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를 넘치는 에너지와 객기로 정의한다면, 현빈은 20대가 아니다. 스물셋, 그는 유일하게 자신을 거두어준 아저씨 앞에서만 웅크릴 수 있었던 강국(MBC <아일랜드>)이었고, 스물다섯 죽은 친구 때문에 ‘사랑한다’는 말 조차 쉬이 내뱉지 못한 태웅(KBS <눈의 여왕>)이었다. 유일하게 웃고 화내며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냈던 MBC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도 그가 돋보였던 것은, 삼순의 배 위에서 형의 죽음을 덤덤하게 이야기할 때였다. 피칠갑을 하고 폭력의 중심에 서 있었던 MBC <친구, 우리들의 전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빈은 그렇게 깊은 눈빛과 쓸쓸한 미소로 20대의 ‘청춘’ 보다는 30대의 원숙함을 그렸다.

언제나 물기 어린 목소리로 누군가의 아픈 일상을 덤덤하게 그려내던 현빈이 최근 영화 <나는 행복합니다>를 통해 또 다시 새로운 모습을 선보였다. 그동안 지난 작품의 잔향을 전혀 남기지 않으면서도, 반걸음의 이동만을 허했던 그가 “만수와의 접점은 단 하나도 없던” <나는 행복합니다>로의 선택은 현빈 제2라운드 진입처럼 보이기도 한다. “잘할 자신은 없지만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로 “손가락 까딱하는 타이밍”까지 만들어내고, “답답해 죽을 것 같던” 현장 속에서도 기존에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재미들을 찾아냈다. <나는 행복합니다>를 통해 스스로에게 ‘나는 행복한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을 던지며 한 단계 성숙해진 그는 그렇게 다음 장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래서 현빈의 나이가 ‘아직’ 스물여덟이라는 사실은 가끔 놀라움을 안겨준다. 20대의 많은 배우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과는 달리, 캐릭터 이름 안에 꽁꽁 감춰진 ‘스물여덟’ 현빈의 일상은 어떨까. 국, 진헌, 지오, 만수 등 그가 맡은 캐릭터가 하나씩 쌓여갈수록 그의 일상이 더욱 궁금해진다. 그래서 그에게 혼자 있을 때 즐겨 듣는 음악을 물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그의 일상을 잠시 엿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1. Damien Rice의 < O >
첫 번째 현빈의 입을 통해 나온 뮤지션은 데미안 라이스였다. 그는 많은 배우들이 좋아하는 뮤지션으로 꼽는 데미안 라이스의 앨범 < O > 중 ‘Amie’와 ‘The Blower`s Daughter’ 두 곡을 선택했다. “‘The Blower`s Daughter’는 영화 <클로저>에도 삽입됐던 곡이잖아요. 영화도 음악도 너무 좋아했어요. 어쿠스틱 기타로 잔잔하게 흐르는 이 음악은 많이 가라앉게 만들기도 하지만, 혼자 집에서 맥주나 와인 한잔 하면서 많이 듣는 것 같아요. (웃음)” 황량한 벌판 위 불어오는 바람에 한 남자가 흔들리고 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 이미지 그대로 우울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I can`t take my mind off of you’라는 가사는 또 그렇게 마음을 울린다.



2. Jason Mraz의 < Mr. A-Z >
KBS <눈의 여왕>을 통해 탄탄한 몸을 드러낸 적도 있고, ‘꽃미남 야구단’ 플레이보이즈에서 야구를 하기도 하지만, 사실 현빈을 보는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그에게서 ‘운동’이라는 단어를 쉽게 떠올리지 못한다. 하지만 의외로 운동 마니아인 그는 “데미안 라이스나 제이슨 므라즈의 곡들을 들으며 스트레칭”을 한다. 그들의 잔잔한 목소리와 선율은 그야말로 몸의 긴장을 해소시켜주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선곡한 ‘Bella Luna’의 경우, MBC <소울메이트>에도 삽입되어 엇갈린 네 남녀의 사랑을 찬찬히 들여다보기도 했다. “가요도 좋아하지만 영화 때문에 미국에 있어서 그런지 팝을 자주 듣게 된다”는 그에게 물어봤다. 그래서 이제 안 들리던 단어가 들리냐고. 미소와 함께 돌아오는 대답, “별반 차이는 없어요.”



