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애정 식은 연인을 보는 것 같다고 할까.” 작품의 막바지가 되면 캐릭터로부터 한 발 빠져나올 준비를 한다고 설명하며 김영애가 든 비유는 정확하면서도 로맨틱했다. 명료하게 똑 떨어지는 발음과 애교 섞인 말투의 언밸런스함은 연기 경력만 40년인 이 배우의 여전히 소녀 같은 인상을 더욱 독특하게 만든다. 1971년, 얼결에 MBC 공채 탤런트 시험에 합격해 버린 스무 살 부산 처녀는 청춘스타의 자리를, 결코 쉽지 않았던 삶을, 무수한 ‘엄마의 바다’를 넘어 어느새 60대 배우가 되었다. 하지만 여자이자 스승, 그리고 예인이었던 KBS 의 백무,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엄마를 보여준 영화 , 재벌가의 수장이자 ‘철의 여인’ 공순호 회장을 연기한 MBC 에 이르기까지 나이 들수록 더 지독할 만큼 새로움과 완벽함을 추구하는 이 여배우는 우리에게 여전히 다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태생부터 로열 패밀리였던 공순호보다 아무런 배경 없이, 오직 예술을 한다는 자존심으로, 자기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로 춤판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백무가 훨씬 더 강한 사람”이라는 그의 말이 유독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마도 김영애라는 배우의 연기 인생 자체가 백무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이후 드라마 주연을 맡은 건 5년만이다. 특별히 라는 작품에 욕심을 냈던 건 어떤 요소 때문인가.
김영애 : 내 나이 또래의 연기자들은 거의 ‘누구의 엄마’로 극 중에서 장식이나 지나가는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의 시놉시스에 나온 공순호는 극을 이끌어가는 데 굉장히 필요하고 중요한 인물이라 한 번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영일 수도 있지만 아직은, 있어도 없어도 되는 역은 하고 싶지 않다.
“공순호라는 인물에 대해 100% 공감한다” 하지만 ‘있어도 없어도 되는 역’을 피하고 나면 선택의 폭이 상당히 좁아지지 않나.
김영애 : 그래서 많이 못했다. 같이 살던 아들 부부가 작년에 미국으로 공부하러 간 뒤 정말 많이 외롭고 힘들었다. 그 때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할 만한 작품이 없었다. 그런데 를 하면서 석 달 동안 정말 정신없이 지냈고 너무나 많은 관심과 칭찬을 받았다. 나는 그냥 내가 연기하는 순간이 좋아서 했지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처럼 기뻤다.
매번 ‘연기 잘 하는 배우’로 인정받는 입장에서 칭찬이 새삼스럽지는 않을 텐데. (웃음)
김영애 : 아니다. 늘 할 때마다 새롭다. 항상 고민하고 끙끙거리고 못마땅하고 ‘왜 이것밖에 안 되나’ 고민한다. 예전에 SBS 을 할 때 남성훈 씨가 몸이 안 좋아서 갑자기 안기부 부장인가 하는 역으로 들어간 적이 있는데 연기 하고 와서 차 안에 앉아 한 시간 넘게 대성통곡을 했다. 연기가 너무 안 돼서 너무 창피하고 속상한 거다. 야, 어떻게 이 따위로밖에 못 하나 싶었다. 심지어 SBS 할 때는 1주일 동안 잠 못 자고 긴장해서 첫 촬영분을 나중에 재촬영했을 정도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긴장하는 걸 아무도 모른다. 오래 하면 저절로 잘 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나에게 바라는 기대치가 있다. 100점까지는 안 되더라도 8, 90점까지는 가야 하고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
연륜이 많이 쌓인 선배인 만큼 그렇게 긴장하는 모습을 후배나 스태프들 앞에선 좀 감추기도 하나.
