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욱 감독│추억으로 기억되는 영화들
김병욱 감독│추억으로 기억되는 영화들
“마지막 회 대본이 그렇게 안 써지는 경우가 없었어요.” 지난 3월 19일 금요일, 누군가에게는 충격적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슬프기 그지없었을 MBC 의 결말을 두고 김병욱 감독이 운을 뗐다. 아직 주 6일 밤샘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얼굴엔 피로가 그늘져 있지만 이래저래 논란이 많았던 의 마지막을 말하는 어조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사람들이 세경(신세경)과 지훈(최다니엘)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나 봐요. 사실 작가들도 너무 심하다고 해서 고칠까도 생각했지만 애초에 제가 내린 결말을 밀고 갔어요. 희망을 못 줬다고 비난을 하는데, 사실 희망이라는 게 쉽게 오는 게 아니잖아요. 세경이 하나가 잘됐다고 해서 위안을 가진다면 그건 되게 얄팍한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원했던 건 희망이라는 게 쉽게 오는 게 아니니까 제대로 느끼면서 살자는 거였어요.”

사실 김병욱 감독이 움직인 자취가 그대로 한국 시트콤사가 되어버린 그의 전작들 역시 그저 웃기기만 했던 적이 없다. 등장인물들이 한바탕 우스운 소동극을 벌이지만 모든 것이 종료된 후에는 웃음 이상의 현실의 쓴 맛이 느껴졌다. 오지명의 슬랩스틱과 박영규의 유행어들로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SBS 에서도 처가살이로 드러나던 빈부의 문제와 의사와 간호사 사이의 계급의 격차 등 만만치 않은 문제들을 심어져 있었다. 뒤이은 SBS 는 주인공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시트콤 초유의 결말로 그의 비극적 감수성을 먼저 드러냈다. 언제나 삶과 맞닿아 있는 죽음, 결코 녹록하지 않은 세상살이를 다루기에 김병욱 감독의 시트콤은 그만큼 더 추억을 필요로 한다. “에는 유난히 플래시백 많았어요. 원래 회고 취향이 많은데다 나이 들수록 그런 게 심해지는 거 같아요. (웃음)” 늘 집과 병원을 오가는 쳇바퀴를 도는 지훈이 세경과 함께 벨벳언더그라운드의 LP를 들으며 쉴 수 있었듯이 추억은 팍팍한 현실의 도피처가 되기도 한다. 또 언젠가 조금씩 꺼내어보며 달콤함을 되새길 세경이와 준혁이의 행복한 한 때처럼 추억은 현실의 피로를 견디게 하는 자양강장제가 되기도 한다. 그처럼 김병욱 감독이 좋아하는 영화들도 누군가의 기억에서 건져 올린 추억의 한 조각, 먼 훗날 되돌아본 아련한 과거 같은 것들이다. 그의 작품들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던 영화들에서 당신 또한 잊고 있었던 추억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김병욱 감독│추억으로 기억되는 영화들
김병욱 감독│추억으로 기억되는 영화들
1. (A River Runs Through It)
1992년 | 로버트 레드포드
“이런 분위기의 영화를 좋아해요. 회고풍이랄까요? 실제로 이번 에선 회상 신, 플래시백이 많이 사용되기도 할 정도로 회고적인 내용을 좋아해요. 같은 영화들도 같은 이유에서 좋아하구요. 뭐라 그럴까 뚜렷한 서사가 없는 영화들에게 끌리는 것 같아요.”

은 누군가에게는 금발의 미청년 브레드 피트의 미소로 기억될 테고, 누군가에게는 맥클레인 가족의 비극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어떤 의미로 기억하듯 플라잉 낚시를 예술에 가까운 경지로 표현한 영상과 미국적인 풍광만은 아름다운 이미지로 남을 것이다. 로버트 레드포드의 세 번째 감독작이기도 하다.
김병욱 감독│추억으로 기억되는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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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Still Walking)
2008년 | 고레에다 히로카즈
“에는 이런 설정이 나와요. 큰 아들이 누군가를 구하고 나서 자신은 죽어버렸는데, 그 상황이 되게 말도 안 되잖아요. 귀한 아들이었는데 그 아들이 구한 사람은 가족들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도 아니었고. 그런 어처구니없지만 비극적인 에피소드를 에서도 쓰고 싶었어요. 물론 하지는 못했지만요. (웃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자신이 하고픈 말을 영화에 다 담아낸다. 잔잔한 물이 더 깊이 흐르듯 또한 그의 전작들처럼 큰 파고 없이 흘러간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을 회상하는 어머니의 담담함에서 아버지의 죽음 이후 비로소 화해하는 아들에게서 가족이라는 본질 자체를 되묻는 감독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린다.
김병욱 감독│추억으로 기억되는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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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Before Sunrise)
1995년 | 리처드 링클레이터
“이 영화도 오래 전부터 좋아한 영화예요. 에서 에피소드로 써먹었을 만큼. (웃음) 실직한 준하와 신지가 함께 만화방에서 만화책도 보고 남산도 오르면서 붙어 다녔는데 나중에 시간이 흐른 뒤에 그들이 갔던 추억의 장소들을 비추면서 한 회가 끝나요. 그건 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져온 거예요.”

