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앞으로 걸어오는 여배우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오랜만에 신은 하이힐, 시사회 행사를 끝내고 내려오던 계단에서였다. 순간 균형을 잃은 노배우의 몸이 본능적으로 지탱한 건 후배 여배우의 든든한 팔이었다. 다행히 큰 부상 없이 가벼운 멍으로 그친 이날의 사고, 어쩌면 오늘의 당신을 넘어지지 않게 붙잡은 건, 한 순간도 허투루 보낸 적 없는 그녀의 지난 세월인지도 모를 일이다. 전쟁 같은 삶의 전리품을 무거운 훈장대신 실용적 지팡이로 삼아 오늘도 한발씩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배우 윤여정. 그녀는 전설로 봉합되고 권위로 박제된 동상이 아니라, 여전히 내일이 기대되는 현역이다. 느린 속도면 어떠랴, 절룩거리는 다리라도 상관없다. VIP시사회에서 만난 후배 박해일에 대해 “나는 그렇게 담백한 얼굴이 좋더라”고 소녀처럼 말 할 수 있는 귀여운 여인, 나이만큼의 현명함과 나이 이상의 활력과 위트를 가진 배우 윤여정과의 2시간은 그렇게 눈 깜작 할 사이에 흘러가버렸다.는 인터넷잡지인데, 인터넷은 좀 하세요?
윤여정: 전혀 못해요. 이 기사도 프린트 해달라고 해야 해요.
그럼 요즘 포털 사이트에 ‘윤여정’을 치면 ‘이혼사유’ 같은 말들이 연관 검색어로 뜨는 것도 모르시겠네요.
윤여정: 아! 그래요? 드디어 몇 십 년 만에 내 이혼사유가 밝혀지는 거유? (웃음)
평소에 TV는 많이 보시는 편이세요?
윤여정: 많이 보죠. 나는 오히려 텔레비전 안 본다는 사람이 신기하더라. 책도 이제 눈이 아파서 오랫동안 못 봐요. 성격상 읽으면 한 번에 독파, 통독해야 하는데 무리가 많죠. 최근에도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쉬지 않고 다 읽었어요. 그나저나 공기번데기가 결국 뭐란 거예요? (웃음)
“배우들이 멋있어 보이려고 척 하는 건 다 개수작이지 뭐” ‘무릎 팍 도사’에 나가는 건 다른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과는 좀 다른 각오가 필요하잖아요. 개인사에 대한 질문도 많고, 돌려서 이야기 하지 않는 다소 독한 토크쇼이기도 하고.
윤여정: 그래서 처음엔 좀 망설였어요. 내가 예능에 나간 적이 없어요. 정말로 최초 출연! 한참 고민을 하고 있는데 이재용 감독이 ‘선배님들한테 여쭤보세요.’ 그러길래 ‘이순재 선배님?’ 그랬더니 먼저 출연한 이미숙, 고현정한테 물어보란 말이더라고. 다들 나가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합디다. 게다가 예상 질문지는 아주 우아하게 왔어요. 이혼 문제도 안 건드리고. 아, 이제 우리나라도 아주 세련되게 하는 구나, 생각했죠. 2주 고민 하다고 나가겠다고 했고.
물론 녹화 현장에서 우아한 질문이 나오지는 않았겠죠? (웃음)
윤여정: 아우, 강호동 씨 머리가 굉장히 좋더라고. 안 물어봤으면 하는 이야기를 결국 내 입에서 술술 나오게 해요. 어쩌겠수. 거기서 말려들면서 기운을 잃었지. (웃음) 그리고 나서는 벽이 다 무너져서 중얼중얼. 뭐라고 말 했는지 기억이 안 나요.
놀라운 질문은 없었어요?
윤여정: 질문 자체가 놀랍다거나 그렇진 않더라고. 그보다는 뭐랄까, 그 질문의 기술이 뱀처럼 스스륵, 재주가 참 대단합디다. 괜히 강호동이 아니구나 싶었어요. 전혀 불쾌하지 않더라고, 전혀. 오히려 수다만 떤 것 같아서 내가 오히려 미안했죠. 방송을 봐야 아이고, 내가 저런 말을 했네, 하겠죠.