김영애 : 못 감춘다. 있는 대로 드러낸다. 현장에선 그때 그때 기분에 따라 감정을 표현해야 하고 내가 너무 급하니까 체면 때문에 그런 걸 감출 만큼의 여유도 없다.
공순호는 등을 꼿꼿이 편 자세, 절도 있는 걸음걸이, 날카로운 시선 등 외적인 느낌 자체가 굉장히 남다른 인물인데 그 부분을 어떻게 표현했나.
김영애 : 슛 들어갈 때 눈빛, 목소리 톤, 자세, 딱 세 가지가 달라졌다. 나는 원래 연기를 할 때 상대 배우의 얼굴이나 눈을 보면서 이야기하는데 공순호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상대를 보지 않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어딘가를 보면서 말할 때가 많으니까 상대는 조금 불편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성격상 상대를 보며 의논을 하는 게 아니라 항상 지시를 하는 거고, 대사를 할 때도 누군가의 말을 받아 꼬리를 무는 게 아니라 먼저 던지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항상 완벽히 외워둬야 했다.
“저거 치워”라는 대사가 트레이드 마크가 됐는데 스스로 기억에 남는 대사나 장면이 있다면?
김영애 : “저거 치워”가 상황이나 연출에 의해 인상적으로 만들어진 거라면 나에게는 “내가 법이야. 정가원에서는. 이 공순호가 법이야. 나를 어기는 게 불법이야!”가 최고였다. 어떻게 이런 대사를 쓸 수 있나 싶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신감, 당당함이 매력적이었다.
공순호는 그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지만 정작 정가원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김영애 : 여자로서의 인생을 다 포기하고 산 사람이지 않나. 사람마다 인생의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일을 통한 성취감을 얻기도 했겠지만 이 여자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상황, 여자로서 아내로서 사랑받지 못한 것들이 더 사업에 집착하게 된 계기였던 것 같다. 일종의 콤플렉스로, 나는 아내로서 사랑받지는 못했지만 내가 최고라는 걸 보여주겠다는 식인 거다. 그래서 나는 공순호라는 인물에 대해 100% 공감한다. 마지막에 K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것만 빼고. (웃음)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더라도 실행하는 건 쉽지 않으니까.
공순호는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인데 자신의 성격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나.
김영애 : 일에 있어서는 그런 편이다. 내 자신과 남편, 자식에게는 굉장히 완벽한 걸 요구했던 것 같다. 의 백무 연기를 하면서 그 완벽주의에 질려 “어우, 나 이 여자 너무 싫어!”라고 했더니 아들이 “엄마하고 제일 많이 닮은 거 모르세요? 엄마가 사람 얼마나 피곤하게 하는지 모르세요?”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생각해 보니 아이가 클 때는 늘 일하느라 옆에 있어주지 못했고, 한창 사춘기일 때도 많이 힘들게 했던 것 같다. 잘 한 건 칭찬 안 하고 못한 것만 꾸지람하고, 지금 좋은 아내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게 대견하고 고맙다.
“연기는 숨구멍이자 내가 사는 이유”
공순호를 연기하며 대본에 드러나 있지 않은 디테일을 작가들도 놀랄 만큼 표현했고, 또렷하고 강단 있는 특유의 말투를 만들어냈는데 어떻게 그 톤을 잡아나갔나.
김영애 : 사실은 어떻게 준비한다기보단 대부분 그때 그때 하고 싶은 대로, 느낌대로 한다. 대사만 외워서 7,80%를 만들어 놓은 뒤 나머지는 현장에 가서 표현한다. 대본 봤을 때, 리허설 할 때, 슛 들어갔을 때 느낌이 다 다르고 감독님의 생각과도 맞출 여지를 남겨 놓아야 하니까.
그러려면 캐릭터에 대한 이해 자체가 가장 중요할 것 같다.