유럽을 가로지르는 열차 안에서 셀린(줄리 델피)과 제시(에단 호크)처럼 우연한 만남을 꿈꾸지 않은 청춘이 있을까? 잠깐 동안 이어진 대화로도 둘은 서로에게 충분히 끌렸고 단 하루를 함께 보냈을 뿐이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서로를 추억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후일담과 수다로 가득 찬 속편 보다는 아련함으로 물든 를 강력 추천한다.
김병욱 감독│추억으로 기억되는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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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1988년 | 필립 카우프만
“의 세경이 캐릭터는 의 테레사에게서 영향을 받았어요. 끊임없이 운명 같은 걸 믿는 부분이 닮았죠. 세경이가 신발 때문에 지훈이와 처음 만난 것도 지훈이는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는데 세경이는 마지막까지 지훈과 처음과 끝을 함께 한다며 그를 운명처럼 생각하죠. 존재 자체를 무겁게 생각하는 아이를 그리고 싶었어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을 영화화한 작품. 끝없이 가볍게 살려는 남자와 그 가벼움을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겁게 사는 여자. 이들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상대방의 삶에 대한 태도를 견디기 힘들다. 여기에 자유로운 사회주의를 표방한 ‘프라하의 봄’이 짧은 막을 내린 뒤 소련의 침공이라는 격변이 포개지면서 격렬한 비극이 탄생했다.
김병욱 감독│추억으로 기억되는 영화들
김병욱 감독│추억으로 기억되는 영화들
5. (Christmas In August)
1998년 | 허진호
“이상과는 다르게 현실 속의 사랑은 불완전하잖아요. 서서히 사랑이 식는 것도 느껴지고. 물론 그런 것들이 리얼하긴 하지만 상처가 돼요. 도 두 남녀가 오랫동안 만났다면 뒤에 어떻게 됐을지 보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관념속의 완벽한 사랑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니까 그러기 전에 죽거나 끝나야죠. (웃음) 현실을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이상으로만 존재하는 사랑을 염원하는 마음이랄까요?”

주차요금 징수원 다림(심은하)과 동네 사진사 정원(한석규)이 죽음으로 인해 이별하지 않고 계속 만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고만고만한 연애를 하다 서로가 지겨워지거나 결혼이라는 뻔한 종착역에 다다랐을 것이다. 전자든 후자든 지루한 결말을 맞을 그들의 긴 연애보다는 8월의 장마처럼 금세 끝나버린 사랑의 안타까움이 더 아름답다. 2007년, 일본에서 동명의 영화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김병욱 감독│추억으로 기억되는 영화들
김병욱 감독│추억으로 기억되는 영화들
“이라는데 대체 지붕은 언제 뚫은 것이냐고들 하더라구요. (웃음) 사실 세경이는 순재네 집에 계속 있으면 먹고 살 걱정은 없어요. 그런데도 세경이가 거기서 나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에서 알을 깨는 것과 같은 거였거든요. 거길 떠나는 것 자체가 세경이로선 지붕을 뚫은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순재네 지붕을 뚫고 나간 세경이처럼 김병욱 감독의 작품 세계 또한 으로 또 다른 단계로 진입했다. 그간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가족들끼리 치고 박는 와중에 드러나는 현실의 단면에 집중 했다면 이제는 그것도 영원할 수 없으며 삶이란 어느 순간 어떻게 끝날 지 알 수 없고, 그게 바로 세상살이라는 통찰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이전의 김병욱 감독이 웃음이란 연고를 발라주며 상처를 벌렸다면, 이제는 까지고 피가 나도 상흔을 정면으로 들여다보게 한다. “이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예요. 이게 내 이야기의 끝이고 엔딩 이후엔 욕도 많이 먹었지만 후련해요. 그래서 다음 작품은 작가진을 오랜 시간을 두고 꾸려서 다른 걸 해보려구요. 사무실이나 유사가족 이야기 같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후, 또 다른 전환을 맞이할 김병욱 월드는 어떤 모습일까? 이제 막 대장정을 끝낸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다음 작품까지의 공백은 최대한 짧게,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 날릴 하이킥은 강하게 준비해서 돌아오길.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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