의 촬영도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말이 최종편집에서 선택될지 모르는 상태니까, 시사 전, 후의 마음이 많이 다르셨을 것 같습니다.
윤여정: 어휴, 너무 너무 궁금했다우. 그런데 영화 시작부터 너무 낄낄거리면서 웃었어요. (이)미숙이랑 이거 우리끼리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라고 할 정도로.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가 기억이 안 나니까, 미숙이는 영화 보면서 계속 ‘나 뭐라고 하는 거예요?’하고 물어봐서 아주 시끄러웠죠. (웃음)
이미숙 씨가 급한 성격에 두서없이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선생님이 다 정리하는, 환상의 콤비를 보는 듯 했습니다.
윤여정: 내가 걔 통역사라니까. VIP시사 끝나고 노희경 작가에게서 ‘윤구라, 이구라 때문에 너무 즐거웠어요’ 라고 문자가 와서 이미숙한테 보여줬더니 ‘이구라가 뭐야?’ 그러더라고. 그래서 ‘너!’라고 답해줬지. (웃음)
배우들 모두 공동각본에 이름을 올릴 정도였는데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가셨나요?
윤여정: 정말로 일어난 일들을 기억하고 감독이 시나리오에 반영한 부분도 많았죠. 하루는 저녁을 먹는데, 어떤 분이 술이 취해서 날더러 여운계 씨 팬이라고, 너무 좋아한다고 그러시더라고. (웃음) 게다가 또 부득부득 싸인까지 해달래요. 그래서 ‘싸인은 못해드리겠어요. 제가 여운계가 아니라서요’ 그랬는데 그걸 영화에서 써먹었던 거죠. 그리고 어떤 인터뷰에서 기자가 정말 그렇게 물었어요. ‘에서 무슨 역할 하셨어요?’
여배우로서 보여주기 싫은 모습이란 게 있을 텐데 모두 용감하다 싶을 정도던데요.
윤여정: 우리가 이재용 감독을 너무 믿었던 거지. (웃음) 물론 나야 잃을게 뭐가 있었겠수. 그런데, 숨겨도 다 소용없어요. 세상 사람들은 다 알아요. 숨기면 숨길수록 더 잘 알지. 물론 이재용 감독한테 섭섭한 건 하나 있어요. 우리가 모두 이혼 얘기할 때 이미숙이 말한 건 뺐더라고. 왠 줄 아슈? 이재용 감독 이상형이 이미숙이거든. (웃음)
어쨌든 이건 영화촬영이고 모든 게 다 기록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배우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인 것 같아요.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계산을 하던지, 혹은 아예 확 놔버리던지.
윤여정: 난 놔버렸어요. 왜냐하면, 머리 굴려봤자 소용도 없고, 굴려봤자 더 웃겨지거든. 살면서 내가 여러 번 굴려봤는데, 달라지는 게 없더라고. (웃음) 그냥 가장 나답게 했으면 후회가 되더라도 저건 나니까, 위로가 될 텐데. 괜히 머리 굴리다가 저건 나도 아닌데 왜 저랬을까 더 후회가 될게 분명하니까. 그리고 난 눈이 나빠서 카메라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어요. 게다가 내 나이에 어머, 그 말은 하면 안돼욧! 이러면 흉하잖아. 오히려 고현정도 그렇고 다른 젊은 배우들이 용감했지.
그래도 배우는 내가 어떤 모습을 나 인척 연기하면 사람들이 속을 수도 있을 거라고 자신하는 때가 있지 않나요.
윤여정: 물론 나도 그런 때가 있었죠. 어떻게 그런 시절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어. 어디서 주워들은 멋있는 말도 지껄여 보고. 그런데 그런 게 다 개수작이지 뭐. (웃음)
촬영하시면서 특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으셨나요?