김영애 : 나는 좋은 엄마도 아니고 좋은 살림꾼도 아니지만 대본을 보면 뭔가 딱 눈에 들어오는 게 있다. 그게 내가 가진 능력 중 제일 나은 것 같다. 어려서 글씨를 배우면서부터 동화책을 많이 읽었고, 고등학교 때도 소설을 좋아해서 앙드레 지드 책 같은 걸 다 외우고 다녔으니까 내가 배우가 된 건 순전히 그 힘인 것 같다. 배우가 될 거라고 상상도 안 하고 살았지만 대본이 나오면 그걸 이해하는 건 좀 빠른 편이다.
그럼 배우가 되기 전까지는 어떻게 자랐나.
김영애 : 공부를 굉장히 하기 싫어했다. (웃음) 아버지는 내 머리가 나쁘지 않으니까 사범학교 가서 선생님이 되길 바라셨는데 나는 공부가 싫다고 상업학교에 갔다가 쫓겨날 뻔 했다. 성격이 차분하지 못하고 선머슴 같은데 빨리 아버지한테서 벗어나고 싶으니까 장래 희망 물어보면 ‘현모양처’라고 했다. 배우가 된 것도 서울에 잠깐 다니러 왔다가 사촌 언니가 방송국 탤런트 시험 원서를 사와서 그냥 시험을 본 건데 덜컥 붙어 버렸다. “카메라 페이스가 신선해서 붙였다”고 하던데, 그 땐 사투리도 엄청나게 썼고 그냥 월급 주는 줄 알고 방송국에 들어갔다. 이렇게 얘기하려니 창피하다. (웃음)
그렇게 ‘덜컥’ 연기를 시작하게 됐을 때는 어땠나. 처음부터 적성에 맞던가.
김영애 : 좋고 싫고가 없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집이 많이 어려워져서 내가 돈을 벌어야 했다. 그런데 배우가 뭔지는 잘 모르지만 일단 한다고 올라왔는데 그냥 내려가면 남부끄러우니까 어떻게든 버텨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연기가 뭔지도 잘 몰랐지만, 내가 잡초같이 끈질긴 데가 있다. 뭔가를 원하면 반드시, 아주 나쁜 방법만 아니면 어떻게든 그걸 얻으려고 하는 기질이 있다. 그래서 선배들 연기하는 걸 보고 흉내내면서 시작했다. 모니터를 굉장히 많이 했다.
젊은 시절에도 미모로 유명한 청춘스타였으니까 인기는 자연히 따라왔겠지만 연기를 잘 하고자 하는 건 남이 기대하지 않아도 스스로 강한 의지와 노력을 가져야 하는 지점인데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했던 것 같나.
김영애 : 연기가 나를 지켜주는 거였다. 내가 사는 이유기도 했고. 첫 번째 결혼에서 참 많이 힘들었다. 그 때 유일하게 나를 내려놓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연기였다. 그 어려운 시간 동안 연기는 나에게 숨구멍이었다. 내가 사람은 많이 불편해 하는 성격이지만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면 무서운 게 없다. 항상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현장에서 육체적으로 힘든 걸 극복할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한 분야에서 40년 동안 일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지만 데뷔 후 10년 정도가 지나고 나이가 들면 여배우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가 점점 어려워지는데 그 다음 단계에서 어떤 고민들을 했나.
김영애 : 여배우라면 누구나 겪는 갈등일 거다. 30대 후반쯤 되면 어느 날은 계속 거울을 본다. 내가 늙어 보인다는 걸 느끼면서. 그런데 좀 지나니까 그 부분을 포기하게 되고, 결국 연기를 잘 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적으로 전환점이 된 건 SBS 이었던 것 같다. 연기의 폭을 좀 넓히는 데 도움이 됐고 그 다음부터는 김영애, 하면 “아, 진짜 연기 잘 했지”라는 말을 듣는 걸로 만족하게 됐다.
그랬기 때문에 스타였던 신인 시절보다 시간이 흐르면서 배우 김영애에 대한 신뢰가 점점 높아진 것 같다.