3. Black Eyed Peas의 < Boom Boom Pow >
앞의 두 곡으로 스트레칭을 끝냈다면, 이제는 뛰어야 할 시간. “블랙 아이드 피스의 ‘Boom Boom Pow’는 쿵쿵쿵 하면서 심박수를 빠르게 만들잖아요. 그래서 운동할 때 많이 들어요. 귀에 이어폰을 꼽고 러닝머신을 뛰다보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거든요. 지난번 부산에서는 1시간동안 그렇게 뛰어본 적이 있어요. 이번엔 한 시간 반에 도전해 보려구요.” 4년 만에 선보인 < THE E.N.D. (The Energy Never Dies) >는 빌보드 차트에서 연속 12주간 1위를 기록했고, 블랙 아이드 피스는 펜타포트록페스티벌과 단독 공연으로 두 차례 한국을 찾으며 국내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고 보니 모 음원사이트 CF에서도 무기력하고 지루한 남자를 즐겁게 만든 곡 역시 ‘Boom Boom Pow’였다.



4. 이승철의 < Part 2 >
‘애늙은이’라는 얘기도 종종 듣고, “주변에는 다 형들뿐”이라는 82년생 현빈은 오래전 이승철 노래를 꺼냈다. ‘네버 엔딩 스토리’나 ‘사랑 참 어렵다’ 등 최근 곡으로 이승철을 기억할만도 하지만, 오히려 그를 사로잡은 건 예전 곡들이었다. “이승철 씨 세대는 아닌데, 희한하게 옛날 것을 찾게 되요. 주변 형들 영향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구요. (웃음) 사실 요즘 노래는 잘 몰라요. 늘 듣던 걸 듣거나, 아이팟에 저장되어 있는 곡들을 듣다보니 그런 것 같아요. 요즘 노래를 들으려면 밴에 타야 돼요. (웃음)” <1집 Part 2>는 ‘마지막 콘서트’, ‘비와 당신의 이야기’ 등 버릴 곡이 단 한 곡도 없는 명반이다. 이승철의 대표곡은 아니지만, 앳된 얼굴과 목소리 안에 슬픔을 가득 담은 ‘슬픈 사슴’ 역시 명곡으로 회자되고 있다.



5. 부활의 <서정>
조근조근 이야기를 이어가는 현빈의 이미지에는 사실 서정적인 발라드가 제격이다. 그런 점에서 타이틀마저 <서정>인 부활의 10집 앨범은 잘 맞아 떨어지는 한 벌의 수트 같다. “‘Imagine’은 사랑했던 사람이 떠나가는 모습을 먼 곳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감정들이 그냥 눈을 감고 있어도 덤덤하게 다 그려지는 것 같아요. 정동하 씨의 보컬도 좋구요. 그리고 이 앨범 말고도 이번 25주년 기념앨범에 있는 ‘생각이 나’도 좋아해요. 그나마 이 곡이 가장 최신곡인 것 같네요. (웃음)” 그저 예능프로그램의 ‘외할머니’ 쯤으로 김태원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한 팀을 25주년동안 유지해오고 꾸준히 잔향을 남기는 음악들을 만드는 건 역시 부활의 리더 김태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현빈의 제2라운드



인정옥, 노희경, 표민수, 김윤철, 곽경택. 20대에 이 모든 제작진을 만나 연기해온 현빈은 그야말로 행운아다. 하지만 그는 그 행운을 “인복이 많다”는 말로 애써 뽐내지도, 숨기지도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 그래서인지 새로운 것을 원할 때마다 감독과 작가들은 현빈을 찾았고, 작품을 이어가면서 그는 스타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좋은 배우로 커나갈 수 있었다. 김태용 감독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본에서도 리메이크가 될 정도로 사람들에게 반추되고 있는 故 이만희 감독의 <만추>에 현빈을 끌어들였다. 100% 영어로 제작되는 작품이라 ‘언어’가 제일 걱정이라고 하지만 꼬리를 물고 다시 “언어에 감정이 묻힐까봐”라는 고민을 털어놓는다. 이 남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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