윤여정: (김)민희가 너무 예쁘게 취한 날이 있었거든요. 그날 민희가 얼마나 예뻤냐면, (손으로 하트 그리며) 선생님 저어는 너-어무 행복해요! 선생님이 너어어어무 좋아용! 그러고, 새 구두에 붙은 가격표를 계속 손으로 뜯고 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럽던지. 그런데 이재용 감독이 배려가 대단한 게 아직 어린 배우니까 그런 모습 나가면 안 된다고 영화에는 뺐더라고.
“ 때는 유노윤호가 틈만나면 전화하곤 했다” 에서도 그렇고 KBS 에서도 현장 스태프가 “윤여정 씨”라고 불러서 기분 나빠하는 장면이 있는데 정말 그렇게 불리시면 싫으세요?
윤여정: 우리나라 호칭이 참 복잡하고 많죠? 그런데 솔직히 윤여정 씨, 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기분이 썩 좋지는 않더라고. 이야기도 사실 실제로 있었던 일이에요. 한 어린 조연출이 자꾸 윤여정 씨, 윤여정 씨 부르는 거야, 그래서 내가 불러다 놓고 “누구누구 씨라고 부르는 게 법에 저촉되지는 않는데, 엄마 친구한테 윤여정 씨, 이렇게 부르면 그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라고 했더니 친숙하지 않은 배우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고 자기 방식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물론 드라마에서처럼 연습실에서 쫓아내진 않았어요. 그랬으면 아마 KBS에서 배역 못 받았을걸요. (웃음).
특히 나이든 배우들은 유독 까다로울 거라는 인식이 많긴 해요.
윤여정: 어릴 때, 저거 성질이 보통이 아니야, 그런 말은 들었죠. 그게 늙으면 까탈로 불리는 거고. 배우들이 좀 억울한 게 자기 주장을 확실히 하다 보면, 까탈스런 사람이 되고, 성질이 더러운 게 되고 그러더라고. 이재용 감독처럼 부드러운 가운데서 주장을 관철시켜야 하는데 말이죠. (웃음) 이 영화를 계기로 나도 이재용 감독처럼 해 보려고. 이렇게 매일매일 배우면서 산다우.
어린 남자배우와 연기를 할 때도 어쩐지 어머니와 아들 같기보다는 로맨스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에서 ‘미친 양언니’ 최다니엘과도 그렇고 MBC 에서 유노윤호와도 묘한 멜로 분위기를 만들어 내시거든요.
윤여정: 감독은 아예 작정을 한 경우였죠. 봉군이(정윤호)에게 이 늙은이를 보고 계속 ‘애자 씨’라고 부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처음 연기를 하는 친구니까 그게 쉬웠겠수? 결국 박성수 감독이 ‘넌 이 할머니랑 연애를 하는 거다’라고 주입을 시켰더라고. 워낙 트레이닝 받은 대로 열심히 하는 성격이라 틈만 나면 “애자 씨-” 하면서 전화를 걸었어요. 애자 씨, 저 윤호에요. 애자 씨, 식사 하셨어요, 라고. 물론 드라마 끝나고 나서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는데 선생님, 저 상해 공연인데요, 그러면서 전화를 해요. 그래서 시사회 올래? 그랬더니 그렇게 진짜 와줬더라고, 고맙게도.
예전에 인정옥 작가가 유일하게 여자 향기를 내는 노배우, 라고 말하더군요.
윤여정: 그래서 내가 국민 어머니가 못 되는 거라우. (웃음)
국민 어머니, 그 대열에 끼고 싶으신가요?
윤여정: 하도 사람들이 국민 어머니, 국민 여동생 하니까 어떤 날은 나도 저기에 껴야 하는 게 아닐까, 못 끼면 마이너인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나는 싫어요. 국민 어머니 말고, 그냥 남들과는 다르게 엄마 역할을 한 배우로 남고 싶을 뿐이예요. 내 두 아들 엄마 노릇하기도 힘들어 죽겠는걸.