김영애 : 사실 신인 때는 별다른 생각을 못했고, 이십대 후반에 MBC 이라는 드라마를 하면서 연기의 맛을 알게 됐다. 그리고 살면서 이런저런 소용돌이를 겪고 연기가 나에게 산소이자 숨구멍이라는 걸 깨달으면서 정말 좋은 연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거다. 사실 나는 늘 가는 길도 잘 모를 만큼 많이 엉성하고 미숙한 사람이다. 하지만 정말 연기 하나만큼은 잘 하고 싶었고, 정말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해 왔다.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다 쏟는다.
“는 한바탕 잘 놀 수 있는 마당” 그만큼 모든 걸 쏟을 수 있는 작품을 만날 때는 굉장히 반갑겠다. 같은 경우 엄마와 딸의 이야기지만 ‘누구의 엄마’로 소비된 작품이 아니었고.
김영애 : 는 시나리오를 한번 읽은 뒤 너무 재미있어서 주저 없이 하기로 결정했다. 늘 그런 작품을 만나는 게 감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공순호도 그렇고, 백무도 그랬다. 사실 백무 역이 들어왔을 땐 나보다 더 젊은 배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망설이기도 했다. 내가 그 때 쉰여섯 살이었는데 조선 시대 기생은 30대면 이미 퇴기였으니까, 적어도 40대 배우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선주 작가님이 “여자와 스승의 느낌을 다 가진 배우가 필요하다”며 나를 고집하셨고, 그래서 ‘김영애의 백무’를 만들려고 했다. 가장 좋은 건 10년 젊은 김영애가 있으면 딱이었겠지만.
하지만 백무는 쉰여섯의 김영애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캐릭터일 수도 있는데 마흔 여섯에 그 역할을 했으면 더 잘 했을까?
김영애 : 깊이는 나이를 먹으면서 더 생긴다고 생각한다. 내가 거꾸로 나이를 먹지 않는 한은,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인생의 경험들이 나를 더 깊게 만들고 폭을 넓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런 연륜이나 깊이는 쉰여섯의 백무가 나았겠지만 정확하게는 마흔 여섯의 백무가 더 잘 어울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칠십이 되어도 나에게 여자 느낌이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게 너무 진해서 주책스럽게 추해 보이지 않을까 걱정한다. 잘 늙어야지. (웃음)
혹시 연기하면서 내가 생각해도 정말 ‘독하다’ 싶었던 적도 있나.
김영애 : SBS 때 암에 걸려서 통증을 느끼는 연기를 하는데 얼굴이 막 진짜로 부풀어 오르는 거다. 들어와서 보니 가슴 위로 모세혈관이 다 터져서 피가 맺혀 있었다. 다들 미련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잘 할 수 있거나 최선을 다해 죽기살기로 할 게 아니면 시작을 안 한다. 일을 하건 연애를 하건, 그게 내 기질인 것 같다.
그런데 연기는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잘 하는 상대와 붙으면 그만한 상승효과를 느끼기도 할 것 같다.
김영애 : 나는 항상 연기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고 얘기한다. 열 명이 있는데 한 명만 혼자 아동극처럼 해 버리면 그 전체가 다 아동극이 되고 거짓말처럼 보인다. 그래서 같이 잘 해야 하는 거고, 좋은 배우를 만나면 상대의 눈빛에 나도 모르게 같이 업된다. 그게 중요하다.
혹시 다시 젊어진다면 로맨스 연기를 해 보고 싶은 상대가 있나.
김영애 : 현빈, 연기 잘 하는 배우를 좋아하는데 현빈이라는 배우가 참 연기를 잘 하더라. (웃음)
40년간 연기를 하다 보면 캐릭터에 대한 이해 이전에 테크닉이 먼저 나올 때도 있나.
