마음의 새로운 거인이다. 세계적인 기업인이 되고서 “튼튼하고 좋은 건물을 지으려고 노력했을 뿐”이라 말하는 먼 훗날의 이강모처럼.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영웅 서사로의 퇴행인가, 아니면 “세상은 원래 지저분한 것”(황태섭)이기에 그나마 우리에게 가능한 최선의 경우인가. 이것은 거인 없이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역사를 올바로 이끌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과연 이 질문에 대해 는 앞으로 어떤 대답을 들려줄 수 있을까.
글 위근우
SBS 는 온갖 욕망으로 끓어오른다. 인물들은 스스로의 욕망을 분명히 알고 있고, 자나 깨나 그 욕망을 실현시킬 생각에 가득 차 있다.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이런 구도는 똑같다. 입찰권을 따내기 위해, 정계에 진출하기 위해, 회사를 물려받기 위해, 오빠들을 찾기 위해,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모두들 분주하다. 욕망은 더 큰 욕망을 부르고, 어떤 욕망은 종종 타인의 욕망을, 삶의 터전을, 목숨을 빼앗아가며 세력을 확장해간다. 그 욕망의 집대성이 바로 오늘날 대한민국 서울의 ‘강남’ 이고, 강남의 중심에 자리 잡은 ‘악’의 축이 조필연(정보석)이다. 그는 ‘더 많은 돈, 더 강력한 권력’을 꿈꾸며 군인이 되었다가, 중앙정보부 요인이 되었다가, 곧 정계 진출을 앞두고 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민간인을 사살하고, 억울하게 희생된 군의관 앞에서도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지” 라며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악의 화신이다.글. 위근우 eight@
낯설지 않은 자본과 권력의 연대 vs <자이언트>│이것은 드라마인가 오늘 본 뉴스인가" />하지만 진정 무서운 것은 그의 세력 확장 방식이다. 조필연은 악인이지만 그의 손을 잡는 인물은 황태섭(이덕화)이다. 황태섭은 결점이 많은 인간이지만 악인은 아니다. 그는 출세를 위해 조필연이 쓰는 방식이 ‘이게 아니다’ 싶지만 다들 그렇게 하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찰비리를 주도하고, 조필연과 연대한다. 자본과 권력이 만나니 무소불위의 신화가 된다. 황태섭은 회사를 급성장시키고, 조필연은 권력의 기반을 다진다. 이들은 혼사를 통해 이 연대를 더욱 공고히 다지고 싶어 한다. 우리 현대사에 많은 ‘있는’ 집안들이 그래왔듯이
철옹성 같은 이 연대는 내부에서 무너질 것이다. 조필연과 황태섭이 가장 믿었던 오른팔들인 이성모(박상민)와 이강모(이범수)는 부모의 원수이기도 한 그들을 운명적으로 압박할 것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형제들이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체득한 방법들이다. 형제는 매번 목숨을 거는 방식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십대시절 형은 한국과 미국 군대 사이에서 이중스파이 노릇을 했고, 동생도 길에서 구두닦이 한번 하는데 죽도록 얻어맞아야 했다. 뒤로 도망갈 길 없이 앞으로 나가기 위해 목숨을 던져야만 했던 그들의 행보는 조필연과 황태섭의 젊은 시절과도 닮아있다. 물론 두 형제는 영특하게 태어났고, 순발력, 맷집, 근성 어느 하나 빠지는 법이 없다. 형은 복수심으로 움직이고, 동생은 성공하고 싶다는 욕심으로 움직인다.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한시적인 적대의 시간이 지나면, 두 사람은 아마도 감격적으로 해후하고, 둘의 물질적 성공은 부모의 복수로 가는 첩경이 될 것이다.
그들은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어갈까
성모와 강모는 그들이 배운 방식 그대로, 조필연과 황태섭이라는 자본과 권력의 연대를 붕괴시킬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를 관통하는 딜레마다. 성모가 배운 방식은 늘, 편법이었고, 뒤통수를 치며 배신하는 방식이다. 강모가 배운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상대편보다 한 타임 빠르게 때로는 각목을 들고, 뒷조사를 하고, 협박을 하는 것이다. 억울하게 죽은 부모의 복수라는 ‘거절 못할 목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성모와 강모의 방식은 옳은 것인가? 후일, 강모가 만들게 되는 아파트는 어떻게 다를까? 강모가 야합하지 않고, 정보부의 도움 없이 입찰권을 따낼 수 있을까? 는 그래서, 괴물과 싸우다가 괴물이 되어간다는 우화의 한 중간에 있다. 는 역동적인 큰 그림 안에, 꽤나 정밀한 세필화로 인물을 그려 넣으며 이전 세대를 부정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그 다음 세대의 딜레마를 배치한다. 회사를 물려달라는 황태섭의 딸이 굳이 ‘운동권 코스프레’를 하는 등 남성 중심 시대극의 클리셰들이 보이긴 하지만, 는 전체 조화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며 욕망을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된 우리의 역사를 되짚는다. 만약 드라마가 비추는 3-40년 전 서울의 모습이 자꾸 지금, 여기를 비추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이따금 불편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욕망을 달성하는 방법이 여전히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땅을 파대는 장면들이 그렇다. 저건 드라마인가 오늘 본 뉴스인가.
글 조지영
글. 조지영(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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