영화에서 김옥빈과 나란히 앉아 조용히 담배를 피우던 장면이 참 좋았어요. 보통의 어른들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내가 젊었을 땐 말이야,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을만한데, 윤 선생님은 충고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윤여정: 네, 그런 거 싫어요. 젊은 배우들 욕하면서 종종 걔한테 뭐라고 좀 말해,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말을 내가 왜 해? 그 사람들도 그냥 일하러 나온 직장 동료잖아요. 물론 나한테 불손하게 구는 사람은 안 친하게 지낼 뿐 인 거죠. 내가 도덕 선생님도 아니고 엄마도 아니고, 일하러 나온 프로에게 왜 이래라 저래라 해요. 만약에 아주 좋은 아이인데 옥에 티가 하나 보이면 진심 어린 충고를 할 수는 있지만.
하지만 배우사회도 그렇고, 그런 생각을 하는 어른들은 별로 없잖아요. 선후배, 위아래를 나누고 나이나 위치의 권위를 내세우고 가끔은 폭력적이기도 하고.
윤여정: 나는 이 사회가 좀 더 수평적이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렇다고 나한테 여정아, 그러라는 건 아니고. (웃음) 경력자에 대한 존중과 에티켓이 마치 주종관계처럼 이해되는 게 이상해요. 너무 모심을 받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그게 권력이 되요. 그리고 그걸 자기도 모르는 새 휘두르고. 그런 선배들을 가끔 보면서 나는 저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들들에게도 늘 그렇게 말해요. 그런 사람들이 많겠지만, 너만 그러지 않으면 돼, 라고.
“난 ‘신 들린 연기’가 싫다” 생활을 위해 작품을 선택하는 경우를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혹 그럴 때도 나름의 기준이 있으신가요?
윤여정: 돈 중요하죠. 많이 주면 더 좋고. (웃음) 대신 전에 했던 역할은 피하는 쪽으로 선택해요. 보통 한 배우의 이미지를 소진시킬 때까지 반복 이용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누가 이런 역할로 인기를 얻었으면 더 이상 안 먹힐 때까지 뽕을 빼먹죠. 그래서 나 딴에는 이미지의 반복을 피하려고 애를 쓰는 편이예요. 돈은 되지만 지난 번 캐릭터와 너무 똑같으면 포기하는 경우도 있고.
하지만 다양한 역할을 통해 이미지 변신을 꾀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젊은 배우들에 비해 나이든 배우들의 선택의 폭은 한정되어 있잖아요.
윤여정: 이 나이에 드라마에서 역할이 대부분 엄마죠. 만날 밥하고 빨래하고 아니면 결혼 반대하고. 난 그래서 우리 아들 결혼은 반대 안 하려고. 드라마에서 하도 해서 말이지. (웃음) 같은 엄마라도 지난번에 했던 엄마하고는 좀 다른 엄마를 연기하려고 해요. 예를 들어 같은 경우 강남에 사는 되게 재수 없는 여자였어요. 대체로 배우들이 어떤 역할을 맡으면 미리 너무 앞서 가는 경향이 있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 재수 없는 여자야, 라고 설정을 하는 거죠. 그런데요, 사실 재수 없는 여자는 자기가 재수 없다는 사실을 몰라요. 보는 사람들이 재수 없게 보는 거죠. 내가 보기에 그 여자는 누구한테나 잘 보여야 하고, 옷도 잘 입어야 되고, 요리는 어떻게 해야 하고, 이런 게 너무 분명한 여자일 뿐이었거든요. 여하튼 너무 절실하게 연기를 하니까 결국 재수 없는 게 아니라 코미디로 받아들이더라고요. 그래서 자꾸 분량이 늘어나서 역시 재수 없는 딸로 나온 이윤지랑 둘이 힘들어서 혼이 났죠.
데뷔 초에는 영화와 드라마를 오갔지만 영화 전에는 거의 드라마 출연만 해오셨어요. 이후로 , 최근엔 홍상수 감독의 까지 영화와 드라마를 바쁘게 오가는 패턴으로 바뀌신 것 같아요. 이렇게 다른 현장에서 오는 새로운 에너지가 있나요?