김영애 : 가끔 있다. 연기가 잘 안 될 때. 하지만 그거 몇 번만 하다가는 끝장날 거다. 계속 그러면 그만둬야지. 세상살이에 절대 쉬운 일이 없고 거저 되는 게 없다. 사업하는 것보다 연기가 훨씬 나은데, 어차피 힘들 바엔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게 얼마나 선택받은 건가. 그리고 뭐가 감사한지, 어떤 게 좋은지 나쁜지는 알 나이니까, 아무리 내가 지혜로운 사람은 아니라 해도 그 정도를 모르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사업이라는 건 연기와 완전히 다른 능력이 필요한 분야인데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나.
김영애 : 무식이 용감이라고, 모르니까 뛰어든 것 같다. 재무 쪽 말고는 다 참견을 했다. 한 가지 아이템으로 7년을, 일주일에 홈쇼핑 생방송을 두세 번씩 했는데 그러면 정말 피가 마른다. 앞에 1분당 콜 수가 뜨는데 그 목표를 채우기 위해 보는 사람들의 시간을 뺏어내는 것도 내 몫이고, 정말 살 떨리는 경쟁이었다. 늘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이걸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솔깃할 수 있게 구성할까 고민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돈은 버는데 행복하지가 않았다. 하지만 협력업체 빼도 우리 회사 직원만 70명인데 나 먹고 살만 하다고 그만두면 그 사람들 생계는 어쩌나. 영업사원 나 하난데. 그래서 우울증에 걸렸다. 그 때 치료제가 된 게 였다. 덕분에 약도 끊고 웃음도 되찾았다.
하지만 그 경험 덕분에 공순호라는 인물을 연기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 같은데.
김영애 : 그런 시간들이 나를 더 키웠다. 사실 머물지 않고 계속 갈 수밖에 없는 게 기업의 생리다. 제자리에 있는 건 후퇴고, 조금만 후퇴하면 금방 무너진다. 끊임없이 앞으로 가려면 무리하게 확장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넘어가는 회사도 생긴다는 그 과정을 이해하게 됐다. 그래서 힘들었지만 사업을 한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연기만 할 때는 온실 안에만 있다가 사업을 하니까 엄동설한에 한데 나가 비바람 맞으며 세상을 더 많이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전에는 먹고사는 일이 너무 급해서 원하지 않는 작품에 겹치기 출연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사업을 통해 얻은 경제적 여유로 작품을 신중하게 고를 수 있다는 게 고맙다. 를 하면서 “만약 사업을 망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김영애라는 배우를 다시 못 볼 뻔 했다”는 식의 기사가 났던데, 비유가 좀 묘하긴 해도 최고의 칭찬이라고 생각했다. (웃음) 가 치료제였다면 는 한바탕 잘 놀 수 있는 마당이었다.
결국 연기에 모든 것을 던졌을 때는 남들의 평가보다도 자신의 만족감이 가장 중요할 텐데, 어떤 순간이 가장 행복한가?
김영애 : 가끔 신들린 것처럼 황홀한 순간이 있다. 아무 것도 모르고 내가 뭘 했는지도 모르고 해 냈을 때, 예를 들어 에서 황진이에게 “그 문턱을 넘으면 네가 원하는 길이 열릴 거다”라며 걔를 끌어당겼을 때, 그렇게 나도 모르는 내가 갑자기 나타나면 나도 놀란다. 늘 그런 걸 기대하고 하는 거다. 사실 나는 스스로 불완전한 인격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배우라는 건 사랑도 인기도 다 거품이다. 지나가면 그뿐이고, 그거에 둥둥 떠서 발이 땅에 안 닿을 나이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일 많이 겪고 깨지고 넘어지고 했음에도 약아지지 않고 이렇게 살아온, 그래서 연기할 때 그 인물에 온전히 순수하게 다가갈 수 있는 내가 좋다. 이런 내가 좋다.
인터뷰,글. 최지은 five@
인터뷰. 위근우 기자 eight@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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