윤여정: 계속 같은 판에 있으면 누에 실 뽑히듯이 뽑혀 먹어버릴 텐데, 다른 현장을 오가다 보니 좀 덜 뽑히는 건 있는 것 같아요. (웃음) 환경이 바뀌니까 좀 더 배우는 것도 있고. 솔직히 처음에는 영화 쪽 사람들을 싫어했어요. 이상하게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우들을 경시하는 느낌이 있더라고. 그런데 일을 좀 하다 보니 이해가 되더라고요, 영화에서는 TV에서 늘 봤던 얼굴을 기피할 수밖에 없으니까. 지금은 조금 편견이 무너진 상태에요.
대중들은 여배우가 뭘 입었는지 늘 궁금해 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검소하게 살기를 바라는 이중 잣대가 있는 것 같아요. 게다가 나이가 들면 그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누르고 초연하길 바라고. 그런데 에서 윤여정 선생님은 젊은 여배우들에 비해 오히려 여자들이 가진 속물적인 욕망을 가장 크게 드러내놓고 표현하는 사람처럼 그려지거든요.
윤여정: 명품을 일부러 찾는 게 아니라 좋은 질의 좋은 물건을 선호할 뿐이죠. 거기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건 없어요. 열심히 번 돈으로 내가 옷을 사고 그걸로 내 삶에 위안을 얻는다면 그걸로 된 거죠. 내 나이에 사치를 하면 얼마나 더 하고, 옷을 입으면 얼마나 더 입겠어요? 나쁜 일로 번 돈도 아니고 빚을 지고 옷을 사는 것도 아니고. 여기는 자본주의국가인데 소비를 누구 눈치를 보면서 하는 게 오히려 게 이상하잖아요.
기억 속에 처음 자리 잡은 윤여정 선생님은 기존 배우 같지 않은 톤으로 연기하는 사람, 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다지 극적이지 않은 연기스타일을 이상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 같아요.
윤여정: 네 가끔, 연기 좀 성의 있게 해주세요. 그런 말도 듣죠. (웃음)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를 보면서 저 감독 참 명장이구나 싶었던 이유도, 주인공이 덤덤하게 피아노를 치는 장면 때문이었어요. 울분을 담아 격정적으로 연주를 하기보다 그 남자의 무표정한 얼굴에 더 가슴 찢어지더라고요. 보통 ‘신 들린 연기’ 좋아하잖아요. 취향의 문제일 수 있지만 난 그런 연기가 싫어요. 예를 들어 아들이 죽었어. 그러면 보통 엄마들이 옷고름을 풀면서 땅을 치면서 울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진짜 아들이 죽으면 그럴까요. 오히려 아무 느낌이 없을 것 같고 울지도 못할 것 같아요. 뒤돌아서서 울지도 어쩌지도 못하고 어깨로만 울음을 꾹꾹 참고 있는 쪽이 훨씬 좋아. 그게 더 아픈 것 같다고. 나 역시 그런 연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고요. 그런데 보통 현장에서 그런 신을 연기할 때면, 좀 격정적으로 해달라고들 하죠. 국민 정서를 위해서 오버를 줄일 필요는 있다고 봐요. 어떤 감독이 그러더라고. 찍을 때는 좀 더해주면 좋을 것 같았는데, 편집하고 나니까 오히려 내가 한 연기가 적당했다고, 그런 말 들으면 너무 고맙죠.
오히려 요즘의 젊은 배우들의 생활적인 연기 톤에 가까운 느낌이죠. 혹시 내가 시대를 너무 앞서 태어났거나, 조금 더 후에 태어나셨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하세요?
윤여정: 아뇨, 세상 일이 다 변하듯이 연기도 변하는 거니까 괜찮아요. 가끔 이런 나를 인정해주고 귀하게 여겨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더 좋죠. 아마 지금이라면 내 연기도 그냥 평범한 연기 중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글. 백은하 on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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